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지휘관님, 발 밑에 있는 게 마지막입니다.
주변의 침식체 반응이 모두 사라졌어요!
한숨을 돌린 후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엄청난 크기의 지하 공간이었는데, 곳곳의 공업 표시등이 어두운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곳은 어떤 공장의 생산 라인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도시 밖을 떠도는 침식체는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 것 같아.
……
루시아가 태도를 집어넣은 후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데, 드넓은 공간에서 그녀의 곤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식된 구조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난...
침식체의 사고 회로는 이미 퍼니싱에 의해 망가졌어. 잘못 들은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읽힌 정보 중에 공중 정원 구조체의 기억이 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그 안에 마침 관련된 데이터가 있었겠지.
네. 조금 전투 중에 얻은 침식체의 전자뇌에서 기억 데이터를 뽑아 쓸모 있는 정보를 걸러내 봤습니다.
적조의 근원까지 도달했으니, 더 이상 도시에서 대범위로 정보를 수집하면서 현장을 재현하는 걸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파오스의 창이 지닌 선별 기능을 활용하면 우리에게 쓸모 있는 데이터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리는 전투 중에 이미 정보를 분석하고 있었죠?
그래. 그게 효율이 더 높으니까. 게다가 전자뇌의 정보는 대부분 손상되었거나 무의미해서 얻을 때마다 멈춰서 살펴볼 수는 없잖아?
파오스의 창이 도와준 덕분에 읽고 분석하는 속도가 기존보다도 훨씬 더 빨라졌어.
리가 전자 스크린에 표시된 내용을 보여주면서 표시된 기억 데이터를 몇 개 가리켰다.
이 침식체들로부터 추출한 정보 중에서도 신경 쓰이는 것들을 골라봤습니다.
전자 스크린의 화면이 배속으로 재생되면서 리가 표시한 곳에서 멈췄다.
그래... 바로 그거야...
절망스럽고 증오스럽지? 그런 감정들이 너의 의식의 바다를 완전히 뒤덮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어.
으...아아아악!!
공중 정원은 더 이상 구조대를 보내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가 지키고자 한 사람들은 이미...
인간이 실망스럽지? 네게 충분한 힘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지금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거야.
너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곳을 알아. 널 배신한 인간들에게 지금 네가 느끼는 고통을 몇 백배로 돌려줄 수 있을 거야...
무슨 그런... 헛소리를...
구조체가 힘없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은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어 생체공학 피부가 떨어져 나간 후의 합금 골격만 남아 있었는데, 마치 두 손으로 단단한 암석이라도 판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폭발로 인한 큰 구덩이가 있었는데, 구덩이에 뻗어 있는 무언가는 이상하게도 구현되지 않고 데이터가 파괴된 것처럼 모자이크 허상만 보였다.
롤랑은 구덩이 옆의 순환액에 뒤덮인 돌 위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나쁘지 않지 않아? 더 이상 퍼니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그 힘을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롤랑은 무언가 엄청난 연출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들자, 퍼니싱이 손끝을 맴돌다가 구조체를 향해 흘러갔다.
이 좌표를 잊지 마. 네 의식의 바다에서 들끓는 감정을 잊지 마.
..."그녀"가 너를 이끄는 새로운... 등대가 되기를...
마치 적색으로 뒤덮인 기계의 바다 같았다.
엄청난 수의 기계와 구조체가 루나의 발밑에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몸에서는 퍼니싱에 침식된 후의 붉은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기계들은 무릎을 꿇고,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마치 미쳐버린 신자처럼 왕좌 위의 소녀에게 승격 네트워크의 힘을 갈구했다.
정말 어리석네...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자만이 퍼니싱의 힘을 지배할 자격이 있는데 말이야.
퍼니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품은 순간, 넌 이미 자격을 잃었어.
윽!!!
롤랑이 무기를 휘둘러 침식체를 손쉽게 두 동강 냈다.
……
승격 네트워크의 코어에 들어가 루나 아가씨의 힘을 직접 나눠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증명해야 해...
퍼니싱보다 더 잔인하고...퍼니싱보다...더 강력하다는 것을...
그래야만 퍼니싱의 주인이 될 수 있어. 알겠어?
루나의 손끝을 맴돌던 적색 전류가 조금씩 꺼지면서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의 얼굴이 일그러진 구조체를 바라봤다.
서... 성공했어... 승격자가 됐어!
퍼니싱을 지배할 수 있어! 이제... 동료들을 부활시켜... 다시 한번... 함께...
……
루나 아가씨... 감사합니다...
미친 듯이 기뻐하던 구조체는 루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서 이상이 느껴지면서 침식률이 빠르게 한계치를 돌파했다.
으...아아아악!!
어째서... 분... 분명 성공했는데!!
아아아아악!!
기체에서 퍼니싱 침식 경보가 끊임없이 울렸다. 승격 네트워크의 힘을 갈망하던 구조체의 눈은 서서히 빛을 잃었고,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인간... 죽... 인다...
……
루나는 눈앞에 일어난 모든 일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내리깔더니 조용히 일어섰다.
역시 실패인가...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애초에 그쪽이 선별한 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겠죠.
이번에는 아닐 수도 있잖아. 게다가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그 후에 일어나는 일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테스트 대상은 승격 네트워크가 선별하지만, 승격자라는 신분은 루나 아가씨만이 하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행자인 루나 아가씨의 판단에 의심을 품은 겁니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롤랑은 투항하는 것처럼 양손을 든 채 뒷걸음치면서 루나의 표정을 몰래 살펴봤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 여전히 담담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눈앞의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영상 속에서는 한 검은 머리의 소녀가 칼로 몸을 지탱한 채 폐허에 무릎 꿇고 있었다.
승격자가 됐다 해서 정말로 우리의 동료가 됐다는 뜻은 아니야.
지쳐서 행동 능력을 잃은 침식체를 바라보며 매우 아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승격 네트워크의 테스트는... 한 번 통과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은 아니니까.
롤랑.
네, 루나 아가씨.
루나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고통스러워하던 침식체의 움직임이 멎고 눈의 붉은 빛도 조용히 사라졌다.
루나는 손을 뻗어 영상 속의 소녀를 만졌다. 소녀는 인식표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치 영상 속의 소녀를 손에 쥐려는 것처럼.
...때가 됐어. 언니를 맞이하러 가자.
루나...
루나의 영상을 본 순간부터 루시아는 양옆에 내려뜨린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모든 침식체 잔해는 "승격 네트워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거네요.
미친 듯이 힘을 갈망하던 침식체는 관심을 받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며,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영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카로운 소리는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계속 외면해왔어요. 승격자가 된 루나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손을 루시아의 어깨에 올리자 리브도 루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루시아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흔들렸으나 곧 평소와 다름없이 되돌아와 모두를 향해 미소지었다.
리, 이 정보 중에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
……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로 추측하자면 "승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관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퍼니싱의 침식을 견뎌내고, 그다음 시험을 통과해 수격자가 되고, 마지막으로 "대행자"로부터 힘을 얻는다..
"대행자"인 루나만이 퍼니싱에 침식된 개체를 승격자로 만드는 능력을 지닌다는 건데..."대행자"가 과연 루나 한 명뿐인지가 문제에요.
네. 그들은 루나 세력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는데, 그럼 대체 누가 그들을 승격자로 만든 걸까요?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승격자 수와 폐허 속의 잔해 수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침식체가 승격자가 되는 성공률은 0.042%조차 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승격자가 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롤랑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동료를 모집해 이곳으로 이끌었나 봐.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승격자가 더 존재할지도 모르지.
게다가 승격 네트워크가 승격자를 여러 번 테스트한다면 승격자도 언제든지 침식체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지 않나요?
침식체로 돌아간다니...
그 "테스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황이니...
어찌 되었든 일단 이 자료를 공중 정원에 동기화해야겠어. 리브, 부탁할게.
루나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 이곳일지도 몰라. 내 추측이 맞는다면 다음에는...지원군이 필요할 가능성이 커.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