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15 절해성화 / Story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난 여유롭게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고 그 어떤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가속으로 인해 체중의 몇 배에 달하는 중력이 가슴을 꽉 눌러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가슴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속도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뭐라도 들어있었다면 전부 토해냈을 것이다.

베라는 훌륭한 전사였지만 결코 훌륭한 조종사는 아니었다.

구조체는 거의 가속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창백하게 일그러진 내 얼굴을 힐끗 보았고 의외로 비웃지 않았다. 그저 혀를 찬 뒤 스틱을 당겨 좀 더 평탄한 각도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레이더 스크린에서는 여전히 추격자들을 의미하는 점들이 반짝이고 있었으며 전자 스크린의 마하 수치는 "똑딱똑딱" 소리와 함께 상승되고 있었다.

이렇게 질문을 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워낙 무기력해서 입술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레이더 스크린 속에 추격자들을 의미하는 점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쿠로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추격을 포기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현재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베라의 아름다운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인과 달리 그녀는 단 한 번도 날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우리 멤버들과 충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의지할 데 하나 없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베라는 내 옆에 무릎을 끓고 손에 링거팩을 들고 있었다. 링거팩과 연결된 다른 한쪽 튜브는 내 손등에 꽂힌 바늘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슴이 차가운 기운이 느껴져 고개를 살짝 숙이니 베라가 다른 한쪽 손을 내 가슴 위에 얹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쓰러진 동안 내 몸을 점검해 본 모양이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붉은 머리 여인은 손을 살짝 들어 가슴 중간의 갈비뼈를 따라 내려가더니 그중 하나를 힘껏 누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쑤시는 아픔에 경련이 일어났고 난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영양액이 담긴 링거팩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방금 전에 꽂은 게 아닌 거 같았다.

주사침을 뽑고 흘러나온 피를 처리한 뒤, 다시 몸을 일으켜보니 전보다 훨씬 기운이 넘쳤다.

비행선은 조종사가 필요 없는 자동 순항 모드로 운행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엔진의 울림이 왠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레이더 스크린에는 더 이상 반짝이는 점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베라가 추격자 따돌리기에 성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조종석에 기댄 채 말없이 장도를 닦고 있었다.

총 사령관의 긴급 명령이야. 널 구조한 뒤 지정된 좌표로 이동하라더군.

왜 그런 눈빛으로 봐? 내가 널 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거야? 아니면 내 응급처치 수준을 신뢰하지 않는 거야?

걱정 마. 몰래 네 몸에 폭탄 같은 거 안 숨겼으니까. 물론 그랬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지.

어쨌든 내가 생명의 은인이잖아? 이럴 때 더 중요한 걸 답례로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베라였다. 그녀는 먼저 장도의 칼등으로 내 목을 겨누었고 이어서 내 턱을 살짝 들었다.

인간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무기지만 그녀가 들고 있으니 왠지 타인을 도발하거나 장난칠 때 쓰는 고양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이 진심인지 아니면 단순히 장난인 건지 일시적으로 헷갈렸다.

그래, 순진하게 나한테 기대 같은 건 하지 마.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답을 듣지 않아도 21호와 녹티스가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멤버들은 네 멤버들처럼 연약하지 않아.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

내가 그레이 레이븐을 염려하듯이 베라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멤버들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커다란 현창 밖으로 회색 하늘, 회색 구름 그리고 회색 바다가 보였다.

보이는 모든 것이 무기질의 차가운 색깔로 가득 채워졌다.

물과 하늘이 똑같은 색깔로 어우러지는 단조로운 세상 속에서 "살아있는 생물"이 존재하는 곳이라곤 이 수송기뿐이었다. 그것은 하늘을 가르며 지평선을 향해 날아갔다.

두 번째, 세 번째 가시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건 마치 일출을 바라보는 듯했다. 비범하고 무한한 힘을 가진 무언가가 지평선 아래에서 솟구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떠오른 건 자연계의 것이 아닌 신의 기적에 필적할 정도의 완벽한 인간의 조형물이었다.

지평선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높아지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베른의 로봇섬이 실존한다 해도 바다 위에 세운 이 성을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곳을 처음 본 그 순간의 충격은 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서양 탐험가들이 중앙아메리카의 밀림을 넘어 마야인들이 세운 피라미드를 봤을 때 지금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섬에 깃든 존재들을 깨우게 될까 두려워 두 번째 탄식이 나오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숨을 참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대체 무슨 레이더 차단 코팅층을 사용한 걸까? 이렇게 거대한 해상 도시가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 옆에 서 있던 베라는 처음에는 잠깐 놀랐지만,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조종석 앞 전자 스크린을 터치하며 이것저것 조종하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차가운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한눈에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비행기의 자동 순항 시스템에 새로운 목적지를 입력했지만 시간 끌기에 불과해. 비행기를 찾으면 바로 비행 노선부터 확인할 거야. 우리의 목적지가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이지.

그러니까 멍청한 얼굴로 서 있지 말고 낙하산이나 가지고 와.

그렇다. 단 하나뿐이었다.

베라는 낙하 문외한 대하듯 안전벨트로 나를 자신의 앞에 단단히 묶은 뒤 함께 낙하했다.

베라는 양쪽에 있는 로프를 조종하며 비행장에 정확히 착륙했다.

수송기에서 바라보았을 때 날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이 도시는 고도가 낮아지면서 그 윤곽을 더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보루, 피라미드, 도시, 산맥의 결합과도 같았지만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웅장했다.

현존하고 있는 사물 중 이 도시가 주는 장엄함과 신비로움에 필적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도시는 마치 인간이 과학기술과 공업으로 재창조한 환상이자 재현된 전설과도 같았다.

대서양의 아틀란티스였다.

하지만 마치 전설 속 사라진 바다 도시처럼 이곳은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유적지"였다. 음파, 불빛, 전자파, 방사능, 열에너지 신호... 기지에서는 그 어떤 활동 신호도 감지되지 않았다.

머나먼 동쪽에서 회색 먹구름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구름은 뜨거운 햇빛을 가렸고 바다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머릿속에 갑자기 더 적절한 비유가 떠올랐다.

묘비.

그것은 해상의 "묘비"였다.

베라는 착륙하자마자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고, 낙하산의 로프를 허리에 묶은 뒤 적색 표식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 플로트 체임버는 세계 정부 표식이 그려진 보급 상자였다. 전에 지상에서 장기 작전을 수행할 때도 공중 정원은 이런 상자에 보급품을 넣어 투하했었던 터라 그 표식이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전에 봤던 것과 한 가지 다른 곳이 있었다. 이 보급 상자는 세계 정부 표식 아래에 레이저로 새겨진 알파벳들이 있었다.

FLARE.

이게 무슨 뜻일까?

베라는 보급 상자의 인증 스크린을 열어 한참을 뚝딱대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날 돌아보았다.

이리 와. 지금 이 상자를 오픈할 수 있는 권한은 당신에게만 있거든.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보급 상자의 중간에 갑자기 균열이 생겼고 상자 커버가 양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베라와 똑같게 생긴 기체가 두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조용히 누워있는 "그것"은 마치 칼집에 숨은 날카로운 칼날 같기도 했고 또 멈춘 시간 속 한 송이의 장미와도 같았다. 다만 장미의 꽃잎에는 핏자국이 낭자했다.

아무도 조종하지 않는 기체는 무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부족한 인간성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더 치명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항상 까칠하던 그녀도 지금만큼은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리움이 비치고 있었다.

다만 별로 아름답지는 않은 기억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어깨를 더 무겁게 만들어주었다.

베라가 고개를 숙이는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적색 머리카락도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고 누워있던 기체의 적색 머리카락과 하나로 어우러졌다.

그리고...

난 네가 쳐다봐도 아무렇지 않은데 말이야.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에게 이런 "취향"이 있을 줄은 몰랐네. 평소에도 멤버들이 기체를 교체하는 걸 뚫어져라 쳐다보는 편인가?

기체 교체를 완료한 베라가 원래 착용했던 기체를 안은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나름 기괴한 장면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색다른 아름다움이 보였다.

베라는 낡은 기체를 보급 상자에 넣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당연히 아니지. 신규 기체였다면 어떻게 바로 적응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것은 실시간 통신이 아닌 미리 녹화해 둔 영상이었다.

투영 속 니콜라의 "시선"이 마침 베라에게 꽂혔다. 마치 이 영상을 녹화할 때 내 곁에 베라가 서 있을 거라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베라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니콜라 대신 하산의 홀로그램 이미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투영 속의 하산이 말을 거는 "상대"는 베라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player name], 무사해서 다행이야.

시간만 된다면 지금까지 자네가 겪은 일들 뒤에 숨은 진실에 대해 전부 설명해 주고 싶군.

하지만 나도 자네에게도 시간이 없어. 쿠로노 측에서 자네를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자네도 느꼈을 거야.

심지어 그들은 우리와 협의 달성 후, 바로 면전에서 말을 바꾸고 자네를 빼돌리려 했네.

애초에 대행자 수색 임무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 어차피 저쪽에선 결과와 상관없이 자네를 묶어둘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우리도 예상했지. 두 세력 사이의 이권다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해 미안하군. 그때는 그런 시기가 아니었네. 너무 많은 걸 알면 괜한 고민만 늘어나는 법이지.

게다가 이번 일로 자네도 무언가를 느꼈을 거야……

역시, 다음 순간 하산은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자네와 케르베로스 소대의 리더는 지금 대서양 위의 모 해상 도시에 착륙했어.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해독한 좌표가 정확하길 바라고 보급 상자를 정확한 포인트에 투하되었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네.

주위의 환경이 내가 설명한 것과 일치하다면 주위를 확인해보게.

[player name], 자네는 지금 인류가 황금시대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위에 서 있는 거야.

아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곳은 찬란한 시간의 종점이자 어두운 퍼니싱 시대의 시작이기도 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마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