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표면 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공중 정원에서 온 비행선 한 척이 눈에 띄지 않게, 달 표면으로 착륙했다.
비행선의 문이 열리자, 그림자 하나가 힘찬 모습으로, 달 표면 위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아주 미세하게 달 토양이 피어오르며, 롤랑의 발자국을 남겼다.
이런, 레드 카펫은 없어도, 슈퍼스타 롤랑을 기다리는 팬들은 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사람은커녕, 토끼 한 마리도 없을 것 같은 적막하고 황량한 달이라는 게 생각난 롤랑은 자신을 비웃는 듯, 미소를 지었다.
롤랑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멀리서 격렬하게 폭발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구조체의 원체인 팔 하나가 폭발이 있던 방향에서 롤랑의 얼굴로 빠르게 날아왔다.
얼굴을 찡그린 롤랑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여, 날아오는 팔을 아주 미세한 차이로 피했다.
조금 과하긴 한데, 환영 인사가 없는 건 아니네.
폭발로 근처까지 날아온 구조체의 원체가 달 표면에서 뒤틀리면서 일어나, 롤랑에게 달려들었다.
롤랑은 그제야 폭발로 인해, 불완전한 원체가 퍼니싱에 침식되어, 끔찍한 침식체가 됐다는 걸 알게 됐다.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인가? 아니면, 루나 아가씨가...
롤랑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면서, 산탄총의 총구를 침식체의 머리에 대고, 3분의 2를 바로 날려버렸다.
총알의 거대한 동력은 극히 낮은 중력에서도, 몸을 날려 일어서려고 하던 침식체 여럿과 부딪혔다.
모처럼의 내 분량을 도대체 누가 뺏어간 거야. 참 궁금하게...
롤랑은 품에 안고 있던 저장 용기를 꺼내, 폭발하는 불빛에 비춰서, 안에 들어 있는 줄기세포를 관찰했다. 줄기세포는 저중력 환경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일을 의뢰받았으니, 어떻게든 해야겠지. 이건 배우의 가장 기본적인 직업적 소양이니까.
롤랑은 눈을 감고, 희미하지만 아직 유지되고 있는 연결을 감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매우 흐릿했던 연결이 점점 뚜렷해졌다. 역시 루나는 달에 있었다.
이제 루나 아가씨를 찾은 후, 모든 것을 운명과 아가씨의 선택에 맡기도록 하자고.
롤랑은 기지개를 켜며, 루나가 감지된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The show must go on.
루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카레니나는 동력 실험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루나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너에게 인간의 그 부푼 희망을 파괴할 용기가 정말 있어?"
만약 카레니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겠지만, 이 선택은 모든 인간과 연결돼 있었다.
젠장.
그래도 혼자 전투하고, 혼자 다치고, 혼자 발버둥 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야,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어깨에 뭔가가 부딪힌 느낌을 받은 카레니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 표면 기지를 이미 떠났어야 했던, 테디베어가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귀신이라도 본 거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 아직 살아있거든, 당분간이긴 하겠지만.
테디베어 아가씨, 시스템 본체의 이 부분이 퍼니싱에 침식됐습니다. 우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합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머리를 긁적이며, 손에 든 휴대용 단말기에서 발생한 문제를 테디베어에게 물었다.
아합 아저씨와 너희들은 또 왜 돌아온 거야??
우린 두 그룹으로 나누기로 했어. 비기술자들은 부상자들을 보호하면서, 달 표면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철수한 다음에 구조를 기다리기로 했고, 기술자들은 이곳으로 돌아와서 계속 작업하기로 했어.
[삐!] 너희들이 무슨 작업을 해!!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고 했잖아!
매우 화가 난 카레니나를 본 테디베어는 역으로 웃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우리가 돌아오기로 한 건, 다 자신을 위해서야.
맞습니다! 부대장이 말한 대로 저희가 철수한 뒤, 대장님이 죽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도록, 묵인한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그럼, 저희도 살기 위해서 뭐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카레니나 대장님, 그리고 전 신입이 아닙니다. 정비 부대로 배치된 지 햇수로 2년, 아니지, 2년 3개월이나 됐습니다.
카레니나가 하려는 질문을 계속해서 끊던 정비 부대의 연구원은 재빠르게 보고를 완료한 후, 바로 작업 대열로 돌아갔다.
우리는 이후의 영점 에너지 엔진 복원과 개선을 위해, 기지에서 관련된 자료를 최대한으로 수집 및 기록하고 있었어.
복원과 개선? 그게 정말 가능해?
우리의 운과 속도에 달려있어. 이전에 우린 영점 에너지 엔진만 사용 권한이 있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싶어도, 쿠로노 쪽에서 계속 방해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이 기지는 폭발할 거니까.
테디베어의 단말기를 건네받은 카레니나는 공개된 연구 영역에서 볼 수 없었던 기밀 내용이 기록된 걸 확인했다. 만일 엔진의 실행과 폭주한 현장의 관측 데이터까지 더한다면...
새로운 영점 에너지 엔진을 제작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어.
카레니나는 아합을 향해 바라봤다. 쿠로노 연구원들은 목숨까지 걸고, 테디베어를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우주 쓰레기가 되는 것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쿠로노의 내부 징벌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에 용서받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특히, 베살리우스 아가씨가 연구 책임자가 된 후, 이대로는 돌아가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아합 주임님, 저들과 잡담은 이제 그만하시죠. 곧 끝나갑니다.
카레니나는 현장에 남아있는 다른 쿠로노 연구원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희들 동력 연구실의 작업은 거의 다 끝나가니, 빨리 도구를 정리해. 이제 영점 에너지 원자로 근처에서 에너지 출력과 전환 비율 데이터를 기록해야 해.
그곳에 있는 기기들은 다 침식돼서, 우리만 가서 기록해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카레니나를 본 테디베어는 주먹 쥔 가냘픈 오른손으로, 카레니나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한 대 쳤다.
이런 멍청이! 지금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한 뒤의 일을 고민하고 있을 때냐? 주눅 든 꼬락서니가 볼만하네.
너무 많이 고민하지는 마. 네가 꼭 해야 할 일만 하고, 다른 일은 우리에게 맡겨. 너한테도 같이 싸우겠다는 동료들이 있어.
너희들...
멀리서 폭발하는 굉음이 들려오면서, 땅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출발해야 해.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넌 가서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해. 우리는 어떻게든 과학의 불씨를 훔쳐볼게.
미소가 사라진 테디베어는 서로 다른 조직에서 왔고, 다른 신념을 가졌지만, 같은 목표를 가진 기술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카레니나는 어떻게 할지 조금은 막막했지만, 무기를 들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알아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죽지 마라. 우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면,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테디베어 아가씨, 그 말은 좀 불길합니다. 카레니나 님은 분명히 성공할 겁니다.
두고 보자고!
카레니나와 테디베어는 서로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등지고는 각자의 전장으로 향했다.
거대한 충격으로 이상하게 뒤틀린 문을 뛰어넘은 롤랑은 구조체 실험실로 들어갔다.
실험실의 중앙에는 롤랑이 계속 찾던 백색의 소녀가 있었다.
루나 아가씨.
……
롤랑은 조용히 루나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받지 못했다. 그것으로 대행자인 루나가 자신과의 연결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롤랑은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루나라는 이름을 가진 대행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루나의 몸에 있는 퍼니싱이 둥근 고리 모양의 장치에 끊임없이 흡수됐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게 Ω 무기인 거 같은데, 이걸 파괴해 버리면, 갇혀 있는 루나 아가씨를 구출할 수 있으려나?
롤랑은 손에 든 산탄총을 들고, 눈앞에 있는 Ω 무기를 조준했다.
하지만 이게 루나 아가씨를 빨리 죽게 만들 수도 있어.
롤랑은 웃으면서, 손에 든 산탄총을 거뒀다. 롤랑은 루나를 여기서 구해낸다고 해도, 일시적인 연명일 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루나 아가씨의 시나리오는 오직 본인만이 다시 쓸 수 있죠. 달 위에서 조용히 죽는 것이 루나 아가씨의 결말이라면, 그것 또한 운명이겠죠.
하지만 전 루나 아가씨가 직접 아가씨의 결말을 바꾸고, 다시 한번 여정을 떠나길 바라요. 아가씨에게 선물을 전달해 주라고 부탁한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롤랑은 보호하고 있던 기억 장치를 조심스럽게 꺼내, 루나 앞에 있는 콘솔에 넣자, 장치 안에 있던 데이터가 루나의 의식의 바다와 연결됐다. 쿠로노의 기술은 대행자의 의식의 바다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정보 전송은 가능했다.
롤랑은 허리에 차고 있던 저장 용기에서 내용물이 계속 부딪히는 듯한 심한 진동을 느꼈다.
하마터면, 본·네거트 준 이걸 까먹을 뻔했네. 근데 루나 아가씨를 죽이는데, 이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했다고 티는 내야 하니깐. 어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달의 모든 것을 잠식해 봐.
롤랑이 저장 용기를 열자, 이합 생물이 안에서 튀어나왔고, Ω 무기에 연결된 에너지 공급 케이블을 향해 빠르게 기어간 뒤, 영점 에너지 특유의 푸른빛을 따라 벽의 갈라진 틈을 파고들었다.
관객 여러분, 카메오 롤랑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미소를 거둔 롤랑은 마지막으로 루나의 얼굴을 보며 속삭였다.
루나 아가씨, 미래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진정한 본인의 모습으로 변했기를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