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으로는 끝도 없겠어.
또다시 밀려드는 침식체를 전부 처치했지만 너무 빈번하게 지속되는 전투로 인해 베라의 기체는 과열화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베라는 바로 내 뜻을 알아차리고 날 번쩍 들어 어깨에 들춰업은 뒤 큰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침식체가 빌딩 밖에서 지나갔지만 두 사람의 신호를 감지하지는 못한 눈치였다.
내 예상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건물은 전부 레이더 흡수 코팅으로 뒤덮여 있었고 아주 독특한 재료를 사용해 대부분의 감지 신호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로봇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이다.
위기에서 벗어나자 베라도 긴장이 풀렸는지 벽에 기대더니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팔목에 생긴 상처에서 순환액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날 지키기 위해 생긴 상처였다.
내 생사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는 너무 오래 걸어서 피곤한 걸 제외하고 외상은 하나도 입지 않았다. 그렇게 베라는 여기까지 오면서 날 훌륭하게 지켜냈다.
닥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과는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기만족일 뿐이야.
지금 내가 "괜찮아" 보여?
조용히 해. 기체 좀 냉각시키게.
벽에 기댄 베라의 생체공학 피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베라가 날 노려보았다.
또다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같은 개소리를 한다면 바로 바닷속에 던져버릴 테니까 각오해.
난 한참동안 침묵했다.
기체의 온도가 조금 내려가자 베라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외상"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구조체는 인간과 달리 웬만한 충격에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
필요 없어. 방해하지 말고 꺼져.
하, 내가 전에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넌 상상도 못 할 걸?
하지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베라는 빠르게 상처를 "지혈"했다. 그녀의 손놀림은 결코 리브에게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고 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라는 자신의 컨디션을 완벽하게 조절했다.
……그 뻔뻔함으로 수석 지휘관이 된 건가?
날 바라보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멍청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의회도…… 쿠로노도 그리고 이번 작전도 전부 다 바보 같아.
서로 어리석게 자신의 목표만 우선시하고 있어. 생사가 걸린 순간에도 내전을 멈추지 않잖아.
너한테 이런 걸 말해주는 나도 어리석지만.
베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는 넌 정말 이번 작전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언젠가 네가 의회와 쿠로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면 그들이 너에게 내리는 명령의 이면에 무슨 의도가 숨어있는지 알게 될 거야.
쿠로노는 승격자를 찾기 위해 널 가두려하고, 의회는 인류의 운명을 위해 널 희생시키려 하고 있어.
그들은 앞다투어 너를 빼앗으려 하고 있어. 너의 이용 가치를 송두리째 훔치려 말이야.
한쪽은 노골적으로, 한쪽은 대의라는 깨끗한 모습으로 말이야.
베라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화가 나지. 이 모든 상황이 화 나고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걸 수행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나.
그레이 레이븐에서의 경험이 부족한 건가? 아니면 그냥 네가 너무 순진한 거야?
퍼니싱이 영점 원자로의 진공 장치에서 폭발했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야. 그렇게 당해놓고 아직도 포기를 못하는 거지.
웃기네. 우리더러 이런 곳을 조사하라니. 현대 문명이 왜 멸망했는데? 그걸 다 아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곳에 미련을 가져? 영점 원자로의 참극을 다시 재현하고 싶은 건가?
베라가 눈을 감았다.
병상 위에서 신음을 흘리는 병사들, 내 앞에서 하나둘씩 죽어가던 동료들…… 과거의 슬픈 기억들이 물 흐르듯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났다.
난 의회가 쿠로노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곳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려고 하는 고고한 멍청이들이었다니.
상대와 싸우기 위해 다시 이 위험한 곳을 노린다라.
"내 생각"이 아니라 기정사실이야.
이곳이 모든 비극을 만들었어. 내 말을 반박할 수 있어?
베라의 말에 난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확실히 사실이었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의 야망에 의해 자멸했다. 이 도시가 바로 그 야망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