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깊은 곳...
벌써...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롤랑이 구덩이에 앉은 채 파이프가 갈라져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적조를 바라봤다. 그의 곁에는 새하얀 이합 생물이 쓰러져 있었는데,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 떨어진 왼쪽 팔을 주워 잘려 나간 팔 쪽에 가져다 대며 확인했지만, 또다시 바닥에 내려놨다.
후, 안 되네. 이 옅은 구덩이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다니. 이렇게 꼴사나운 건 공중 정원의 그 녀석에게 쫓겼을 때밖에 없었는데.
전에도...이렇게 절망과 어둠에 뒤덮인 미래를 지닌 사람이 구덩이에 쓰러져 있는 걸 본 것 같아.
하지만 그때는 항상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입장이었지.
역시 이런 무모한 행동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모처럼 다른 사람을 믿어보는 거니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네.
루나 아가씨를 그레이 레이븐 곁으로 보내는 건...하나의 시작뿐이야. 이 다음은...제대로 계획해야 해.
이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차렸으면 좋겠네.
그전에...
그럼 일단은... 좀 자자.
롤랑은 적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취서체에서 잘려나간 몸 일부가 삼각형으로 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떤 거대한 힘에 옮겨지면서 그것이 기존에 뒤덮고 있던 것이 드러났다.
만신창이인 인간과 구조체가 서로 지키는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하하, 정말 처참하네.
기절한 루시아 앞쪽에 이상하게 비틀린 부분이 나타났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몸 위를 쓸면서 스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루시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칼자루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댔지만, 기체의 소모가 극한에 달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가 몸에서 새하얀 큐브를 가져가 버렸다. 큐브는 고요한 빛을 발하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제 임무를 완료했네.
...빨리 일어나야 할걸? 이곳은 곧 무너질 거야.
정말로 귀찮은 데다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협박당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
휴대한 통신 단말기에서 갑자기 신호가 연결됐다는 알림음이 흘러나오자 계속해서 무너져가는 암석 사이에 있는 인간이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루시아는 전에도 이처럼 상처투성인 몸을 끌고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나아간 적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기 위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쩌면 단지 믿고 싶을 뿐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아가면 누군가가 말한 유일한 희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시아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바로 루나가 취서체 코어를 파괴하자 엄청난 하얀 빛이 터져 나온 광경이었다.
그 후에는...어떻게 됐지?
여긴...
막 깨어난 루시아는 아직 기억이 뒤죽박죽 한 상태인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자신이 누군가에게 업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휘관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어서 내려주세요!
지원 부대에서 준비해준 동력 외부 코팅의 힘을 빌린 덕분에 루시아를 어떻게든 업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지휘관님도 심각한 상처를 입으셨는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루시아는 취서체가 이미 무너진 동굴에 묻혀버렸다는 걸 알았다.
루나는요...? 지휘관님, 루나는 어디에 있나요?
도망쳤을까... 아니면...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지만, 취서체의 폐허 속에서는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알아차린 것처럼 침묵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격하게 흔들리면서 발밑의 암벽이 또다시 무너지자 두 사람은 갈라져 버린 돌에서 떨어졌다.
지휘관님!
추락하는 루시아와 서로의 손을 간신히 붙잡았지만, 그 밑은 치명적인 적조였다...
이쪽이야!
밧줄이 하나가 날아와 루시아 곁을 스쳐 지나가자 궁지에 몰린 루시아는 그 구명줄을 급히 잡아챘다.
멀리 떨어진 플랫폼에 브리이타와 지원 부대의 대원이 있었다.
브리이타!?
로프총이야. 놀랐지? 이런 골동품은 중요한 순간에 쓸모가 있기도 하더라고.
나도 도울게. 빨리 끌어올려야 해...이곳은 곧 무너질 거야!
루시아...지휘관님, 괜찮으세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또다시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무너져가는 심연을 바라봤다.
루나...
하지만 마치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루나의 모습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지하 공간의 암석이 무너져 모든 사람의 시야를 가릴 때까지 그곳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