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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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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두 번의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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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증기기관으로 제1차 산업혁명의 막이 열렸다.

그리고 라스트리스는 아틀란티스의 영점 원자로가 다음 산업혁명의 시작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 뒤로 맨체스터의 침대는 영원히 차가워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출근을 하고나면 방금 전까지 일을 하던 노동자들이 돌아와 잠을 자기 시작했으니까.

아틀란티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조명은 꺼지지 않는 불처럼 켜져있었고 기계도 쉼없이 작동하고 있었으며 연구원들은 마치 로봇처럼 실험실과 숙소 사이를 오고갔다.

라스트리스, 연구 팀장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첫 날부터 3분이나 지각하셨습니다.

내부 네트워크에 탑재된 AI 인식 시스템이 아주 느려. 문 밖에서 10분이나 기다렸어. 후방 지원부 사람들을 교육해야 하지 않을까?

해상 기지는 금속과 피와 살로 이루어진 대뇌였고 기지에 설치된 설비 하나하나는 대뇌를 누비는 세포였으며 케이블은 혈관, 광섬유는 신경, 서버는 그것의 해마와도 같았다. 그리고 쉼없이 흐르는 데이터와 코드는 이 기지의 사상과 마찬가지였다.

기지는 대서양의 깊은 곳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인간은 기지가 작업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당분이나 아미노산 같은 영양소에 불과했다.

인간들은 위기에 빠졌지만 실험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아틀란티스에게 영점 원자로는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였다.

연구 추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육지로 송환되었고 남은 여생동안 정보 관리 규정에 따라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야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그들의 빈 자리를 대체할 사람들이 바로 기지에 도착했다.

기지를 떠난 사람들 중 라스트리스가 다시 살아서 만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이것은 잔인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진대사와도 같은 흐름이었다.

회의실로 들어온 라스트리스는 어제까지만 해도 앉아있던 익숙한 직원들 중 몇몇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얼굴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이 도시를 유지하는 톱니바퀴일 뿐이었다.

지금부터 아침 조회를 시작하겠다. 각 부서들 모두 도착했나?

모두들 고개를 들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것이 밝은 미래로 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복도 양쪽에는 불 꺼진 실험실들이 줄지어 있었다.

누런 화이트보드 위에는 오래 전 적은 수식이 남아 있다. 잔뜩 말라버린 잉크는 손에 닿기만 해도 먼지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텅 빈 사무실은 이곳을 떠난 연구원들이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 일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책상과 바닥에 두텁게 쌓인 먼지들이 이곳이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환풍구에서는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데이터 센터의 서버는 마치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는 관심 없다는 듯 기하학적 모양의 나무의 형태로 매끄러운 바닥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비상등 시스템만이 낮은 출력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복도 위의 각 교차로에는 철수 노선을 가리키는 어두운 노란색 화살표가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바닥에는 사람들의 남긴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시는 마치 로마의 폼페이 성처럼 하루 아침에 증발된 듯했다.

이상해.

또 다른 방을 수색하던 베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복도에도 방에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 설치된 거대하고 복잡한 케이블들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부서진 조각도 폐허도 시체도 없었다.

베라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이상하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확실히 여긴 너무 깨끗해.

칠흑같은 복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난 베라와 걸어왔던 통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 뒤로 길다란 발자국이 남겨졌다. 마치 흑갈색의 설원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자국이 아주 균일하게 찍혀있다는 건 바닥에 쌓인 먼지의 두께가 균일하다는 것……

그것은 그날 이후로 그 누구도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외부인의 방문이 없었기에 먼지가 차곡차곡 쌓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아, 드디어 네가 좀 다르게 보이네.

적어도 긴급 전력과 회로는 완전한 상태임을 의미했다.

어쩌면 다른 설비들도 완벽한 상태일 가능성이 컸다.

……이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깨끗하다란 진정한 의미의 깨끗이 아니었다. 이 도시에 퍼니싱의 침식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침식체가 이곳을 들이닥쳤다면 설비가 이렇게 완전하게 남아있을 리도 없을 테고 먼지도 이렇게 두텁게 쌓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래. 맞아. 이곳에는 "인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

베라가 콕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베라가 말하는건 "인간"의 시체를 가리킨다는 걸.

여기서 지내던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걸까?

한계에 부딪히기 전에 도망친 건가?

베라가 중얼거렸다.

퍼니싱 재앙이 폭발한 뒤로 이곳은 물자 보급을 받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베라는 깊은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퍼니싱이 폭발한 뒤로 그 어떤 물자 보급도 받지 못했겠지.

이 도시는 다자인될 때부터 자급자족 기능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어. 식량이 떨어졌다면 당연히 도망쳤겠지.

베라는 또다시 잠깐 침묵했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해석은 아니야…… 정말 이 도시에서 도망쳤다면 이 섬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지 않았을 리가 없어.

베라가 침묵하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도시는 디자인될 때부터 자급자족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 도시에 생존한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음식을 모두 소진해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진실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잔인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지만 이는 얼마가지 않았다. 베라가 갑자기 창을 뽑아 복도 한쪽에 있는 실험실의 대문을 부숴버렸기 때문이었다.

뭘 알면서 물어? 일부러 더 시끄럽게 움직이는 거잖아.

이렇게 방대한 과학 도시를 지원하려면 로봇과 드론이 꼭 필요했을 텐데.

이 도시가 퍼니싱 폭발에 휘말렸다면 섬에 침식체 하나 없는게 말이 안 돼.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가 마주친 침식체들은 바닷물을 따라 흘러들어온 "외래종"이었어.

그건 우리가 지금 도시 외각에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도시 안으로 들어왔지만 인간의 시체는 물론이고 교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어. 물론 침식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어두운 곳에 숨어있는 거라면 이제 모습을 드러날 때가 되었다고 알려줘야겠지.

그건 너희 지휘관들 생각이고.

난 달라.

솔직하게 말해 봐. 기지를 들어온 뒤로 어떤 느낌이 들어?

그거 알아? 인간은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걸?

좋아. 성실함은 전사의 미덕이고 공포는 전사의 목숨줄이지.

무섭다고 했지? 그럼 왜 무서운 건지 생각해 본 적 있어?

가장 강렬한 공포는 미지에서 오는 거야. 적군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미지의 공포 또한 사라지겠지.

난 거미줄에 걸려 천천히 죽을 바에야 거미줄을 물어뜯을 거야. 거미줄 중심에 있는 거미가 먼저 나에게 다가오도록 말이지.

잘 모르겠다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네 의견을 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베라가 인기척을 내고 나와 한동안 대화까지 나누었지만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비상등의 붉은빛 아래에서 사무실 대문의 조각은 마치 굳은 상처처럼 보였다.

쯧.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옆방을 둘러보더니 사무실 정문을 박살냈다.

사무실의 책상과 의자는 물론 책상 위의 파일과 문건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 위의 모니터 옆에 놓인 커피잔은 아직도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듯했다.

컵 안에도 액체가 보이지 않아.

냉장고에 간식 캐비닛도 전부 비어있어.

식량이 전부 사라졌어.

모든 증거들은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도시는 퍼니싱 재앙이 폭발한 뒤에도 퍼니싱에 침식되지 않고 한동안 질서를 유지하며 작동되었을 것으로 추측됐다.

가지고 있는 모든 식량을 챙겨서 도망친 건가? 그렇다면…… 이 섬에서 지내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갈만한 곳은 어디였을까?

그녀가 이 도시에 진입한 뒤로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우리는 사무실 깊은 곳 커다란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놓인 명패에 주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연구 팀장: 라스트리스.

정말 이상한 이름이네.

이곳의 연구 팀장이라면 사무용 책상 위에 쓸모있는 정보가 있지 않겠어?

베라도 책상 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버튼 하나가 내 손에 닿았고 사무용 책상 위 투영에 불이 들어왔다.

투영 스크린은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상태라 화질도 소리도 아주 흐릿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여성임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여자가 바로 이 책상의 주인——라스트리스겠지.

육지의 정기 통신이 두 번이나 중단됐다. 통신부장은 기밀 가이드 라인을 위반해서라도 먼저 육지와 연락을 취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서 허가했다.

하지만 육지의 직원들은 여전히 응답이 없었고 이에 통신 부장은 외부의 뉴스를 들을 수 있게 정보 수신 주파수 구역을 확대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정보 관리 규정상 절대 허락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역시 허가했다.

그나마 빨리 결단을 내려서 다행이었다. 아직 작동이 가능한 채널에서는 똑같은 경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퍼니싱이었다.

경고 파일에 따르면 퍼니싱은 1호 영점 원자로에서 나타난 신종 재앙으로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고 했다.

묵묵부답인 채널의 다른 한쪽에 연결된 통신 설비는 아마 이미 퍼니싱에 침식되었을 것이다.

퍼니싱 대폭발 기간 동안 아틀란티스는 잠행 상태에 있어 바로 소식을 입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퍼니싱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피드백 상황에 따라 최고 경계 단계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믿을만한 정보로 초기 판단할 결과 우리는 퍼니싱이 바로 인체를 침식하거나, 로봇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기지도 아주 위험하다.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아틀란티스가 퍼니싱에 침식되지 않도록 막는 거다.

후방 지원 부장의 보고에 따르면 육지에서 곧 보급선이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얼마 후 그 배가 수평선 위에 나타났을 때 우린 바로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응답한 방식은 전자파가 아닌 구시대에나 사용하던 신호탄이었다.

난 그 신호가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 후방 지원 부장이 말해주었다. 그것은 구조 신호라고 말이다.

난 그 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함선에 퍼니싱이 퍼졌을 수도 있었다. 난 그 아틀란티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어떤 리스크도 떠안고 싶지 않았다.

기지 외각에는 심해 원자로 상황을 감시하는 잠수정이 네 대 설치되어 있었다. 난 그들에게 자폭을 명령했다. 그 중 두 대는 명령에 복종했지만 남은 두 대는 항구에 정박하려 했고 기지의 공격에 의해 결국 격침됐다.

리스크들을 처리한 뒤 난 부장들의 보고를 듣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오늘 회의에서 결정하려는 의제는 아주 간단하다: 아틀란티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곧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지만 구체적인 조치를 의논함에 있어서는 작은 분쟁이 있었다.

부장들 중 한 명은 인근 지역에 안내방송을 틀어 난민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난 바로 이 의견을 부결했다. 아틀란티스의 좌표는 절대 유출될 수 없다. 이곳은 피난처가 아니다. 게다가 난민들 중 퍼니싱에 침식된 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지금 당장 육지로 돌아가 인류 문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역시 부결했다. 거대한 산불 앞에서 이슬 몇 개가 더 늘어난다 해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기지에 있는 연구원들은 재난 구조가 아니라 연구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난 다시 내 입장을 밝혔다. 퍼니싱 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아틀란티스 기지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처음부터 내 답은 명확했다. 우리는 영점 원자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난 동료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첫째, 기지와 우리는 원자로를 위해 존재한다. 둘째, 본 기지는 인류 문명을 구원할 힘이 없다. 셋째, 이곳은 아마 퍼니싱 재앙의 기원에 대해 조사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일 것이다.

난 인간이 계속 살아남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틀란티스를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

난 기지의 연구 방향을 조정했다. 가급적 1호 원자로의 환경을 재현해 퍼니싱의 출처에 대해 조사하기로 한 것이다. 이 기지가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각 원자로 실험센터에서는 정기적으로 진행도에 대해 교류한다. 지금 내가 입수한 건 두 달 전에 받은 1호 원자로 칩의 상태 보고서뿐 그 뒤로 그곳에서 무슨 연구가 이어졌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두달 동안 별다른 성과가 없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원래대로라면 일기를 쓰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행위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일기를 쓰는 습관도 없었고.

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나 스스로 되묻기 위해서다. 내가 정말 정확한 일을 하는 걸까?

두 번이나 물었지만 내 답은 동일했다. 내 이성과 정신상태는 여전히 명석했고 모든 추리는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때면 동전을 던져라. 한 번 더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아주 오래 전 들은 말이다.

지금까지 난 무언가를 결정함에 있어 단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었다.

나로 하여금 동전으로 두번 던지는 상황을 만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 한다. 앞으로 매일 이 일기를 보며 내가 내린 선택이 정확한 것인지 반복해서 확인할 것이다.

영상 재생이 끝나고 투영이 사라졌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지고 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또 뭐라고. 결국 가장 멍청한 길을 선택했네.

1호 영점 원자로의 상태를 재현하려 하다니. 다들 미쳤어.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당장 멈췄어야지.

그렇게 당해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인간이 역사를 통해 깨우친 유일한 교훈은 바로 인간은 그 어떤 교훈도 배울 수 없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역시 정확했어.

베라는 이곳의 연구원들을 비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서 자조적인 어투가 느겨졌다.

응? 하긴. 넌 의장을 따르는 착한 양이니까. 여기서 무슨 일을 겪어도 의장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맞지?

왜? 내 말이 틀렸어?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너와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취서체를 처치한 공신이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적조도 네 덕분에 사라졌다면서? 하지만 그 누구도 널 영웅 대접을 해주지 않아. 다들 널 질투하고 의심하고 이용하고 널 빼앗으려 해.

그래서 난 네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거야. 여기까지 온 이상 의회의 "이면"에 대해 알게 되었을 텐데 왜 그들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려는 거지?

그럼 지금 네가 하는 게 뭔데?

똑같은 질문을 되묻는다? 이상한 곳에서 똑똑하네?

하지만 그런 건 나한테 통하지 않아. 알잖아? 난 별로 "깨끗한" 사람이 아닌 걸.

……

하지만 넌 결국 그들을 선택했지.

…………

………………

베라가 배를 끌어안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달리 진심으로 웃겨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하하하하.

어떻게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풉……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똑같은 질문을 너 스스로에게 해보지 그래?

난 인류를 선택했어——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은 역시 재밌어.

베라는 드디어 웃음을 그쳤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아주 좋아. 그 말 기억할게. 앞으로 수많은 "이면"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도 오늘처럼 그렇게 말하길 바랄게.

좀 더 확실히 설명해줘야 내가 왜 널 멍청하다고 하는지 이해할 것 같은 눈치네.

예를 들어보자. 어두운 곳에서 횃불을 켰어. 그런데 바닥을 보니 길다란 도화선이 보여. 도화선의 끝은 어둠속에 묻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바로 불을 꺼야 하는거 아니야?

난 다시 묻지 않았다.

같은 수작이 두 번이나 먹힐 것 같아?

……

흥, 그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