폭우의 소리가 기억과 의식의 바다 깊숙한 곳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구조체는 비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센은 코트를 벗어, 인간처럼 둘 머리 위에 걸쳤다.
최악이야.
친구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비앙카는 정신 차린 듯, 시선을 눈앞에 있는 여성의 얼굴에게로 돌렸다. 차가운 빗물이 비앙카의 팔에 떨어졌고 그녀의 시각 초점이 조금씩 집중되면서, 감각도 하나둘씩 돌아왔다. 비앙카는 그제서야 지금 센에게 이끌려 빗속을 달리고 있다는 걸 의식했다.
그러게...
그리고 방금 그 영화의 결말도 최악이었어.
그래? 난 괜찮았는데. "법이 효력을 잃고, 신의 이름으로 불의를 징벌한다면, 이런 살육 자체가 신의 규칙을 범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일 뿐인데, 굳이 결말에서 이성을 찾아서 관객들에게 "도덕 윤리"를 논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답을 제시할 게 아니라면, 관객들에게 문제를 던져주지 말았어야지.
그건 그렇네. 그런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천벌받는 건 우리 같은 존재일 텐데.
헐, 넌 아직도 그런 말을 하니?
뭐가?
전차 레일의 갈림길에서 비앙카와 센은 걸음을 멈췄다.
지금 이 시대가 워낙 터무니없다 보니, 우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경우도 있지. 하지만 그럼과 동시에, 모든 사람의 운명이 우리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이 세계는 우리가 필요한 게 아닐까?
센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 말을 들었던 게 언제 적이었을까? 그날도 하늘에서 같은 비가 내렸을까?
전차가 접근해 오는 날카로운 소리를 따라, 비앙카의 눈동자 속에서는 전투의 광경이 스쳤다.
평화롭던 장면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그녀는 손에 활과 화살을 움켜쥔 채, 사방에 포연과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에 서 있었고, 부패한 냄새가 그녀의 콧속을 가득 채웠다.
잿빛 하늘에서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앙카의 발밑엔 인간의 피와 구조체의 순환액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빗방울이 웅덩이에 떨어지며 나는 소리는 마치 심장의 고동 소리 같았다.
센과 얼굴이 비슷한 구조체가 몸이 일그러진 상태로, 비앙카의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퍼니싱의 침식을 상징하는 화염이 곧 구조체를 잠식해 없앨 것만 같았다.
침식된 구조체는 뒤틀리고 괴로워하며 업화에서 걸어오는 수난자처럼 완전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비틀거리며, 비앙카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난 계속 후회하고 있었어.
그날 좀 더 단호하게 결정해서 내 여동생을 죽였다면, 그 사람들은 죽지 않았겠지.
하지만... 동생이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흔들려서 죽일 수가 없었어.
사실 난 항상... 감정을 내려놓는데 서툴렀거든.
아, 언... 언니...
구... 구해줘...
아아아아아아아아!
더 많은 침식체와 배신자들이 주홍빛 빗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가여운 구걸이나, 격렬한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처결을 받은 자의 속삭임은 결국 반복되는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살아남고 싶어... 우린 살고 싶어!
동생아, 언니가 미안해.
귓가에 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친구는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들어, 피 묻은 총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센의 팔은 비앙카의 팔에 꼭 붙어 있었고, 그녀는 이미 사망한 이를 향해 무기를 들었다.
내 연약함과 망설임이 돌이킬 수 없는 희생과 비극을 낳았어. 내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또 다른 소중한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었고.
비앙카와 센의 기억과 모습이 점차 뒤섞여졌다... 그리고 같이 동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우린 결국 같은 길을 선택했어.
검이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비앙카의 얼굴에 튄 건 피가 아닌 코를 찌르는 휘발유 냄새가 나는 탁한 액체였다.
비앙카의 앞에 쓰러진 건 정화 부대 대원이었다. 비앙카는 설원에서 신부를 죽인 몇 년 전으로 돌아갔다. 시야는 하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비앙카의 숨을 휩쓸었다.
비앙카는 숨을 크게 쉬며, 총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눈보라 사이로 보이는 주위의 시체 중에는 침식체도 있었고, 동료도 있었다. 그들은 퍼니싱에 완전히 침식되기 전에 눈 위에서 살해당했다.
난 줄곧 그들의 시체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어. 그중에는 가족, 친구 그리고 전우도 있었지.
비앙카는 <//센> 눈밭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비앙카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그때, 너처럼 잔인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눈밭에 쓰러져 있던 "시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고개를 드니 얼굴이 계속 변하고 있었다. 일부는 비앙카의 기억에서, 일부는 센의 기억에서 온 것이었다.
난 어느새 아수라의 길에 들어섰어. 어느 길에 들어서든, 다른 쪽의 기대를 저버리기 마련이니 말이지. 그래서 죄책감을 안고,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이런 죄책감은 너무 무겁더라, 왜냐하면 감성이 이성적인 판단에 영향을 줬으니까. 그래서 난 감정을 버렸어, 제일 쉬운 길을 택한 거지. "아무런 감정 없이 이익 극대화"의 방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는데, 인간성을 버리고 나니, 생활 속의 "고통"은 거의 사라진 느낌이었어.
따뜻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앙카가 <//센> 손을 뻗어 자기 얼굴을 만졌을 때, 그것이 피가 아닌 투명한 액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몸이었던 기억이 너무 오래된 나머지, 그녀는 인간으로서 우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잊어가고 있었다.
인간성?
귓가에 정화 부대 대원의 질문이 들려왔다.
아직도 말세에 인성이 있다고 생각해?
그는 마치 터무니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분노하다 못해 웃었다.
정화 부대의 대장으로서 아직도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거야? 참으로 웃겨. 그런 생각은 다른 이들에게 전투는 가치가 있고, 전장에는 선악이 있다는 것을 믿게 해서 목숨을 잃게 할 뿐이야.
참전하는 쪽에서의 희생은 불가피해요. 전쟁터에 나가기 전 누구나 그런 각오와 판단은 있어야 해요.
하지만 우린 순수한 살육 기계가 아니기에 인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 지켜야 할 선까지 잃어버린다면 전쟁 중에 인성은 더욱 타락하게 될 것이고, 다음의 전투는 더욱 차가운 희생을 초래하게 될 거예요.
이런 잘못의 연속이 언젠가 우리의 전투 의미를 왜곡시킬 거예요.
하지만 지옥에서 선을 찾는 방법으로는 전장의 본질을 바꿀 수 없어.
선과 인성은 동일하지 않아요. 인성도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 선이든 인성이든 생명과 직접 등가 교환할 수는 없어요.
손에 검을 들었다고 해서 자신이 생명의 가치를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지옥에 있을수록 지켜야 할 선을 넘는 대가로 잠시의 평안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너의 그 큰 생각이 정말로 전쟁을 멈출 수 있었으면 좋겠네.
화가 다소 가라앉았지만, 진심으로 실망한 듯한 말투였다. 대원은 비앙카를 힐끗 쳐다본 뒤, 논쟁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비앙카, 당신은요? 비앙카도 제가 정화 부대 대장을 맡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나요?
정화 부대 휴게실 의자에 앉은 센이 비앙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센의 실력과 망설이지 않는 결단력은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어요.
다들 강한 것을 좋아할 뿐이에요. 하지만 절 강하게 만드는 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제 마음이에요.
살육은 죄를 동반하고, 선택할 때마다 죄의 어둠에 물들게 되죠.
하지만 비앙카는 결코 자신이 무고하다고 생각하지 않죠. 그리고 책임을 퍼니싱에, 잘못된 이 세계에 전가하지 않아요.
자신의 죄악을 잘 알고 있기에 죄악을 짊어지고 지옥으로 가지만, 도중에서 구원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어요.
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당신은 잘못의 연결 고리를 직접 끊고, 새로운 죄를 짊어진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갔어요.
영화에서 "우리는 나쁜 사람을 경계해야 해. 하지만 더 경계해야 하는 건, 선량한 사람의 냉정함이야."라는 말도 있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비앙카의 이런 생각이야말로, 저 같은 "냉담한 이"가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이에요.
전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센은 비앙카의 헝클어진 머리를 부드럽게 정리했다.
죄송해요. 말이 너무 길었죠?
센...
그래도 마지막으로 비앙카와 함께 말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비앙카는 센의 눈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자기 모습과 이 기체의 본래 모습인 "마녀"의 또 다른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센의 눈엔 다른 감정도 담겨 있었다. 몇 년 전, 그 설원에서 비앙카는 비슷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고통.
그녀의 발버둥.
그녀의 갈망.
그녀의 미련.
……
센은 말없이 이름 없는 전차에 올라 비앙카에게 인사했다. 그 모습은 마치 "내일 봐요"라고 말하는 친구 같았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였고, 임무를 수행한 뒤, 엄격한 표정의 센은 다시 정화 부대의 휴게실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비앙카에게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 뒤, 비앙카와 센은 휴게실에 앉아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휴일이 되면 가끔 황금시대의 영화도 보러 갈 것이다.
이별하는 꿈에서 깨어났다. 의식의 바다 편차도 일시적으로 안정됐다.
비앙카는 눈을 뜨고 기체를 재가동시켰다. 비앙카는 자신이 박물관에서 아직 무너지지 않은 구석에 놓여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주위는 아직 적조로 둘러싸여 있었다.
입가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고, 옆에는 센의 귀걸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옆에 왔었다는 흔적이었다.
……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비앙카는 추적 장치를 들고, 과거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소녀는 적조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이합 인간형을 눈앞에서 조용히 바라봤다. 리브와의 비장한 전투에서 이 무서운 이합 생물도 큰 타격을 입었었다.
지금은 여성 이합 생물만 살아남았고, 양수에 있는 태아처럼, 적조에 담겨 있었다.
이합 인간형을 잔해 상태로 회수했어. 하지만 적조 속에서 복원했는데도, 껍데기만 남았어.
괜찮아. 실험 품으론 충분해.
이 계획이 성공하게 되면, 구조체가 될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이 계획으로 완전한 환생을 얻을 수 있게 돼.
하이디,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혹사, 고마워.
어서 와. 그레이스.
이게 바로...
맞아. 구조체가 될 수 없는 몸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얻고 싶지? 쟤랑 한 몸이 되면 돼.
한 몸이 된 저는 여전히 저인가요?
당연하지. 내가 장담해.
당신이 장담하신다고요?
아니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네게 다른 선택지가 있기는 해?
너 많이 힘들잖아. 그레이스.
끝나지 않는 도망 생활, 적조, 침식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잖아.
넌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믿잖아. 신이든 손에 든 무기든. 아니야?
넌 많은 사람을 속여서 이곳까지 오게 했어.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는 정돈 알고 있었잖아.
전...
네가 그녀의 몸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네 말과 신의 계시 그리고 신분 이 모든 게 증명될 거야. 그리고 앞으로 퍼니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좋은 거 아니야?
…………
자, 그레이스. 기나긴 두려움과 작별하기 위해, 넌 반드시 이것을 이겨내야 해.
네.
그레이스가 자신의 최후를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승격자! 그리고 인간?!
뒤이어 우르르 들어오는 정화 부대가 방 안에 있는 하이디와 혹사를 포위했다. 다들 손에 무기를 들고 긴장한 태세를 보였고, 섣불리 다가가지는 못했다.
당신들은?
비켜! 승격자 손에 죽고 싶은 거야?
하지만, 그녀는...
사기꾼 혹사의 말을 아직도 믿는 거야?
아직 살아있을 때, 어서 도망쳐!
…………
혹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완전무장한 정화 부대를 향했다.
이건 이합 인간형? 이런 장소로 옮겼다니, 또 더러운 실험을 하려는 건가?
앞장선 센은 눈살을 찌푸리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센은 노리스와 눈빛을 교환했다. 노리스는 이내 센의 명령을 이해했다.
혹사를 죽이고, 이합 인간형이 재생할 모든 가능성을 제거한다.
더러운... 실험?
센의 말이 혹사의 신경을 건드린 것인지, 혹사는 자기 처형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두가 보이지 않는 노여움을 느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어떤 파도가 이곳으로 밀려오는 듯,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그 사람들이 했던 거에 비하면, 난 사기꾼도 아니지. 더럽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너희들은 여전히 그들과 같은 진영에 서서,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쿠로노 히사카와...
…………
다이달로스?
…………!
걱정 마. 난 복수를 위해 싸울 생각은 없어.
다만, 이 계획이 "더럽다"라고 했으니, 직접 느끼게 해줄게. 그러면 이 더러움이 그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전투 준비!
전투가 끝난 뒤, 대부분의 정화 부대 대원은 바다 밑에서 올라오는 이합 생물에 의해, 하나도 남김없이 잠식돼 버렸다.
그만해. 죽이려면 얼른 죽여.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된 센은 생선과 비슷한 모양의 이합 생물에 속박돼 있었다. 그리고 센은 더 이상 발버둥 치치 않고, 두려움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혹사를 노려봤다.
설마 내가 목숨 구걸하는 걸 듣고 싶은 거야? 승격자들은 대부분 이런 악취미가 있던데.
난 네가 말한 그런 악취미는 없어.
내 적이라고 해도, 네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럼, 지금 바로 부활시켜 줄게.
나에게 뭘...
무서워하지 마. 내가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줄게.
센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가 있었지만, 승격자의 연민은 한 톨도 얻지 못했다. 아니, 혹사의 인식 속에선 이런 행위 자체가 연민일지도 모른다.
달아난 인간을 대신해 이 실험을 완성해 줘.
센은 속박된 채, 태아의 모습을 한 이합 인간형에게 눌렸다.
그게 성공하기를 빌어. 잘되면 네 생명은 더 높은 형태의 몸에 들어가게 되는 거니까.
잘 되길 바라.
추적 장치의 영상은 센이 이합 인간형으로 용해되기 전, 마지막 순간에 끊어졌다.
센의 표정은 무서워했을까? 아니면 평소처럼 냉철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조금이라도 아쉬웠을까?
……
비앙카는 그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센의 허상이 이 방에 발을 디딘 순간으로 되돌아가, 침묵한 채 비앙카를 봤다.
일의 전말을 알게 된 비앙카는 이곳이 센이 살해된 곳이고, 센의 의식과 융합된 이합 인간형이 자신을 구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비앙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센의 허상을 안았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센의 허상은 비앙카의 품에서 아무것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센이 사라진 곳은 박물관의 거대한 유리 벽 앞이었다. 비앙카는 그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봤다. 심흔 기체의 코팅은 퍼니싱에 의해 부식돼 벗겨졌다. 그리고 코팅 밑에 숨겨져 있던 지팡이검을 든 마녀의 또 다른 모습이 유리에 비쳤다.
하지만 익숙한 모습이 의식의 바다 안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기체에 현재 코팅을 임시로 제작했어요.
자신의 귓가에 흐트러진 머리를 만진 비앙카는 혼란스러운 전투에서 센을 처음 만났을 때에 자기 머리를 정리해 주며, "이런 모습이어야 정화 부대 대장 같죠."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비앙카는 헝클어진 긴 머리를 묶고, 센이 남긴 귀걸이를 꼈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낸 뒤, 코팅을 정리했다. 이윽고 센의 흩어진 허상에 손을 흔들며 작별했다.
제 존재는 변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당신을 비웃는 일은 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센.
눈을 감은 비앙카는 센이 전한 추억과 감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전 마음속의 변화를 받아들일 거예요.
다시 눈을 떴을 때, 비앙카는 눈에 각오를 담아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어둠 속에서 태어난 "마녀"는 어둠에서 온 무기를 들고, 무너질 해양 박물관을 떠나, 바다 위의 빛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