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를 오르자 발 밑 지면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은 아래층에 있는 카무가 적과 대항하는 중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었다.
위쪽에서 크롬 뒤쪽 사다리를 향해 질주하는 이합 생물들의 기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이합 생물에 크롬은 걸음을 멈추고 사다리 앞에 서 있었다.
기체의 침식 수치가 임계치에 도달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전투를 이어갔다.
이건 무모한 자기희생이 아닌, 침식 수치 상승 중단의 이상에서 뭔가를 알아차린 것이다.
계획을 이용한다…
조금만 버틸 수 있다면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적을 이곳에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결심과 함께 말 못 할 생각이 하나 떠올랐지만, 낮은 성공 확률 때문에 잠시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크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고, 낫이 번개를 휘감아 이합 생물의 몸 위를 뛰어다니며 하나씩 하나씩 파괴했다.
곧 승리의 서광이 보이려던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발걸음이 그를 향해 서서히 걸어왔다.
도망갈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것도 당신한테는 기적이었는데, 이제 와서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건가요?
크롬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눈앞의 이합 생물들을 막았다.
재미있군요.
눈앞의 이합 생물이 뭔가 신호를 받은 듯 공세를 멈췄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어 빠르게 성장하기도 하고, 또 더 심하게 넘어지기도 하죠.
당신도 그런 부류인 것 같네요.
하지만 난 당신이 예상한 그날이 오도록 보고만 있지 않을 거다.
크롬의 단호한 말에 본·네거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수많은 전류의 퍼니싱이 세찬 물결처럼 그의 발 밑에서 이 좁은 공간을 찢어 가르려는 듯 울부짖었다.
제게 당신의 한계를 보여주시죠.
수천 개의 붉은빛이 땅에서 솟아올랐고,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크롬의 역원 장치를 향해 돌진했다.
크롬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피하면서 재빨리 본·네거트를 향해 돌진했다.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찰나 크롬은 낫으로 그의 옆에 있던 움직이지 않는 이합 생물을 들어 올려 방패로 삼았다. 공격을 막음과 동시에 몸을 돌려 뛰어올랐고, 금빛 번개가 그의 낫에서 쟁쟁한 소리를 울렸다.
——띵!
크롬의 모든 에너지를 모은 일격이 본·네거트의 방어 필드와 충돌했다.
소용없습니다. 이건 이미 시도해보지 않았습니까?
...아니.
크롬은 낫을 꽉 움켜쥐고 번개를 칼끝 한곳에 모았다. 운석이 떨어질 때와 같은 고열로 본·네거트를 다시 내리쳤다.
미세하게 들리는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낫의 칼끝이 마침내 그 견고한 방어 필드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침식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다니. 당신은 확실히 아주 우수한 종자인 것 같네요.
그는 방어 필드에 꽂힌 무기를 보고 칭찬을 하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은 용기, 지혜 그리고 기술이 아닙니다. 단순하고 야만적인 힘이죠.
전에도 말했듯이, 인류의 기술 발전 속도는 아직 당신에게 확실한 승리를 안겨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니, 저도 당신에게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드리도록 하죠.
...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려 눈앞에 꽂힌 방어 필드를 해제하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힘이 다한 크롬을 지켜보았다.
"용자" 에 대한 존경으로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의 동료를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본·네거트가 이 말을 마치자 지하 수도에 몰려 있던 이합 생물이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여러분들이 이곳에 올 때 탔던 그 수송기는 끊임없이 작은 "눈"을 보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침식에 저항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기록을 멈추지는 않죠. 나중에 일부 조사원에게 회수된다면 귀찮아지게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제가 하이디에게 가서 당신들의 수송기를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우리와 무관한 일이라 더 이상 하이디도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
당신의 충성심이 정말 가치가 있을까요?
빛과 그림자는 공존한다. 너의 관점에서도 비슷한 점이 있겠지?
크롬의 대답에 본·네거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
그는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터널 안쪽으로 사라졌다.
녹슨 바닥을 타고 오르자 카무는 옆으로 반쯤 붕괴된 동굴을 뚫었다.
왔군, 괜찮나?
카무를 보고 크롬은 지탱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기체의 다리가 완전히 갈라져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대충 훑어봐도 그의 기체는 심각한 침식과 손상을 입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내 대사야. 네 부상 상태를 봐봐.
난 괜찮다.
네 말은 못 믿어. 의사한테 물어봐야겠어.
리더의 부상은 내가 수습했지만, 현재로서는 상황을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게 최선이야.
어서 돌아가자.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래. 다 모였으니 돌아가자.
리더 이송은 내게 맡겨!
괜찮다. 혼자서 갈 수 있어.
크롬의 말은 일관됐지만, 그의 숨기기 힘든 피로감에서 지금 그저 힘겹게 버티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최대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고는 했지만 꼭 운동을 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러다간 큰일 난다고 반즈도 방금 말했잖아! 그래서 먼저 돌아가라고 한 건데!
날 기다리기 위해 여기서 버티고 있던 거야?
돌아갈 수 있는 수송기는 단 한 대 뿐이다. 널 보낸 그건 이미 돌아갔으니, 네가 여기에 남아있다면 아마 다시 그 대행자들의 공격을 받았을 거다.
카무이! 억지로라도 저 녀석을 등에 업고 어서 철수해!
알겠어!
크롬은 거절하려 했지만, 카무이에게 한 손으로 어깨에 짊어졌다.
크롬은 중상으로 움직임이 불편해지자 저항을 포기했다.
전속력으로 출발하자!
차징 팔콘 소대가 철수한 뒤, 초토화된 폐허의 그림자에 더 어두운 그림자가 두 개 나타났다.
그렇게 심한 부상을 당하고도 그는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가 공중 정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전 그의 몸에 있는 퍼니싱을 최대한 통제해 침식 정도가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림자 속에 있는 자가 가볍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도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을 뿐, 이제 그가 버틴다 해도 기체 복구에는 한 달 이상이 걸릴 겁니다.
...왜 일부러 이런 일을 한 거죠?
앞에 있는 남자는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가리켰다.
이건 선전포고입니다.——그 해마체와 의식의 바다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는 권력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저는 그를 살려둬야 할 필요가 있죠.
소녀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의문을 표시했다.
별거 없습니다. 그냥 작은 소동으로 그 사람들의 주의를 다시 끌려는 것뿐이니까요. 어쨌든 그들에게 생존자는 죽은 자보다 입을 다물게 하기 어려울테니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가능한 한 행동을 숨겨왔는데...
지금... 그들의 주의를 끌 생각이신 건가요?
인간의 주의를 끈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단지 잠깐 쉬었을 뿐이죠.
제가 적조를 직접 본 순간부터 승격 네트워크가 역사에서 암시한 빛나는 미래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계속 은밀하게 행동해서는 더 나은 사냥감을 얻기 어려우니, 이제 우리가 행동할 차례입니다.
게다가 알파는 원래 루나를 향하던 인간의 화살을 어떻게든 저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 같더군요.
그들을 죽인다 해도 앞으로 같은 일이 발생 될 겁니다. 알파를 배제해도 되지만, 그렇다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는 루나가 다음 복병이 될 수 있죠.
저는 원래 적조에 필요한 "식량"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들이 누군가를 보내 준다면 더 할 나위없이 좋죠.
이렇게 서로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그녀가 곧 저에게 고마워할 것이라 믿습니다.
...
설마 "그"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요?
...네.
안심하세요. 저는 공중 정원에 오른 어떤 인간이 지구로 다시 돌아가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절대 그 인간을 만나지 못할 겁니다.
네.
다음 중요한 목표는 역시 당신의 '엄마'입니다.
그들은 분명 다시 이곳에 올 것입니다. 그녀를 보호하는 임무는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죠. 전 아직 할 일이 있으니까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넨 수정 피라미드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이거 어떻게 쓰는지 아시나요?
...네.
수송기가 천천히 가까운 궤도에 진입했다.
스스로 격리 박스에 들어간 카무를 제외하고 카무이와 반즈는 조금 다급해 보였다.
반즈가 크롬의 역원 장치를 재점검한 결과, 기체는 침식과 전투 중 크게 손상됐지만 다행히 역원 장치는 파괴되지 않았다.
이 정도 부상은 모든 게 순조롭다 해도 한 달 이상은 쉬어야 할 거야.
크롬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감으로 그는 기내 벽에 기댔고 창 밖의 어두운 하늘은 그를 졸리게 했다.
크롬은 떠나기 전에 구조 요청 카운트다운을 취소하는 것 외에도, 구조 작업에 참여한 집행 부대가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게 긴급 철수 요청을 보냈다.
만약 한 소대가 대행자를 만난다면 결말은 하나뿐이다.
희생.
크롬에게 희생은 결코 낯선 단어가 아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희생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전사로서 전쟁터에 간다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네 전근 명령의 허가를 받았다. 다 이번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덕분이다."
...
오래된 기억들이 크롬의 의식의 바다에서 떠올랐다.
예전에 그는 한 심각한 "실패"를 겪었는데 그 경험이 크롬에게 "새 생명"을 안겨줬다.
이번에는?
(최악의 결과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 순간에 모두를 지켰어.)
이런 생각을 품고, 크롬은 마지막으로 본·네거트를 마주하기 전 마음 속에 스쳐갔던 생각을 떠올렸다.
(최악의 결과가 아니라면...)
그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만약 이번 전투에서의 부상으로 기체 교체 시기가 앞당겨진다면.
그럼... 의식의 바다 이탈 후의 오염 등의 증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일하게 오염에 대한 저항을 가진 [player name]을(를) 잠시 그 방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player name]와(과) 함께 움직인다면 이 비밀 거점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랭스턴, 내 아들로서 무엇을 하면 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아 서로 맞춰 완벽한 자신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 저만의 방식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중요한 프로젝트가 마지막 카드가 될 수 없다면.
(생명의 별에 배치되어 기체를 정비하면서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그 감시를 생각하면, 그가 한 달 동안 생명의 별에 누워 있는 건 누군가의 계획에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
...
[player name]와(과) 만났을 때, 상대방에게 어떤 꼬투리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가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크롬은 후회하지 않았다.
한 사람을 구하기 전에 반드시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확실하게 [player name]의 뜻을 전달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쥐가 되어" [player name]을(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든, [player name]이(가) 자신을 도와주게 하기 위해서든, 그는 반드시 살아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절대 그들이 나를 방해하게 해서는 안 돼.)
이 때문에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반드시 움직이려 했다.
...생명의 별의 통신이 계속 연결되지 않아. 부상자 수용 상황을 확인하려 했는데.
통신에 문제가 생긴 건가? 아니면 근처에 신호 차단이 설치되어 있나?
크롬은 말을 하려 했으나 침식과 부상이 겹치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누가 엔진 쪽에 장난을 친 모양이야.
방금 너무 급한 나머지 거기까지 세밀하게 점검하지 못했어. 비행하는 도중에는 엔진을 손볼 수도 없고.
공중 기지로 돌아간 뒤에 다시 연락하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송기의 굉음 속에서 침묵했다.
크롬은 자신이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알리고 싶었지만 시야마저 점차 어두워졌다.
여기서 혼수상태에 빠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반즈는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으로 봤을 때 작은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반드시 정신을 유지하고 단서를 남겨야 하는데... 크롬은 자신의 몸을 억지로 버티며 갈라진 손가락 마디를 끌어당겼다.
……A29
손끝에서 새어 나오는 순환액으로 손바닥에 간단하고 쉽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숫자를 적어놓았다.
A열 29번. 그것은 그의 단말기 연락처 중에서 아시모프의 개인 통신 주소였다.
아시모프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지만 기밀 연구를 수행할 때만 이 주소를 통해서만 연락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주소는 그의 친구와 그 비밀 프로젝트와 관련된 사람만이 알고 있다.
그들이 가장 난폭한 수단을 동원해 신호 차단으로 그의 계획을 방해하려 한다면, 그는 여기서 일말의 희망을 손에 새겨둘 것이다.
그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반즈와 카무이는 모든 통신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할 때 이 숫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럼 통신 기록을 볼 때, 더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건 자연스럽게 통신 기록과 관련된 단서이다.
그 숫자를 좀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 크롬은 손상된 손끝을 다시 한번 잡아당겼다.
뼈가 사무치듯 아팠다.
나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나를 깨우기 위해 고통을 준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크롬의 마음속에 어떤 가슴 아픈 그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송기가 예정된 궤도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 공중 정원은 이미 인공적인 밤으로 뒤덮여 있었다.
크롬에게 창 밖의 허구의 달은 파오스 학원에서 함께 수 많은 밤을 함께 지냈다.
수없이 반복되는 작업, 반복되는 연습, 반복되는 시도.
오직 랭스턴 스미스가 계속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젠... 차갑고 딱딱한 "완벽"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스미스"가 되는 것도 더 이상 그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다...
어쩌면 그 익숙함 속에서 안심되어 스스로 한계를 버텨낸 걸지도 모른다.
크롬의 의식은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도착했어!
우선 이 괘씸한 수송기의 신호 차단 범위에서 벗어나 생명의 별에 연락하자.
그래, 리더는 나한테 맡겨!
리더 상태가 더 악화되고 있으니 편안하게 안고 있는게 좋겠어.
"모두 고마워"
이 말을 하고 싶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카무이, 잠깐만! 대장 손바닥에 뭔가 적혀져 있는 것 같아.
A29?
수송기에 오르기 전에 이런 글이 없었는데... 리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던 건가?
대장의 음성 모듈이 완전히 고장 난 것 같아. 일단 생명의 별에 가서 이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연구하자!
반즈는 크롬의 손을 잡더니 그의 손바닥에 적힌 글을 지웠다.
가자.
의지할 수 있는 동료, 의지할 수 있는 친구, 진정한 안정감. 차징 팔콘의 리더라는게 그에게 얼마나 행운스러운 일일까.
리더...
크롬이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 카무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인간의 일상에서 말하는 "새벽"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착륙장에는 수송기를 수리하는 작업자가 있었다.
그들은 반쯤 올려진 안전문과 거기서 나오는 금빛 그림자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작업자들에게 "뒤통수만 봐도 저 친구는 웃고 있다"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던 청년은, 이번에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저기! 의료진 있어?
지구에서 돌아온 작전 인원은 먼저 왼쪽 소독 터널을 통과하신 다음에 구역 수송차를 이용해 생명의 별 응급 센터로 가세요.
오른쪽 격리문 뒤에 서 있던 작업자는 냉정한 태도로 규정을 말해줬다.
규정을 듣고 카무이는 완전히 의식불명인 크롬을 안고 소독 터널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격리문 뒤에 있던 작업자들이 모여 낮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 저기 그 부축되서 온 사람 있잖아. 스미스가의 그분 아닌가?
도대체 어떤 임무를 맡았길래...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끌려와도 이렇게 놀라지 않을걸.
그 분은 사람이잖아. 하지만 이 분은... 휴, 스미스님은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네.
탈출구를 달려 빠져나갔고 카무이는 크롬을 안고 소독 터널로 돌진해 갔다. 반즈와 카무도 뒤따라 들어갔다.
이제 따라가지 않겠어.
... 그에게도 안 좋을 거야.
카무의 말을 들은 반즈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침묵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연락할게. 걱정 마.
카무는 소형 여과탑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카무이와 그의 품에 안긴 자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주위의 소독 스프레이 속에서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고 조용함이 서로를 덮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소독이 끝났다는 알림이 울리자 카무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흔들며 카무이와 반즈가 크롬을 안고 재빨리 수송차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즈가 불안하면서도 익숙한 곳에 다시 섰을 때, 눈앞의 상황은 기억하는 것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075호 도시의 대규모 전투의 영향으로, 한때 바쁘기로 유명한 생명의 별은 이제 핏자국과 순환액으로 가득한 지옥이 돼버렸다.
이번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은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거라고 예측했지만, 최선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확산되는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우주 무기가 대부분의 적조를 증발시켰지만, 075번 도시의 폐허에는 여전히 많은 부상자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대량의 이합 생물을 처리하고, 물자를 수송하고, 샘플을 회수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핵심 팀의 성과에 비하면 사소할 수 있지만 똑같이 중요하다.
반즈는 카무이를 데리고 익숙한 지름길을 통과해 재빨리 응급실로 들어가 크롬을 임시 정비대에 올려놓았다.
우린 이곳이 필요——
죄송해요. 정비실은 이미 가득 찼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업자는 황급히 거절한 뒤 고개를 돌려 도움을 청하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부상자가 이렇게 많아? 반즈, 우리 그냥 하산 의장의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자.
반즈는 짧게 대답했고 둘은 각자의 단말기를 열고 하산과 세리카의 통신을 연결했다.
여전히 아무도 안 받아.
...세리카도 통신을 안 받아.
설마 밤이라서 그런가?
...
아시모프나 다른 사람은?
대부분은 임무가 있지만 아시모프한테 연락해봐.
두 사람은 통신을 열어 몇 번이나 구조를 요청했지만 아시모프도 통신을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낯선 얼굴이 통신에 떴다.
세리카!
... 안녕하세요. 세리카씨가 아직 회의 중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상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부상 인원은 절차에 따라 생명의 별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만원이야.
생명의 별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부상자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곳의 상황을 세리카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만, 세리카와 의장님은 의사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뭐라고?!
표준 매뉴얼에 따른 답변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시 한번 안내드릴 수 있습니다.
...너!
그래, 알았어.
반즈는 통신을 끊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하산 의장님과 세리카에게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통신까지 관리되어 버리다니.
그와 더 이상 말해봐도 소용이 없어. 우린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아, 반즈 선생님 아니세요? 오랜만입니다.
모퉁이에서 약간 익숙한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다.
너 아직도 여기에 있었어...!
하하, 다른 곳에 갈 것도 없죠.
그건 그렇고. 내가 지금 기체를 정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한데 남은 정비실 있어?
보시면 아시잖아요.
의사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정비실이 아니어도 돼. 괜찮은 행동 모듈하고 기체 순환 정화 장치만 있어도 돼.
직접 하시게요?
그녀는 즉시 임시 정비대 쪽으로 달려가 재고에서 크롬의 기체 모델을 찾아 주었다.
손 모듈만 1개 남았어요. 하지만 정비실이 없으니 교환할 수 없어요.
게다가 손만으로는 아마도......
기록된 재고 이외에도 전에 생명의 별에서는 비상 준비 물자를 남겨뒀었어. 그것들을——
방금 전에 찾은 게 그것들이에요.
지금 상황이 매우 심각해요. 하지만 예전 친분을 봐서 순환 정화 장치 1대를 빌려드릴게요.
그녀는 반즈를 뒤돌아보며 무거운 어조로 한마디 했다.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 반즈.
...일단 순환 정화 장치를 빌려 줘.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에서 붐비는 사람들 옆으로 비집고 들어가, 재빨리 순환 정화 장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반즈와 함께 크롬의 몸에 연결했다.
그를 데리고 즉시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어요.
그녀는 정화 장치를 연결하던 중 반즈 옆에 와서 조용히 말했다.
왜?
여러 의미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잖아요.
물어보신다면 저는 의료 물자가 부족하다고 밖에 답변드릴 수 없어요.
더 이상 말하는 것은 저에게도 위험해요.
정화 장치를 연결한 후 그녀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저는 일하러 가볼게요. 만약 다른 방법을 찾으면 장치는 여기에 남겨두시면 돼요. 제가 나중에 와서 다시 정리할게요.
고마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더니 생명의 별 표식이 달린 모퉁이로 사라졌다.
설마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일단은 괴사한 부품을 교체해야만 회복할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지금 비어있는 정비실에도 적합한 기체 부품은 없어.
만약 여기에 없다면 다른 곳은? 예를 들어 A29?
...나도 그 생각은 했는데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수수께끼 풀기 게임에서 보통 이런 숫자는 대략 패스워드, 랜드마크 또는 수많은 숫자 중의 어떤 특정한 무언가를 나타내.
리더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것 외의 것을 남기지는 않았을 거야. 잠금장치를 제외하고 A29와 가장 가까운 건물은 어떤 상점이야.
그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마지막 하나야.
통신 기록?
이 답이 나오기 전부터 둘은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오랫동안 통신 기록을 지켜봤다. 이를 생각해낸 건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였다.
둘은 의견을 일치한 뒤 신속히 크롬의 단말기를 꺼냈다.
A열, 29번... 어, 28과 29의 비고에 전부 아시모프라고 쓰여있어.
...해보자.
반즈는 통신 기록의 번호를 눌렀다.
...
그러나 마지막 희망의 맞은편에서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
통화 신호음 속에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반즈의 이마에 드문드문 응축액이 흘렀다.
...교체 가능한 기체 부품을 구할 수 있으면 내가 여기서 교체해 볼 수 있어.
리더의 아버지한테 연락할까? 가족 얘기를 하는 건 드물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어.
모처럼 카무이의 진지한 모습을 보니 반즈는 고개를 들고 잠시 멍해졌다.
...그 소문은 나도 조금 들어봤지만, 방금 그 상황을 너도 봤잖아. 그들도 리더 아버지를 생각했을 거야.
...계속해서 아시모프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자.
반즈는 다시 통신 기록의 이름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갑자기 통신의 그쪽에서 수신한 알림이 들려왔다.
아시모프!!!
으악!
통신 스크린 앞은 텅 비어 있었고 앳된 비명만이 들려왔다.
죄, 죄, 죄, 죄송해요. 아시모프의 통신에 무단으로 접속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계속 울리고 있어서...
너는 누구지? 됐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
네, 뭐라고요?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죠! 저는 로사예요. 원래는 아시모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통신 카메라에 전혀 잡히지 않는 키와 앳된 목소리로 볼 때 상대방은 많아야 여섯 일곱 살에 불과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 없어요. 아마 숨어서 계속 연구하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를 찾아야 해. 그는 어디 있지?
급한 일이요?... 그럼 과학 이사회 B3 구역으로 가보세요. 거기 있어야 다른 사람들이 연구를 방해할 수 없거든요.
B3 구역은 과학 이사회가 새로 지은 실험동으로 생명의 별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가자.
두 사람의 무거운 표정에는 마침내 한 줄기의 희망이 떠올랐다. 카무이는 다시 크롬을 안고 바깥에 있는 탈 것을 향해 돌진했다.
탈 것이 빠르게 B3 구역으로 들어가자, 건물 계단 앞에는 한 어린 소녀가 서 있는 것만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급한 일이 있다고 하셔서,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따라왔어요... 아시모프 님은 폐쇄 실험실에 있을 거예요.
폐쇄 실험실?
네. 아시모프 님께서는 방해받는 걸 매우 꺼려하셔서...
그녀는 고분고분 설명했다. 하지만 조급한 카무이의 찡그린 미간을 보자마자 목소리에 긴장감이 돌았다.
죄, 죄, 죄, 죄송해요. 지금 바로 안내할게요!!
로사는 몇 걸음 앞으로 달려가 허공에 떠 있는 구형 기계에 비틀거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대피 계단으로 돌진해 모퉁이 벽을 들이받는데 성공했다.
아아, 아시모프 님...!
로사가 떨림과 흐느끼는 작은 목소리 호소하자, 폐쇄 실험실 안쪽에서 각종 실험 기구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아시모프는 반즈에게 잘 어울리는 다크서클을 가지고 자신에게 뒤집힌 물건을 치우고 있었다.
반즈는 '아시모프를 놀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더 우선인 문제가 있었다.
아시모프! 우리 대장 좀 구해줘!
...
카무이 품에 안긴 중상을 입은 크롬을 본 그는 얼굴의 검은빛이 더 짙어졌다.
따라와.
아시모프는 빠른 걸음으로 폐쇄 실험실로 향했고, 로사는 겁에 질린 듯 서서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따라가지 않겠다고 표현했다.
여긴 응급 센터가 아니지만, 그래도 잘 왔어.
아침부터 크롬 기체의 문제점을 개선해 봤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일에 막혀서 모든 단말기를 작업실에 두고 왔어.
그리고 바로 가장 번거로운 문제를 드디어 해결했어.
아시모프는 문을 밀어젖히고 카무이 품에 안긴 크롬을 받아 정비대에 올려놓았다.
반즈, 너도 같이 도와줘.
반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정비대 근처의 각종 기기를 크롬에게 연결했다.
나는?
확인해야 할 게 있는데, 넌 가서 내 단말기를 가져와. 아마 로사가 가지고 있을 거야.
단말기?
서둘러.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