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부 상무 회의에서도 카레니나가 보낸 뜻밖의 메시지를 받게 됐다. 하산 의장은 회의를 30분간 정회한다고 선포했고, 리스트는 이 짧은 30분 이내에, 이길 수 있는 이론을 새로 찾아야만 했다.
리스트는 카레니나의 녹음 메시지와 함께 전송된 사고 경위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내려놨다. 보고서에는 달 표면 기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퍼니싱 누출 사고가 발생해, 영점 에너지 엔진이 제어 불가 상태가 됐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기록돼 있었다.
카레니나가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게 둬서는 안 돼.
문가에 기댄 노르만은 미간을 찌푸렸고, 표정에서는 볼 수 없던 긴장이 서려 있었다.
당신은 저 정비 부대의 소녀가 한 말을 못 들으신 건가요? 저 이름도 어려운 엔진을 파괴하지 않으면, 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잖아요!
그냥 가능성일 뿐이야. 우린 그 정비 부대 대장의 말이 다 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어.
리스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팔짱을 꼈다.
카레니나는 달에서 그린스와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린스도 카레니나를 맘에 들어 했던 거 같아. 게다가, 카레니나는 그 대행자와 사적 교류를 한 적이 있어. 우리가 그린스의 권력을 뺏은 것 때문에, 벌이는 연극일지 누가 알겠어?
그리고 우리가 의회에 안건을 제출하려고 할 때, 퍼니싱이 폭발했잖아. 이게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노르만은 리스트의 말이 선동의 목적을 가지고, 조금은 주관적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리스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몇 년 동안, 달 표면 기지에서는 퍼니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영점 에너지 원자로를 가동할 때도, 퍼니싱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시에 카레니나가 직접 검사를 진행했었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달 표면 기지에서 심각한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퍼니싱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죠. 그럼...
그것도 추측일 뿐이고, 정신이 나간 캐논 박사만 살아남았었지. 퍼니싱의 누출과 관련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의 진실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 알고 있어.
자신보다 높은 권한을 가진 그린스가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도 모르지만, 과거의 일에 관심이 없어진 리스트는 개의치 않으려 했다.
그것과 상관없이, 제 여동생이 아직 달 기지에 있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단 말입니다.
착각하지 마.
리스트는 진지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노르만의 말을 끊었다.
네 여동생은 빅토리아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마. 테디베어는 더 이상 네 여동생이 아니야. 그리고 지금의 넌 곧 가문을 대표한다는 걸 명심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판단해.
리스트는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의회의 결정을 볼 수 없을 거 같으면, 이곳에 남아있어. 나 혼자 해결하지.
노르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차가운 벽을 향해 주먹을 뻗는 거밖에 없었다.
망할 놈.
정회가 끝나자, 의회 로비에는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도착했다. 방금 카레니나가 남긴 녹음과 보고서를 바탕으로, 대다수 사람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다.
한 번 둘러본 하산이 회의 진행자의 자리에 다시 선 뒤, 가볍게 기침하자, 장내의 떠들썩한 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게 논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부터 세계 정부의 정례 회의는 관련 회의 규칙에 따라, 비상 총회로 임시 전환되어, 달 표면 기지의 갑작스러운 위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토론해야 해.
우선 리스트 의원의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
하산은 리스트에게 고개를 끄덕여, 설명을 시작하라고 했다.
정비 부대의 카레니나 대장이 보낸 보고를 확인하면, 퍼니싱이 어떻게 생성됐고, 또 어떻게 영점 에너지 엔진에 영향을 줘서 폭주하게 됐는지, 우리 모두 알지 못합니다.
통신이 완전히 막혀버린 지금, 카레니나에게 더 이상 현장의 상황을 물어볼 수도 없으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만 가지고는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리스트의 말은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목적은 분명했다. 긴박한 사태에서 모두를 진정시켜, 이성적인 사람들이 공중 정원을 위해 어떤 게 가장 좋은 선택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의원님들께서 한 가지는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영점 에너지 엔진은 과거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완성한 것입니다. 이 영점 에너지 엔진이야말로, 우리를 희망 저편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미래에 닿을 수 있는데, 이대로 파괴할 것입니까?
우리가 과거의 모든 인간이 치렀던 희생을 짓밟아야 합니까?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희망을 빼앗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리스트의 질문으로, 자리에 있던 의원들은 인간 모두를 저울 위에 올려놓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서, 영점 에너지 엔진 파괴를 주장하던 의원들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 어떤 경우에도, 영점 에너지 엔진 파괴를 반대하며, 그것을 전제로 후속 토론을 진행해 주실 것을 제안합니다.
리스트는 하산과 니콜라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봤다. 원래부터 전쟁에 찬성했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영점 에너지 엔진 파괴를 주장할 것 같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선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조차 영점 에너지 엔진이 가져다주는 이익과 파괴를 비교했을 때, 인간이 감내해야 할 대가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리스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있었다.
미안하군. 잠시 실례하지. 내가 좀 늦었네. 아니지. "우리"가 늦었다고 해야 하나.
회의장으로 약간 늙어 보이지만, 여전히 패기가 넘치는 남자가 느릿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젊은 사람 2명이 바짝 붙어서 따라 들어왔다.
(그린스, 역시 쉽게 포기할 리 없지.)
리스트는 일찌감치 그린스가 와서 훼방을 놓을 것을 예상하고, 준비를 다 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미리 불러온 감사원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린스 님, 제 기억이 맞는다면, 당신은 지금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의 불법 감금 사건으로, 내부 조사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정부 회의에 참석하실 수 없습니다. 하산 의장님, 저는...
그린스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을 "감금"한 것에 대해, 부적절하다는 혐의로, 내부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린스는 자신이 공중 정원의 사람들에게 약점 잡힐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만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 단 하나의 예외 상황만이 있었는데, 그것은 리스트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사전에 준비한 계략뿐이었다.
미안하지만,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군. 난 회의에 참석할 생각이 없어. 회의에 참석해 본 적 없는 두 젊은이에게 길을 안내해 주려고 했을 뿐이야.
리스트는 그제야 그린스의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봤다. 그중 한 명은 블랙 램 소대 지휘관인 시몬이었고, 다른 한 명은 뜻밖에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이었다.
내가 지금은 세계 정부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신세고, 과거에도 참석한 적이 없어. 하지만, 군부의 수석 자문가로서, 추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린스는 하산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신뢰받는 젊은이들이 추천받아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바니까...
(망할 늙은 여우 같으니...)
그린스는 웃었다. 오늘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면, 하산에게 많은 의심을 받게 된다는 것을 그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원래 그린스는 이 추천장을 언젠가 사용하게 될 비장의 카드라고 여기면서,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판을 뒤집거나 아니면 모든 걸 잃거나, 둘 중의 하나였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에게 모든 걸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들을 이번 비상 총회에 참가하도록 추천한 이유는 최전선의 지휘관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현장 판단이라면, 이들이야말로 전문가라 할 수 있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은 여러 막중한 임무에 참여한 "영웅"이며, 이 지휘관의 의견이 모두에게 중요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이전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과 난 작은 오해가 있었지만, 우리가 서로 교류하면서, 강한 유대감을 쌓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어.
아~ 내가 말이 좀 많았던 것 같군. 그럼 난 너희들에게 맡기고 가보도록 하지.
회의 현장을 떠나기 전, 그린스는 모두에게 등을 보이게 돌아서서, 다시 한번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내가 실망하게 만들지 말게나.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수석님, 처음으로 이런 회의에 참석해 봅니다.
어지러워서 토할 것 같습니다.
침식체든, 그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같은 인간이든,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은 확실히 불편했다.
그럼, 바로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시몬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퍼니싱에 대항하는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할 두 군인을 어색한 전장에 서게 해 준 그 쿠로노 놈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몇 시간 전, 그린스라는 사람이 생명의 별에 있는 치료실에 쳐들어왔다. 히포크라테스 의사 말고는, 그 누구도 기세등등한 그린스를 막을 수 없었다.
니콜라 사령관이 특별히 조심하라고 말했었던 쿠로노 관리인 그린스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이, 네가 그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인가?
당신, 뭐 하는 사람입니까? 여기에 있는 사람은 전부 제 환자들입니다. 당신도 저기에 눕게 해줄까요?
좋습니다. 하지만 최대 15분입니다. 그리고 상처가 더 나빠져도, 전 책임 못 집니다.
의사가 떠난 후, 그린스는 달에서 카레니나가 한 일과 의회의 현재 상황을 말해줬다. 그의 말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었지만, 카레니나 및 루나와 관련된 정보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리틀 카레의 보고서에 따르면, 달 표면 기지의 사람들이 죽는 것뿐만 아니라, 엔진이 일으킨 중력파 때문에, 암석 덩어리가 지구와 충돌할 수도 있어. 그럼 한두 명이나 몇 십명만 죽는 문제가 아닐 테지.
리스트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이제 아무도 리틀 카레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그녀가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하고 돌아온다 해도,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겠지.
리스트라는 남자가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한 것을 두고 문제 삼게 된다면, 승인 없이 진행한 카레니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된다.
무엇보다 의회에 대한 불신이 군부와 의회에 대한 큰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제가 방금까지 회의 내용을 주의 깊게 봤는데, 그린스 님이 말한 것처럼, 현장의 여론이 거의 리스트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래서 방금 시몬이 "카레니나"라는 구조체를 아냐고 물어본 거였다. 사실 시몬도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군. 나에게 대항하기 위해 그들이 키운 "영웅"이 지금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니.
그린스는 그런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는 듯,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넌 거절하지 못할 거야. 너도 리틀 카레와 마찬가지니까, 넌 타인의 위기를 외면할 사람이 아니거든. 의회라는 전장에서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그린스는 분명 이득을 볼 수 없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궁지에 몰렸더라도, 모함당하지 않으려면, 그린스의 목적을 명확하게 알아야만 했다.
허허, 조심성이 많구먼~ 사실 난 카레니나가 거대한 Ω 무기를 완성하고 나면, 카레니나 쪽 사람들의 생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하지만 너에게 설명해 줬듯이, 난 루나라는 대행자가 인간의 미래 진화에 결정적인 키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 그래서 지금은 루나를 그 황량한 위성에 매장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돼.
아니, 내 직감이야.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계산보다는, 단순한 직감이 더 좋다는 것을 때때로 깨닫게 되지.
더 큰 이상을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이라고 생각해. 카레니나와 일행뿐만 아니라, 내 일생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답안을 찾아낼 거야.
하지만 넌 달라. 나보다 훨씬 욕심이 많거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넌 모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지.
처음에는 네 녀석이 언젠가 그 얼어 죽을 친절 때문에 죽을 거로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매번 내 생각처럼 되지 않더군.
그린스는 병상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달에 있을 때, 내가 리틀 카레에게 말했었지. 인간의 적은 승격자나 쿠로노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있어 영원한 적은 "나약함"이거든.
너와 내가 약하다면, 잠시 힘을 합쳐도 나쁠 것 같지 않은데?
승기를 잡을 수만 있다면, 모든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전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법칙이다. 그게 적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무조건 이용해야 했다.
그린스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맞은편에 경계하는 손을 꼭 잡았다.
이봐, "영웅". 저 사람들에게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 허울만이 아니고, 모든 걸 꿰뚫을 수 있는 칼도 있다는 걸 보여주라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얼마 전에 다쳐서 아직 회복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로 괜찮나?
몸에 난 상처의 통증 때문에, 시몬에게 기대지 않았더라면, 서 있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통증이 머리를 맑게 해줬다.
이렇게 된 이상,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게 먼저 발언권을 주는 게 어떻겠나? 리스트 의원?
리스트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발언권을 먼저 내주긴 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도 이번 돌발 상황에 대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시몬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린 뒤, 연단으로 조심히 걸어갔다.
연단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있는 상처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행히 두 손으로 연단을 잡고, 몸을 지탱시킬 수 있었다.
수석님!
재빨리 시몬에게 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만일 시몬이 부축한다면, 내 약점만 노출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스트의 늑대 같은 시선이 사냥감의 허약한 상태를 포착해 버렸다.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죠. 여기는 전장이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요.
침착한 척하는 위장을 꿰뚫어 본 리스트는 우리의 자신감을 철저히 무너뜨리려고 했다. 백전노장의 두 지휘관이지만, 리스트 눈에는 갓 전장에 투입된 신병처럼 보였다.
회의 경험이 전혀 없는 지휘관의 발언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일부 의원들이 리스트의 말을 듣고 짜증 내기 시작했다.
이전의 포석이나, 초반의 표현으로 우위를 가지고 있는 리스트였기에, 우리가 무엇을 해도 리스트의 이론을 흔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이 우리를 얕잡아보고 승산이 있다고 느끼게 되면, 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바로 그때, 우린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저 말인가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군요.
리스트가 외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모두에게 좀 더 명확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리스트가 신경 쓰는 게 아니야. 좀 더 생각해 보자.)
아무런 준비도 없고, 소속도 안 된 외부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상대방의 약한 곳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럼, 단칼에 죽이지 못하더라도, 내가 유리한 위치에서 혼전 양상으로 이끌어 갈 순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이전 데이터를 가지고, 달 표면 기지에서 영점 에너지 원자로 재가동이라는 연구 성과를 보여줬지만, 안전성 측면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 겁니까?"
"광활한 우주를 항행하게 됐을 때, 이번과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지구를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돼버립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영점 에너지 원자로의 가동은 이론과 실천의 검증을 이미 거쳤으며, 가동과 작동 과정에서 모두 진공실에서는 퍼니싱이 생성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네, 당시의 검사 결과는 카레니나가 마지막으로 분명히 확인했을 것입니다. 리스트 의원께서는 이전 회의에서 카레니나가 현재 영점 에너지 연구 영역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 계획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모든 실험 데이터는 아직도 유효하며, 이 의안을 제의한 근거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녀가 현장에서 내린 판단을 믿지 않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여기서 의미 없는 논쟁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들은 죽음과 재난을 막기 위해 힘들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리스트는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다음에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카레니나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점 에너지 엔진을 파괴해도, 이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으며, 오히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쪽 모두 위험한 상태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전 영점 에너지 엔진의 안전을 우선 확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달에 남겨진 사람들과 지상에 있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말입니까?"
"필요한 희생"입니다. 지금은 이 희망이 유일하며, 이것을 위해 희생하는 모든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희생 없이 살아갈 권리를 얻기에는, 지금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으로서, 신형 특화 기체의 사용자인 리브라는 소대 구조체를 잘 아실 겁니다.
리스트는 설득력 있어 보이기 위해,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면서, 모든 의원을 향해 주먹을 치켜올렸다.
리브는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고, 누군가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희생이 없었다면, 인간의 미래는 영원히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영점 에너지 엔진입니다!
희망을 붙잡기 위해선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누구도 리스트의 말에 의심하지 않았지만, 진정한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희망이란 게 이런 거였다면 리스트와 다를 게 없다. 반드시 다른 답을 찾을 수 있다.)
"진정한 희망이란 신형 특화 기체나, 영점 에너지 엔진 자체가 아닌,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렸던 보금자리를 되찾을 수 있으며, 쓰라린 실패는 우리의 경험으로 되풀이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미래일지라도, 함께 손잡는다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는 막강한 존재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남겨진 희망만 붙잡고 정체되어 사고 능력마저 포기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신형 특화 기체는 그런 인류들과 리브가 함께 창조한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래서 다시 제작할 수 있는 영점 에너지 엔진보다, 달 표면 기지에 있는 인류, 즉 희망을 창조할 수 있는 인류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회의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이 서로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가했던 모든 사람이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하산이 이쪽을 향해 신호를 보냈고, 의회 로비의 중앙으로 가더니, 모든 시민 대표와 마주했다.
토론은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네. 카레니나와 달 표면 기지에 발생한 상황에 대해, 의회는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해.
안건에 대한 최종 결론은 모든 인간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겠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모두 현재 인간들이 선택한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다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만의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 별빛이 로비에서 반짝였고, 마지막에 게슈탈트의 소리가 들렸다.
회의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