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의 거대한 몸이 수많은 잔해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그 굵고 튼튼한 팔에서 수많은 신경과 부품이 벗겨져 나왔는데, 어떤 것들은 공중 정원의 생산 표지가 붙어 있었다.
...
고작 침식체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다니, 대장답지 않은데.
그래… 그들은 이미 침식체가 됐어.
승강기 플랫폼의 꼭대기에서 문득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셋이 고개를 들자, 플랫폼 가장자리에 서서 박수를 치고 있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당신들 같은 강자들이 여기에 남아 승격 네트워크에 힘을 보탠다면, 그분도 당신들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습니다.
난 그런 제안에 관심 없거든.
일주일에 7일 휴가를 제공한다면, 난 한번 생각해 볼게.
뭐라고?
암튼... 휴가를 주면 된다고.
...
대원들은 장난기 가득한 대답을 내놓았고, 모두 놀랍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이런 동료들이 있었기에 대장인 크롬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대답은 이미 들었죠, 우린 여기 남을 생각 없고, 그 대행자의 부하가 될 일도 없습니다.
제 호의를 거절했으니 이 깊은 구덩이에서 적조의 양분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플랫폼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의 퍼니싱 농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물에 잠기겠어! 리더, 나 물고기로 변하고 싶지 않다고! 빨리 구명 로프를 꺼내줘!
가브리엘은 그 세 명이 공중에서 피하는게 힘들어질 때까지를 기다리는 듯, 플랫폼 꼭대기에서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공중에서 가브리엘에게 공격을 받는 것이 적조에 잠기는 것보단 더 합리적이었다.
크롬은 다시 로프를 꺼내 재빨리 동료들을 붙잡고 위로 뛰어올랐다.
가브리엘이 로프의 연결점을 공격하려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낀 가브리엘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서고, 옆에 서 있던 하이디와 함께 위압감이 전해지는 방향으로 인사를 했다.
공중 정원에서 온 자들도 있는 것 같군요.
크롬의 시선 위쪽에 검은색의 긴 옷을 입은 남성이 승강기 가장자리에 나타났다.
지금 막 그들을 처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오랫동안 잡아두게 만드는 놈들이 누군지 보고 싶었거든요.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그는 로프에 매달린 차징 팔콘 소대를 훑어봤다. 마치 그들이 한 걸음 더 올라가면 즉시 행동을 할 것처럼 보였다.
가브리엘 씨는 단지 저에게 전투를 연습 시키고 싶어서 저들을 제게 남겨주었습니다.
하이디는 마치 앞에 있는 자가 위압적인 대행자가 아닌, 스승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예의 바르고 차가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연습의 결과는 어떻죠?
그들의 능력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매우 비슷합니다. 하이디가 이기지 못하는게 당연합니다.
아하... 저번에 말한 그 소대인가요?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너에게 추천받을 가치가 있기를 바라.
그는 높은 곳에 서서 가브리엘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 가서 당신의 손님을 응대해주세요. 그녀가 당신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녀군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기체는 제가 강화시켰으니, 예전에 당신을 만났을 때처럼 그녀에게 궁지에 몰려서는 안됩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본·네거트님
저 이름은... 그 작가?
본·네거트라 불리는 대행자는 크롬 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들에게 검지를 치켜세워 입술에 대고 '쉿'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건 비밀입니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모두에게 "초대"하는 동작을 취했다.
올라오시죠. 이렇게 로프에 매달려 있는 건 제가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니.
셋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모두를 안심시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설마 당신들이 넘어갈 때, 제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걱정하는 건가요?
...
자, 그럼.
셋이 로프를 타고 승강기 꼭대기까지 빠르게 오르자 본·네거트는 위엄이 넘치면서도 부드러운 장원의 주인처럼 다시 한번 모두에게 초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제 임시 거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가브리엘이 말했던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알파가 여기로 끌어들이는 줄 알았는데 여러분들이 오실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가브리엘도 여러분들의 능력을 인정했으니, 저도 그의 안목을 믿고 싶군요.
알파? 루나 부하인 그 승격자를 말하는 건가?
그 이름을 듣고 크롬의 손바닥은 약간 뜨거워졌다. 알파가 이곳에 있었다면 루나도 그녀와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루나의 행방을 찾을 수 있다면 [player name]이(가) 짊어진 의심은 조금 줄어들게 될 것이다...
하하, 보아하니 그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가 보군요.
일련의 임무에 앞서 크롬은 승격자들에 대한 자료를 입수했다. 알파 관련 정보 페이지에는 루나의 부하인 승격자로 표기되어 있었고, 둘은 자매라는 것 이외에도, 주홍 글씨로 전투력을 경고했다.
그렇게 강력한 승격자가 그들을 없애려 한다면 적을 깊숙이 유인한 필요가 없을 텐데 알파는 왜 그랬을까?
본·네거트는 크롬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루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전 루나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죠.
그녀는 우수한 대행자였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승격 네트워크에 부여된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 왔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조기 선발된 대행자로서, 그녀는 승격 네트워크의 진화도 목격했습니다.
승격 네트워크의 진화... 지금의 승격 네트워크는 이전 보다 더 강해졌나?
그렇습니다. 더 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행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조건도 더 엄격해졌죠.
탐색할 때의 이념이 추진할 때와 다르지만, 개척자로서 이룬 공적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저희는 루나에게 감사해야 하죠.
현재는 그녀가 대행자의 자격을 잃을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죠.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승격 네트워크의 진화를 지원한 것 외에 그녀는 인간의 화력을 유도했습니다. 덕분에 후속 대행자들을 그들의 시야에서 숨길 수 있었던거죠.
화력을 유도했다고?
공중 정원이 루나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 루나 아가씨가 공중 정원의 눈앞에서 대행자가 된 이후, 인간은 대행자를 손에 얻겠다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행자가 정말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강하다면, 왜 인간의 추격을 두려워하는 거지?
지구가 인간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대부분 인간은 별에 퍼져 있는 퍼니싱처럼 번성하고, 잠식하고, 오염시키고, 파괴한다. 그들은 항상 잔인하고 교활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틈만 있으면 파고들려 하지.
그런 인간이 바로 영점 원자로의 참사를 야기했고, 이에 퍼니싱이 탄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지구는 인간 집단 중 이런 존재들 때문에, 하마터면 멸망할 뻔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굳이 역사를 보지 않더라도, 인간이 초래한 수많은 재앙을 당신들도 직접 겪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인간이 역사의 그늘 속에서 없어지도록 반드시 선별을 추진해야만 하죠. 그렇게 해야만 세상은 비로소 추운 겨울을 넘어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테니 말이죠.
그는 마치 오래 전에 익숙한 일을 이야기하듯 손을 내밀었다.
선별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은 그런 품성을 가진 인간에게 계속 위협을 받고 있으며, 대행자도 당연히 조심하고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죠, 안 그런가요?
그의 표정은 평온함을 유지하며 술술 말을 쏟아냈다. "그런 품성을 가진 인간을 경계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긴장하거나 두려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교관이 군중 속에 서서 담담한 어조로 그의 경험담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대행자라 해도 끊임없이 보완하고 배우고 개선해야 합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처럼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진보의 길로 들어서 진정한 완벽을 향해 나아가죠.
그의 말에는 허세가 없고 적 앞에서는 겸손한 교사 같았다. 하지만 크롬은 그 겸손한 태도가 어떤 일이 발생해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덕분에 그는 적 앞에서도 비밀과 약점으로 여겨지는 것들에게 대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점을 꼭 한 가지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가끔 카무이의 허리를 스쳐간다는 것이었다.
...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무엇에서 비롯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크롬은 본·네거트의 말을 들으며 눈을 살짝 내린 채 고개를 약간 돌려 카무이를 바라봤다.
방금 싸울 때 동작이 너무 컸는지 카무이 허리의 전술 벨트 끈이 느슨해져 있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
대행자로서, 저와 함께 선별을 추진할 사람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는 1단계 선발을 통과하는 게 고작이죠. 또 일부는 통과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요.
그들은 비록 퍼니싱에 면역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내일을 열 수 있는 힘은 쥐지 못했죠.
대화하는 동안 본·네거트는 다시 한번 카무이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 크롬은 그의 시선이 향한 끝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그것은 바로 느슨한 벨트 끈이었다.
그런 사람은 저한테는 그저 깨지기 쉬운 "알"일 뿐이죠.
다소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지만, 적의 특성을 더 확인하기 위해 크롬은 그가 말 한마디를 마친 뒤 정중하게 말을 끊었다.
카무이.
그는 돌아서서 카무이 허리춤의 전술 벨트를 잡아당긴 뒤 느슨한 끈을 단단히 묶었다.
왜 이 상황에서 이걸 신경 쓰는 거야?
...
이 모습을 보고 본·네거트는 만족하며 웃었다.
하하하, 관찰력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처럼 완벽주의자라고 해야 할까요?
가브리엘의 눈이 틀리지 않았네요. 당신과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그러니까.
본·네거트는 두 손을 벌리고 환한 표정으로 셋을 유심히 살폈다.
여러분들도 꼭 선별을 통과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훌륭한 씨앗들은 내일로 가는 길에 뿌려져야 합니다.
거절한다.
놀라운 대답은 아니지만... 이유를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죠.
어쩌면 우린 서로 싸울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제가 하는 모든 것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니까요.
당신들만의 미래만 말하는 게 아닌가?
왜 "당신"이라고 정의하는 거죠?
당연히 침식체와 승격자지.
아... 침식체, 승격자라.
우리는 예전엔 전부 인간이었고, 구조체였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인간들에게 도구로만 여겨졌던 기계도 각성을 거쳐, 우리처럼 감정과 마음을 가진 생명이 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억만년 동안 지구에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생명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해한 세균과 바이러스가 나타났습니다.
퍼니싱이 폭발하기 전에 이 생명들이 침식과 질병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다고 생각합니까?
...진화, 아니, 지금 선별을 말하고 있는 건가?
맞습니다. 보아하니 당신이 그들의 리더인 것 같군요.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는 생명은 살아남아, 더 저항력 있는 다음 세대를 탄생시키죠. 쇠약한 자는 언제 태어나도 썩어서 대지의 자양분이 되기 마련이고요.
생명은 선별 과정에서 진화하고, 이건 지구 본래에 존재했던 사명입니다.
오늘날, 침식체는 적조로 변해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죽은 자"의 양분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만듭니다. 그게 바로 퍼니싱, 승격 네트워크의 의지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별"은 대부분의 존재를 포기하는 걸 의미하지.
생명이란 잔인한 것. 그렇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죠.
본·네거트는 미소를 지으며 크롬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당신의 역원 장치는 다른 자들과 좀 다르군요. 아주 흥미롭네요.
발버둥치는 인간들이 가끔 눈에 띄는 것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빛은 너무 희박해 여러분에게 승리를 확신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 희망이 있는 한, 우린 그 약한 빛이 어둠을 비추는 날을 계속 기다릴 거다.
기다린다라, 으흠, 기다린다.
본·네거트는 이 글자를 음미하며 두 손을 뒤로 짊어졌다.
만약 퍼니싱이 변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이 작은 것들을 이용해 기다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간도 멈추지 않을 거다. 너에게 선별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판단된 사람들도 변화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 눈엔 그저 진보하려 하지 않고, 옛 것만 고수하는 모습뿐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고사하고, 일부 존재는 아직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조차 포기하지 않았죠.
이런 낡아빠진 문제들 앞에서 당신의 항쟁, 그 고집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그는 그 셋의 얼굴에 머문 시선을 거두며 약간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지하 수도 공간에서 먼지의 불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