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 침식체를 쓰러뜨린 네 사람은 거리 끝에 도착했다.
데이터를 수집해 방금 표식한 롤랑과 그 소년을 선별해내.
목표 데이터 수집 중 [>>>>>>>>] 완료
데이터에 따라 영상 구축 중 [>>>>>>>>>>>>>>>>>>>] 완료
파오스의 창 시스템의 허상 영상에서 롤랑은 변함없는 미소로 그 소년 구조체의 목을 잡고 있었다.
뭐야? 이제 끝이야?
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네 바로 뒤에는 침식체가 모여 있으니 너 혼자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을걸.
그는 소년의 목을 잡은 채 그 뒤를 강제로 보게 했다.
침식체의 허상은 이미 파괴됐지만, 소년 구조체는 전의 기록과 다름없이 발버둥 치며 거리의 반대편을 바라봤다. 그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그 소년은 그곳에서 수많은 침식체가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거...놔...
네 지금의 몸은 한 방에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저항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무슨...말을...하는지...모르...겠...
목에 가해지는 힘이 갑자기 확 세지면서 목소리처럼 의식도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하...하아...
고통스럽지?
인간이든...구조체든, "승격"이 생명을 주입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같이 약해 빠졌어.
이거...놔...
뭐야. 이 지경에 되어서도 저항하다니, 그럼 네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서 답을 볼까?
빨간 전류가 롤랑의 팔에서 튀어나와 잡고 있는 손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소년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침식 수준이 높아지자 롤랑은 소년의 의식의 바다속의 기억 데이터를 손쉽게 뽑아냈다.
너...
조급해하지 마.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네 의식의 바다는 조각나버릴걸?
아...안 돼...
...그랬구나. 어머니가 널 팔았구나...하, 또 버려진 아이라니.
...뭐...?
너 같은 것들은 내가 많이 봐왔어. 모두 버려진 장기말이지만, "승격"의 세례를 받으면 똑같이 눈앞의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런 건 필요 없어...!
아무래도 넌 "올바른 신념"이라는 것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나 보네.
무슨!!!
소년 구조체는 롤랑의 말과 침식에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청소부와 함께 이곳에 왔다고 들어서 이쪽에 임무를 신청한 거였어?
기회를 엿봐 가족을 찾을 생각이겠구나? 하지만 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아직도 그렇게 젊으니 지금 만나게 되더라도 못 알아볼 가능성이 높겠는걸.
...그건...너랑 상관없어...
소년의 답을 들은 롤랑은 예상했다는 듯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년을 무너진 폐허로 던지고 힘겹게 발버둥 치는 그를 향해 웃으면서 다가갔다.
불쌍해 죽겠네. 구조체가 된 후로 너를 보살펴주던 선배도 중상을 입고 기체를 재가동했지. 그 때문에 기억 데이터를 잃고 다른 곳으로 전출되어버렸잖아?
그녀를 지킬 능력이 없어서 지금 이 꼴이 된 거야. 그녀가 없으니 남은 대원들도 널 괴롭히기만 하지?
소년 구조체는 이를 악물며 계속 심해지는 침식 속에서 최선을 다해 발버둥쳤다.
네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승격자를 대표해 네게 모든 것을 줄 수 있기도 해.
왜 널 괴롭히기만 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거야? 왜 힘들게 물자를 운반해 널 존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주는 거야?
그건 다 네가 약하기 때문이야. 승격자의 힘만 있으면 그 누구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힘이 있었다면 네가 존경하던 선배가 중상을 입고 모든 것을 잊는 일도 없었을 거야.
...승격자...?
그래. 승격자가 되는 거야. 너의 증오야말로 최고의 재능이야.
승격의 힘을 받아들이면 네가 증오하는 사람에게 복수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어.
정말로...그게 가능해?
물론이지.
...어떻게 하면 돼?
살아서 이곳까지 오면 돼.
롤랑은 소년 구조체의 손을 꽉 쥐고 좌표 정보 하나를 전송했다.
하...지금의 침식 수준으로는...아마...
롤랑은 몸을 숙여 그 소년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인 후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그 치명적인 적색 전류도 훨씬 더 약해졌다.
내가 말한 대로 해.
소년 구조체는 멍하게 제자리에 선 채 영상 스크린상의 지도를 바라보며 망설였다.
소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롤랑은 팔에서 통신이 알림음이 들릴 때까지 재난이 휩쓴 곳을 감상하듯 느긋하게 걸었다.
응? 문제없어. 방금 하나 해치웠던 참이야. 네 쪽은 어때?
...또 너 대신 일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나 보네.
뭐, 근면성실하게 일할 수밖에. 루나 아가씨 곁의 승격자가 아무리 바뀌어도 내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 이 덕분이기도 하겠지.
통신을 끊은 롤랑의 허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후 먼 곳을 향해 나아갔다.
다음은...믿음직하지 못한 신입 승격자들 대신 "씨앗"을 계속 찾아봐야지.
지금...신입 승격자라고...
그래. 이 기록은 아주 오래전의 것인 데다 그의 말투를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아무리 대체해도"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일행은 롤랑의 말을 고민하면서 제자리에 서 있는 소년을 향해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의 영상 스크린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대략 알 수 있어.
하지만 그 구역만 보일 뿐이에요...네비게이션 전체 화면으로 전환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 소년은 전체 화면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내린 채로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그 방향으로 가보죠.
그 소년은 결국 어떻게 됐을까요?
네, 제가 더 신경쓸게요.
왠지 좀 불쌍한 것 같아서요...
하지만 저도 알고 있어요. 그가 있는 그런 부대는 사실 수없이 많다는 것 정도는...
…………
리브가 손을 가슴 위로 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은 영원한 이별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죠. 이미 그런 거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익숙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 원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까.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해치는 한이 있어도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 치죠. 하지만 그건...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뿐이에요.
리브의 말대로 모두 지금까지 비슷한 일들을 봐왔다.
사람은 더 나은 삶이나 중요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또는 공을 차지하기 위해 나약한 자를 괴롭히고 자원을 약탈하면서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선량함이나 성실함 같은 본래 미덕으로 여기는 것들을 나약함으로 여겼다.
그래도 전 우리처럼 인연이 깊은 부대도 많다고 믿고 싶어요...
리브는 자기 생각을 확신할 수 없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인연이 깊은 부대는 많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
리의 말을 들은 리브는 슬프게 고개를 숙였다.
네...티파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일부 구조체는 기억을 삭제당하기도 한다고 해요.
네...전우를 잃은 기억 때문에 고통받지 않도록...직접 선택하게 하는 거예요.
부상자를 구조하는 몇 년 동안 그런 일들을 많이 봤어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버린 거요?
네.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대가 중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죠.
...대가...
루시아는 생각에 잠긴 듯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때의 전 기억을 잃을 준비를 했어요. 그보다 더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대가 중 그걸 선택한 거예요.
루시아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약속했잖아요. 그레이 레이븐 네 사람은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요.
그러니 전 반드시 전장으로...모두의 곁으로 돌아올 거예요.
루시아는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네요.
어디쯤인가요?
전의 루시아는 마치 칼처럼 임무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던 마다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날카로움에 부드러운 부분이 더해졌다. 마치 전부터 지니고 있던 "칼"이 그녀만의 "칼집"을 찾은 것 같았다.
칼집은 칼이 돌아갈 곳이죠...제게 있어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지휘관님이 바로 제가 돌아갈 곳이에요.
저도 루시아와 함께하는 게 기뻐요. 그레이 레이븐은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에요.
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세 사람 옆에 서 있는 루시아는 전의 홍련이나 여명 기체와 비슷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 속에는 상냥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알아차린 루시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지휘관님. 왜 그러세요?
네. 제가 가장 지키고 싶은 보물은 바로 그 약속이니까요. 그러니 전 더 이상 저 자신을 병기로 삼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예리함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거예요. 지키고 싶은 걸 위해서라도 계속 싸워나가야 하니까요. "칼집"속의 날카로운 칼처럼요.
네. 그래도 전 운이 좋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추억들도 잃지 않고 모두 제 의식의 바다에 안전하게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제 기억 데이터에 다시 익숙해져야 했지만요...그래도 지휘관님과 모두를 떠나는 것과 비교하면...그 정도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죠?
그래...
고개를 숙인 그녀의 두 눈이 앞머리에 가려져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휘관님에게는 역시 병기 쪽이 더 편리하겠죠.
...과거의 기억 데이터와 그 전투에 익숙해지면 기존의 저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지휘관님이 익숙한 그 루시아로요.
그러니...그때까지 더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해요.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루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 속에서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 고개를 들고 쓸쓸한 표정으로 눈앞의 거리를 바라봤다.
출발하죠. 지휘관님.
네?
네. 믿고 있어요.
그녀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희망과 단호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건 마치 반드시 정상에 오를 거라고 의지를 지닌 등산가가 산 밑에서 구불구불한 산길과 머나먼 정상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지휘관님. 저도 재난은 반드시 끝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날이 와도 우리 그레이 레이븐 네 사람은 영원히 함께일 거예요.
확실히 소대를 바꾸는 절차는 귀찮죠. 저도 다시 할 생각은 없습니다.
조용히 해주시죠.
단호히 말을 내뱉었지만 리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네!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금 출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