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고요한 밤, 누군가 저택 안방 문을 살살 두드렸다. 최대한 소리를 줄이고 두드린 걸 보면 안방에 있는 사람이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방 안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그런지, 흑발 소녀가 문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루시아?
어머니의 부름을 들은 여자아이는 들킬 줄 몰랐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어머니를 바라봤다.
엄마, 혹시 저 때문에 깨어나신 거예요?
루시아의 어머니는 웃으며, 루시아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렴. 워낙 살금살금 욺직여서 난 또 네가 몰래 간식 먹으러 온 줄 알았잖니.
루시아는 멋쩍게 웃으며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손에 그림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자기 전에 이야기 듣고 싶은 거야? 이리 오렴.
루시아는 "네!"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어머니의 품을 향해 달려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우리 루시아 부끄러워하는 거니?
루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임신해서 불룩해진 어머니의 배를 가리켰다.
아빠께서 저에게 알려주셨거든요.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가 아주 약하다고요. 다치게 할까 걱정돼서 다가가지 못하겠어요.
괜찮아. 아기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거야.
정말요?
루시아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건네줬다.
궁금해하면서 또 겁에 질려있는 루시아의 모습이 웃겼던 어머니는 루시아의 작은 손을 잡고 자기 배 위로 얹었다.
배 속의 미세한 태동이 어머니를 통해 루시아에게 전해졌다. 어린 루시아는 처음으로 생명의 존재를 실감했다.
엄마! 뭔가 움직여요! 움직이고 있어요!
어머니는 온화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들어 올리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또 달과 토끼의 이야기야? 아빠가 여러 번 들려주지 않았니?
하, 하지만 아기는 처음일 수도 있잖아요!
어머니는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생각에 빠졌다. 루시아도 얼마 전까지는 자신의 품에 안겼던 연약한 생명이었는데 지금의 루시아는 어느덧 자유자재로 뛰고 달릴 수 있을 만큼 자랐고,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인생을 펼치고 있다.
루시아는 이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만약 나중에 여동생이 태어나면, 달의 이름을 따서 동생 이름을"루나"라고 지어줄까?
달에게도 이름이 있나요?
아무렴 있고말고, 사람들은 항상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특별한 이름을 붙인단다. 루시아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어?
루나, 루나... 루시아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반복했다.
여동생이든 남동생이든, 그리고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앞으로 넌 언니 혹은 누나가 될 거야. 그러니 동생을 잘 지켜줬으면 해, 또 본보기가 돼서 좋은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는 바른 사람이 돼야 해.
루시아는 알 듯, 모를 듯했지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언니"라는 이름과 책임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루나,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언니가 꼭 널 지켜줄게.
네가 무엇으로 변하든 상관없어,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난 지휘관님 그리고 우리 그레이 레이븐과 함께 나아가 그 답을 찾을 거야... 그러니 루나야...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꿈을 꾼 것 같은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꿈을 꾸는 것마저도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보니 여전히 어두운 실험실에 갇혀있고 모든 기억들이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의 그녀는 달에 감금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는 동안, 루나는 많은 기술자에 둘러싸여, 각종 실험과 테스트를 당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오늘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봐.
루나가 잠에서 깨어난 걸 본 카레니나는 무심코 인사말 한 마디를 던진 뒤,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대형 Ω 무기의 에너지 공급 노드를 하나하나 검사한 후, 정비 부대가 특수 제작한 부품을 빼내고 공용 부품으로 교체했다.
루나의 시선을 의식한 카레니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작업 도구를 그녀에게 흔들었다.
난 이 부품들을 전부 통용 타입으로 바꿨어. 그러면 나중에 쿠로노 놈들이 Ω 무기의 원리는 몰라도, 적어도 어떻게 유지하고 수리하는지 알 수 있지. 하지만 구조의 강도와 Ω 무기에는 영향이 없으니,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흥.
그리고 가능한 한 Ω 무기의 제작 기술과 파라미터를 숨겨서, 쿠로노 놈들에게 누설되지 않도록 했어. 뭐 길게 갈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난 너희들이 확정된 협력 관계인 줄 알았는데, 역시 인간은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는군.
그 미치광이 놈들과의 협력은 한 번으로 충분해. 다시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거든.
카레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상의 전투는 일단락됐고, 내가 하던 일도 끝났으니, 난 내일이면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루나는 전혀 놀랍지 않다는 눈빛으로 카레니나를 쳐다봤다. 사실 방금 카레니나가 했던 말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가? 홀가분한 모습을 보니, 결국 인간은 이번 재난에서 살아남았나 보네.
그래. 실망하게 해서 미안. 우린 네게서 얻은 자료로 신형 특화 기체를 제시간에 만들어 냈어. 그리고 리브가 이 위기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됐고, 지상의 사람들을 구해냈지.
카레니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슬아슬한 승리였어...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이합 생물 때문에 죽어가고 있고, 더 많은 삶의 터전들이 적조에 잠식당하고 있어.
하지만 어찌 됐든, 우린 적어도 최후 반격의 불씨를 지켰어. 우리가 창조한... 과학이 창조한 힘이 모두를 구했어.
집행 부대 전체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적어도 목숨은 건졌으니... 그중 부상이 제일 심한 소대가 그레이 레이븐 소대야.
그레이 레이븐 소대.
공중 정원의 그레이 레이븐 소대, 또 다른 언니인 루시아가 거기에 소속돼 있다. 그리고 전에 자신을 취서체에게서 구해준 그 지휘관도 그 소대였다.
언니는 살아서 많은 사람을 구했구나.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나였지만, 인간이 거듭해서 보여준 강인함은 루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그 많은 절망을 지켜봤음에도, 언니는 여전히 희망을 붙잡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당연한 거 아니야?
카레니나는 마지막 부품을 정리한 뒤, 두 손을 쭉 뻗었다.
루시아가 얼마나 강한지는 상대해 본 내가 가장 잘 알아. 믿음을 주는 사람만 있다면, 루시아는 어떤 운명과도 맞서 싸울 수 있어.
난 루시아가 존경스러워. 그러면서도 그녀보다 강해지고 싶고 그녀를 이기고 싶어. 과거의 난 무리겠지만 인류와 퍼니싱에 맞서 싸우는 것처럼, 나, 그리고 우리는 절대 계속 실패만 반복하지는 않을 거야.
근거 없는 자신감, 이유 없는 판단, 과거의 루나였다면 승격 네트워크에서 수많은 결론을 쉽게 도출해서 카레니나의 환상을 깨뜨렸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갈등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방향도, 신념도, 미래도 없지만...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루나라는 여자아이가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다면, 루시아는 여동생 루나를 지키려다 다치게 되는 "언니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루시아에게도 다른 미래가 주어졌을 것이다.
카레니나는 루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담담하게 말했다.
공중 정원이든 쿠로노든, 대행자 관련 자료는 극비거든. 아마 너의 존재는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거고, 달 표면 기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을 거야. 물론 루시아도 포함이고.
그래... "루나"라는 이름은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할 필요 없어.
루나는 최고의 소식이라도 들은 듯, 무심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영영 못 만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안녕.
안녕...
카레니나가 떠난 뒤, 연구실은 다시 적막해졌고 루나는 눈을 감았다. 대행자의 무한한 시간은 오직 꿈나라에서만 더 빨리 흐르는 것 같았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