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15 절해성화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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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강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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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베로스의 임무가 중단되고 2시간 후의 지구.

개과 동물은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일단 개체가 집단을 벗어나면 생존능력과 전투능력이 대폭 하락하기 때문이다.

쿠로노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이 아닌 정말로 개 세마리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소란을 일으킬까 무서워인지 아니면 말을 맞출까 걱정되어서인지 쿠로노는 현장을 봉쇄한 후 케르베로스의 세 사람을 각각 격리시킨 뒤 따로 심문하기 시작했다.

베라는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상대가 아무리 물어도 그녀의 대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말했잖아. 갑자기 달려들어서 사람을 물어뜯는 그 정신분열증 환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그 자식은 스스로를 "부두"라고 부르더군. 뭐 본·네거트라는 자식한테 선물을 줘야 한다나? 먼저 롤랑이라는 승격자를 공격하더니 바로 우리를 기습했어.

이게 전부야. 몇 번을 묻는다 해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정도 뿐이야…… 왜? 그 미친 여자의 움직임을 분석해 주길 바라는 거야? 퍼니싱이 그 자식의 대뇌 회로를 어떻게 바꿔놨을지 내가 알 게 뭐야?

임무 기록에 따르면 너희들은 임무가 시작된 뒤로 잠깐 동안 원격 연결을 끊어버렸어.

그 뒤로 너희들의 행동은 예정과 달라지기 시작했지.

하.

베라는 차갑게 웃었다.

예정된 계획? 그게 뭔데? 우리가 받은 임무는 루나로 의심되는 의식의 바다 활동 신호에 대해 조사하고 루나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어.

처음부터 행동 방식을 정해놓고선 어떻게 "수색"이 가능하지?

여기까지 말한 베라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케르베로스는 총사령관의 명령대로 잠깐 너희와 협력하는 거야. 그것도 이번 임무가 끝나기 전까지만이지.

그런데 너희들이 먼저 임무를 강제 중지시켰지. 임무가 종료된 이상 규정대로 너희들의 명령에 따를 이유도 없어. 이딴 곳에서 심문받을 의무는 더더욱 없고.

확실히 해두지. 지금 내가 여기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어주는 건 우리가 "착하기" 때문이지 결코 너희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야. 난 너희들 같은 족속들을 잘 알아. 연약한 토끼같은 자식들을 겁 주는 방식은 우리한테 통하지 않아. 알겠어?

그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협감에 쿠로노의 병사들은 일제히 제식총을 들었다.

적발의 구조체는 오만한 자태로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마치 가시를 가진 붉은 장미와도 같았다. 딱히 공격적인 태세도 갖추지 않고 허리춤에 찬 장도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온몸으로 내뿜는 살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쿠로노 구조체

붉은 머리의 사신……

누군가 살짝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베라는 고개를 돌리더니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하, 누군가 날 그렇게 불러주는 게 얼마 만인지. 참 "그립네"……

베라가 손을 드는 단순한 동작에 현장에 있는 병사들은 숨을 죽인 채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가 무기를 꺼낼 거라고 생각했던 모두의 예상과 달리 베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난스레 자신의 손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내가 너희들을 죽였으면 좋겠어?

하지만 표정과 달리 그녀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베라의 심문을 맡은 쿠로노 구조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대화는 서로를 자극시킬 뿐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리더로 보이는 쿠로노 병사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상황인지는 대충 알고 있어. 곧 너희들을 데려갈 수송기가 도착할 거야. 자세한 내용은 공중 정원으로 돌아간 뒤 보고해.

내 대원들을 보고 싶어.

모니터링 보고에 따르면 네 대원——코드네임 BPH-22는 이번 작전 중에 의식의 바다에서 이상 파동이 감지됐어. 아마 적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우리는 그녀를 따로 격리 조치 후 기체를 점검할 거야.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 상태가 안정되었다고 판단되기 전에는 감시 및 격리를 해제할 수 없어.

이번 작전에서 너희 세 명은 모두 새로운 타입의 적과 싸웠고 너희들도 위험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야.

너희 소대는 개별적으로 이동될 거야. 기체 데이터가 정상이라고 확인되면 자유롭게 될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철판 따위는 종이 자르듯 갈라버리는 장도가 공간을 가르고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번개처럼 빠른 여성 구조체의 공격에 그 누구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칼을 뽑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보조형 구조체인 그녀가 공격형 구조체 못지 않은 스피드를 자랑하고 있었다.

순환액이 리더의 얼굴 상처를 따라 흘러내려 어깨에 떨어졌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구조체들은 그제야 꿈에서 깬 듯 베라를 조준했다.

그들은 언제든지 바로 사격을 할 수 있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려두었다.

하지만 베라의 칼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말했지? 그레이 레이븐을 상대하던 방법이 우리한테 통할 거란 착각은 버리라고. 나보다 너희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럴듯한 핑계들 말이야. 그레이 레이븐 멤버들한테는 통했을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아니야. 너희들이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전부 다 알고 있으니까.

BPN-13은 무기를 버려라. 반복한다. BPN-13은 무기를 버려라.

베라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10여 미터 밖, 격리대 다른 한쪽에서 21호의 야수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21호

21호는…… 지금 당장 리더를 만나야 한다.

21호한테…… 가까이 오지 마.

21호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울려 퍼지고 시끄러운 충돌음이 이어지더니 빽빽대는 녹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티스

야! 너희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뭐? 지금 날 막겠다는 거야?

쿠로노 구조체들은 다른 두 대원에 대해서도 똑같이 상황을 설명했다.

베라의 미간 사이에 자리 잡은 깊은 주름이 살짝 풀어졌다.

세 명 중 놀랍게도 그녀가 가장 ‘분노를 잘 다스린’ 사람이었다——그 사실을 인지한 베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귓가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그녀는 미소를 거두었다.

이것은 그녀의 청각 모듈이 주위의 환경에서 울리는 소리를 접수한 게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청각 모듈에 전송된 신호였다.

암호화 채널 연결 신청 통과. 임무 ID961211. 구조체 BPN-13의 데이터베이스에 전송되었습니다.

O(현재 위치)

X(목적지까지의 거리: 4.63km)

베라의 시각 모듈에 좌표 정보가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이곳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다른 한 점은 지금 그녀가 있는 곳에서 5km도 안 되는 곳이었다.

마을 교외에 위치한 황무지.

군 총사령관 직속 부대의 리더로서 베라는 니콜라와만 단독으로 연락할 수 있는 암호화 채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채널에 접속할 수 있는 비밀코드를 알고 있는 건 니콜라뿐이었다.

사냥개는 사냥꾼을 도와 사냥감을 잡는 도구일 뿐이었다. 질문을 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녀의 유일한 사명은 임무 목표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잡아 지정된 위치로 물고 오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명령이자 그녀만 볼 수 있는 좌표였다…… 이것은 그녀에게만 주어진 ‘단독 임무’였다.

베라는 순간 모든 걸 눈치챘다.

그녀는 장도를 거두어 숙련된 손길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엄지와 식지로 작은 원을 만든 뒤 입술에 가져다 대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리더……

21호는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마치 맹수처럼 등을 굽혔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주위의 쿠로노 병사들을 공격하려는 듯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베라의 휘파람 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는 두 손을 조용히 내리고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고분고분 고개를 숙였다.

21호는 리더의 말을 따른다.

이것은 케르베로스 소대만 가지고 있는 작전 암호였다. 전장에서 이렇게 대놓고 ‘암호’를 주고받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실 휘파람은 전술 지령을 전달하는 용도가 아니었다. 케르베로스 멤버들도 평소에 전략이며 계략에 신경 쓰는 위인들도 아니었다…… 이 신호는 그저 다른 두 멤버에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강아지야. 착하지? 앉아.’

케르베로스 멤버들은 조금만 풀어줘도 전장에서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뛰었고 상황이 통제불가로 발전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래서 베라가 바로 모든 행동을 멈출 수 있는 암호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작전 암호라기보다는 미친 개를 잡아두는 마지막 ‘목줄’에 더 가까웠다.

한편, 녹티스 역시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이미 한 손으로 쿠로노 병사 한 명을 제압한 그는 짜증스레 혀를 차더니 구조체를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왜 공격을 멈추게 한 거야! 베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21호와 녹티스를 태운 수송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라는 두 수송기가 떠나는 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병사가 서둘러 기내로 들어가라는 듯 총구로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베라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제식총을 잘라버렸다.

규정대로 움직이면 쓸데없는 시간만 낭비하게 되겠지. 나한테 이 일을 맡긴 이상 어떻게 수행할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야.

흙 특유의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코끝이 살짝 움직였다.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새하얀 어린 짐승 같은 소녀와 연결된 뒤로 후각이 전보다 더 예민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건 흙이 물에 젖어 나는 특유의 썩은내였다.

철벽으로 이루어진 공중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의아하던 찰나 방폭 창문 밖의 모든 구조체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별다른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일어난 사태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들이 조준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먼저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철로 이루어진 골격과 살갖이 찢어질 때와 같이 "찌걱"하는 소리의 파열음이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나를 가두고 있던 ‘검은 상자’에 작은 틈이 생겼고 순간 햇살이 그 틈을 비집고 쏟아졌다.

눈부신 햇빛 사이로 화려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적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오랫동안 어둠에 있었던 탓에 동공은 잔뜩 팽창된 상태였다. 원추세포와 간상세포가 연결되기 전에 갑작스럽게 빛이 쏟아지니 시야는 물론이고 머릿속도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잠깐 멈칫한 사이에 괴려한 적색 여인이 질풍처럼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와도 같았다.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칼날에 반사된 햇살이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춤을 추었고 허공에서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하나의 빛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빛이 나타났고 인간의 홍채에 그녀의 몸놀림이 남긴 건 잔상뿐이었다.

‘경뇌’가 내리치는 곳마다 쿠로노 구조체 병사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칼날은 그들이 있는 공간 자체를 깨트렸다.

칼날이 의자에 묶인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에 날카로운 검기가 날 압도했다.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감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때,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지척지간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제야 빛에 적응된 시야에 주위의 풍경이 들어왔다.

눈을 떠보니 내 두 다리를 묶고 있던 철사슬이 두동강 난 상태였다. 그리고 사슬을 끊음 장도가 바로 내 눈앞에 박혀있었다.

칼을 든 이의 최후의 일격에는 힘이 유난히 더 세게 실렸다. 장도의 칼날 중 3분의 1이 땅에 꽂혔고 그 충격이 아직도 공기 속에서 진동하며 웅웅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장도를 따라 시선이 움직이고…… 익숙한 그림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빛을 등진 채 내 앞에 서 있는 베라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오, 오랜만이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그녀는 여유로운 오후의 어느 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듯 가볍고 덤덤하게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신을 잃은 채 그녀의 발 아래에 깔려있는 쿠로노 구조체만 없었다면 정말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인사 후에 그녀는 평소처럼 바로 악담을 내뱉었다.

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겨우 이 정도에 놀란 건 아니지? 설마 오줌이라도 지린 거야?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피식 웃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진 구조체들을 그녀가 만들어낸 구멍 밖으로 던져버렸다.

훌륭한 사냥개는 임무를 완전히 끝내기 전까지 절대 방심하지 않는 법이니까.

방을 깔끔하게 ‘정리’한 베라가 흠칫 멈춰 섰다.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멀리서 들리는 굉음에 그녀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넌 참 놀라울 정도로 둔해.

나에게 말을 함과 동시에 그녀는 빠르게 나를 향해 다가왔다. 베라는 바닥에 꽂힌 장도를 뽑아 단번에 검은 집의 다른 철벽을 갈랐다.

철벽 뒤로 수송기의 조종실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벽’ 밖에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성한 침엽수림은 불어오는 밤바람에 따라 푸르싱싱한 나뭇가지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흔들렸다.

공중 정원은 이렇게 큰 녹색 식물을 키우고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자연바람을 흉내 내는 데 자원을 낭비할 리가 없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난 한 가지 사실을 인지했다.

——지금 지구에 있는 거구나.

하지만 왜?

원격 연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공중 정원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 잠깐 사이에 지구의 수송기 안에 있는 거지?

순간 별거 아닐 거라고 넘겼던 묘한 위화감들이 퍼즐처럼 연결되었다.

평소보다 더 길고 혼란스러웠던 원격 연결이었다.

나와 연결한 뒤로 항상 연락기로만 소통하던 레베카와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발에서 느껴지는 진동까지.

그제서야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자 베라는 한심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이제 눈치챈 거야?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첫 원격 연결을 진행했을 때부터 쿠로노는 날 공중 정원에서 지구로 이송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계속 같은 공간 안에 있다고 착각하도록 날 가두고 있던 밀폐된 검은 집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수송기 안에 만들었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눈에 띄는 쿠로노 구조체들을 전부 제거하긴 했지만 곧 지원병력이 도착할 거였다.

가서 선실 문부터 닫아. 가짜 밀실을 파괴하긴 했지만 비행선의 외부 구조까지 파괴하진 못했으니까.

난 이 수송기를 작동시킬 거야. 그리고…… 도망칠 거야.

말을 마친 후 눈길을 주지 않고 그녀는 조종실로 들어갔다.

적색 머리카락은 칼처럼 날카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날의 빛이 내 몸을 스치며 사라진 순간 익숙한 무기의 냄새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누군가 서재의 문을 갑자기 열었다.

그린스가 살짝 눈꺼풀을 올렸다.

멋대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의 개인 거처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몇 명 없었기에 그린스는 딱히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까지 별 소란없이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의 사람’일 것이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서재 문을 연 사람은 레베카였다.

헐떡이는 숨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고 항상 정교하던 화장도 살짝 번져있었다. 외모를 신경 쓸 새도 없이 부랴부랴 달려온 듯했다.

이것은 레베카에게 결코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웬만한 일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한 인물이었다.

분명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린스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 레베카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그린스의 앞으로 걸어왔다.

도대체 총 사령관과 무슨 거래를 한 거죠. 케르베로스의 리더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과 함께 도망쳤어요. 그 자식들이 당신의 계획을 이용한 거라고요!

그녀의 말에 그린스는 흠칫하더니 곧 배를 끌어안고 폭소하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리틀 닉이 정말 그렇게까지 했단 말이야?

레베카는 속도 없이 웃어대는 남자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교계의 아름다운 꽃, 레베카. 드디어 가식적인 중립을 지키지 않기로 했나 보지? 계속 말해 봐.

레베카는 그린스가 의회와 쿠로노 사이를 오가며 간을 보던 그녀의 행동을 비아냥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레베카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말을 이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케르베로스의 다른 두 멤버는 우리가 제압했어요. 그 중 한 명은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과 오랫동안 연결 상태를 유지했었어요. 임무 데이터에서도 이상 행동이 발견되었고요.

그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를 추출해서 이번 작전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한다면…… 뭐라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여유로운 표정이신 거죠?

그린스는 레베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이번 작전에서 우리의 목적이 뭐였지?

그의 질문에 레베카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번 작전의 목적? 대외적으로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을 이용해 루나로 의심되는 의식의 바다 활동 신호를 조사하고 루나의 행방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린스는 이번 작전이 끝난 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을 의회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휘관의 위치를 몰래 옮겨뒀다. 그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쿠로노는 항상 강경한 태도로 의회와 맞서 왔었다. 레베카는 그린스가 이번 임무가 끝난 뒤 더 기상천외한 명분으로 의회의 질의에 대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원격 연결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던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린스는 온갖 핑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치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을 감시 통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물론 의회도 그린스의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들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났을 테니 뭐 딱히 되돌릴 방법도 없을 것이었다.

정리가 끝난 레베카는 이번 작전이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을 테스트하고 다시 되찾기 위해 진행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리의 작전 목적은 대행자 ‘루나’의 행방을 찾는 거예요.

말을 마친 레베카는 묘한 위화감에 멈칫했다.

그녀는 그린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대행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그 대행자를 위해서였다.

그가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가 대행자와 연결될 수 있고 의식의 오염을 막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레베카는 갑자기 한 가지 일을 의식하게 됐다.——

우선 순위가 틀렸어.

그린스에게 지휘관이 아무리 중요한 존재라 한들 대행자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린스가 지휘관 하나를 완벽하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큰 판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문제 될 게 없었다.—— 손에 쥔 카드가 많을수록 그들은 더 유리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항을 비교해 볼 때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건 바로 그 ‘대행자’였다.

그린스는 지금 굳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루나’라는 이름의 대행자를 찾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분명 이 마을에서 그녀의 의식의 바다 활동 신호를 감지했음에도 집행 부대 하나만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마치 그 대행자를 찾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이번 작전은 그 지휘관이 대행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 자질을 테스트하기 위함인 듯 여유로웠다.

아, 아니야. 대행자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어…… 설령, 설령……!

무언가 베라의 머릿속을 번쩍 스쳐지났다.

레베카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린스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우스꽝스러운 미소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왠지 징그럽게 느껴졌다.

고민은 끝났어? 우리의 사교계의 꽃?

레베카가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이 말라붙은 탓에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내가 모든 진실을 알려주기로 선택했다는 건 내가 개인적으로 널 믿는다는 걸 의미해.

네가 의회 쪽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거라고 믿는게 아니야. 네가 이 모든 걸 안다 해도 내 계획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거지.

그린스는 그들이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반복했다.

다른 건 굳이 고민하지 마. 지금처럼 통통 튀는 모습으로 "의회와 쿠로노 사이를 오고 가는 비관계자"라는 이미지를 유지해. 그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을 테니까.

레베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스가 한숨을 쉬었다.

리틀 닉이 그런 계획을 하고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 목표를 위해 나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버릴 줄은 몰랐지만.

그러니까 더 관심이 가는걸?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더 중요한 무언가를 이미 발견했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 물건만 손에 넣으면 쿠로노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야.

도대체 뭘까? 리틀 닉? 혹시 그 자료와 관련이 있는 거야?

그린스는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시공간을 넘은 듯한 표정으로 니콜라와 대화했다.

드디어 소리를 되찾은 레베카가 어색하게 그린스의 말을 잘랐다.

그럼 당신…… 우리의 다음 계획은 뭐죠?

수송기 좌표를 추적해. 막을 수 있으면 막고 막을 수 없으면 그냥 내버려 둬.

이렇게 쉽게 보낸다고요?

네 손엔 지금 아주 중요한 열쇠가 있어. 하지만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보물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지. 이때 누군가 나타난 거야. 그 사람이 보물상자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걸 넌 인지하고 있어. 네 손에 있는 열쇠만 손에 넣는다면 어마어마한 재물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럼 차라리 그 열쇠를 보물 상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게 낫지 않겠어?

그린스는 일어서더니 자리를 뜨려는 듯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떠나기 전 그는 고개를 돌려 레베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물 상자를 열고 보물을 얻으려고 할 때, 한꺼번에 다 빼앗으면 되잖아.

메시지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공중 정원의 정기적인 공중 보급 궤도를 통해 물자와 함께 보급될 에정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우리의 작전 거점이 없습니다. 새로운 좌표에 추가로 메시지를 재생한다면 "일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될 겁니다. 최대한 다른 임무로 시선을 돌려 보겠습니다.

수고했어. 세리카.

평소와 달리 세리카는 "야간 수당" 같은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아니,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피곤한 상태였다.

이제 돌아가서 쉬어. 세리카.

세리카는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하산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니콜라와 하산 단 둘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케르베로스 전출 사안으로 모리가 의심하기 시작했어. 잊지 마. 우린 모리를 통해 나머지 절반의 자료를 얻었어. 내가 아는 모리라면 그 자료를 미리 백업해 뒀을 텐데. 모리가 그 자료를 쿠로노에 넘기면 어쩌려고 그래?

모리는 똑똑한 아이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지.

이득을 얻을 수 없는 일에 모험을 하지 않을 거야. 모리는 장사치일 뿐 원칙도 없이 날뛰는 배신자가 아니니까.

니콜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