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아악!
바닥에 반쯤 누워 있던 아합은 권총을 들고 침식체를 향해 계속 사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험 거리 밖에서 겨우 쓰러트렸다.
하... 뭐, 뭐지? 내 사격 솜씨가 그나마 남아있네?
아합이 얼마 기뻐하지 못한 그때, 위에서 거센 강풍이 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거대한 쇳덩이가 그의 머리 위로 5cm도 안 되는 곳을 가로지르면서, 그의 등 뒤까지 온 침식체를 절단해 날려버렸다.
아합 아저씨, 어디 다친 데 없어? 의외로 용감하네~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옛날에는 군인이었거든요.
그러나 아합은 침식체의 습격보다 카레니나가 가지고 다니는 큰 해머가 더 위험해 보인다는 말은 꾹 참고 내뱉지 않았다.
이곳에는 혈청이 없어서, 아저씨가 침식되면 곤란해.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카레니나 머리 위의 역원 장치가 갑자기 세워졌다. 이것은 조기 경고로, 침식체의 공격을 미리 감지했다는 의미였다. 어느 침식체의 날카로운 발톱이 닿기도 전에 훨씬 더 무거운 해머 공격이 침식체를 날려버렸다.
특수 제작된 고감도 역원 장치가 유용하게 쓰이는 순간이었다. 원래는 영점 에너지 엔진 가동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극소량의 퍼니싱 농도를 탐지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대량의 침식체가 몰려오기 시작했고 정밀한 기계가 밀집한 실내에서 위치한 탓에 카레니나도 화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침식체의 수량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 곰! 돌! 이! 내 말 들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레니나의 통신 단말기는 각종 잡음이 계속 넘쳐났다. 이렇게 심각한 교란은 여태까지 발생한 적이 없었다.
들려! 들린다고! 이어폰 끼고 있는데, 네 목소리 때문에 귀먹을 뻔했잖아! 야? 왜 네가 있는 실험실 쪽에서 총소리가 나는 거야?
내 말 잘 들어. 이곳에 대량의 침식체가 나타났어! 이유 불명, 수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어. 그리고 기존 신형 특화 기체 연구에 사용하던 원체들도 침식돼서 침식체로 변해 버렸어.
너 아직 잠에서 덜 깬 거 아냐? 여긴 달이라고, 어떻게 퍼니싱이 이곳에 있을 수 있어?
내가 지금 그걸 어떻게 알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희들 당장 이쪽으로 이동해서 부상자 옮겨주고 침식체의 확산을 막아!
카레니나는 쓰러진 쿠로노 병사를 한쪽으로 걷어차서 침식체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게 한 후, 침식체를 실험실 벽 안으로 후려쳤다.
부상자가 생긴 거야? 혹시 이미 침식된 거야?
앗, 아직 거기까진 아니고! 지금 쿠로노 놈들도 보편적으로 경상만 입은 상태야.
카레니나는 쿠로노 병사들이 모두 자신에게 맞아서 쓰러졌다고 말하기 머쓱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분명히 나중에 이것저것 캐물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잠깐, 그럼 너는?
난 침식의 발원지를 조사하러 갈 거야. 갑자기 이렇게 큰 규모로 침식되는 게 우연일 리가 없어.
누구든 잘 알고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그 재앙이 생각났다.
설마 영점 에너지 원자로 때문일까? 하지만 우리가 원자로를 가동할 당시에는 분명히 진공실 안에서 퍼니싱이 생성되지 않았잖아.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두 가지다. 첫째, 재난의 근원은 영점 에너지 원자로와 무관하다. 둘째, 쿠로노가 검사 과정에서 조작했다.
아합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조사하겠다는 거야. 퍼니싱 침식을 일으킨 근원이 뭔지 밝혀야 해.
카레니나는 머리에 있는 역원 장치를 세워 공기 속의 퍼니싱 농도 흐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고농도 반응은 원자로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야, 너 혼자 가려는 거야? 우리 같이...
가뜩이나 잡음뿐이었던 통신이 뚝 끊기게 되자, 카레니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방금 일어난 아합에게 통신 단말기를 던졌다.
옆에서 다 들었지? 잠시 후 테디베어와 일행들이 도착하면, 너희들이 철수하는 걸 엄호해 줄 거야.
카레니나 님, 원자로의 내부를 조사하시려는 겁니까? 그럼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통신 단말기를 건네받은 아합은 답례하는 것처럼 카레니나에게 노르만 광업 회사의 로고가 인쇄된 카드를 던졌다.
명목상 주임이긴 해도 그에 따른 권한도 갖췄습니다. 그 카드를 챙겨가시면 유용할 겁니다.
그래도 되는 거야?
이 모든 것이 쿠로노의 음모였다면, 쿠로노의 인원으로서 아합이 협조해 주는 건 쿠로노를 배신하는 증거를 남기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긴박한 상황이니, 그것에 맞게 처리할 수밖에 없고,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카레니나 님, 당신밖에 없습니다.
카레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원자로의 깊숙한 곳을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