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날 밤, 슈렉의 코골이 소리가 울려 퍼지자 벨라는 통조림 하나와 과자 한 봉지를 챙기고 살금살금 방문을 나섰다.
저쪽 소년들한테 책이 있었던 것 같던데. 걔들한테서 책을 구해와야겠다.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자 벨라는 남은 물자와 <가면 라이더의 창조 전설>을 들고 두 사람의 임시 거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캔 하나로 바꿨어. 걔가 말처럼 귀한 물건도 아니더라고.
벨라는 옆에서 깊이 잠든 슈렉을 바라보다 가방에서 낡은 펜 한 자루를 꺼내 책의 마지막 표지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적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는 이미 수많은 재난을 겪었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어떤 재난도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끝까지 버티며 희망을 가지고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슈렉"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책을 덮고 가방 안에 넣었다. 슈렉이 깨어나면 그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슈렉은 벨라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진작 잠을 깼고 자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벨라가 잠이 들자 슈렉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 책을 꺼냈고 잔뜩 흥분한 채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책 표지에 벨라가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귀가 적혀 있음을 발견했다.
윽...정말 짜증 나네.
그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벨라의 펜을 들어 그 아래에 답글을 적었다.
"귀신도 안 믿는 그딴 글을 내 책에 적지 마!! 이 세상에 아직 희망 따위가 있다는 걸 누가 믿겠어!?"
그는 책을 배낭 안에 다시 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잠에 꿈나라로 향했다.
각자 밤을 지새웠던 두 사람은 점심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짐을 정리하고 떠나려던 찰나, 문 앞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이봐, 아줌마, 동생한테서 들었는데 아줌마한테 물자가 그렇게 많다면서?
나한테서 빼앗으려고? 아직 한참 부족해.
소년은 풉 웃더니 복도 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형, 우리가 아직 한참 부족하다네.
그는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벨라는 그제야 소년의 뒤에 8명의 성인이 숨어있었음을 발견했다.
공격해.
비록 상대방의 수가 월등히 많았지만 벨라와 슈렉의 전투 실력이 훨씬 뛰어났다.
양측은 좁은 방 안에서 3, 4분 동안 난투를 벌였고 그중 5, 6명은 벨라와 슈렉의 주먹에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의 세력이 두 사람한테 밀리자 소년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벨라를 향해 4발을 발사했다.
첫발은 빗나갔고 한 발은 소년과 함께 온 남자를 명중했고 남은 두 발은 벨라를 명중했다.
벨라!!!
총알은 그녀의 좌측 복부와 허벅지를 관통했다. 극심한 고통이 몰려오고 벨라는 바닥에 쓰러졌다.
저 남자를 잡아. 저 여자의 목은 내가 직접 벨 거니까!
소년은 총을 왼손으로 옮겨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꺼내 벨라를 향해 찔렀다.
발버둥치던 벨라는 총을 들고 있던 소년의 왼손을 차버렸지만 소년의 비수에 오른쪽 가슴을 찔리고 말았다.
소년의 손을 벗어난 총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했고 슈렉이 재빨리 총을 잡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총을 쏴 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안에 서 있는 사람은 슈렉 한 사람뿐이었다.
소년 청소부는 오른쪽 가슴을 찔렸지만 여전히 멀쩡했다. 그는 바닥을 기어가더니 비수를 들어 벨라의 경동맥을 겨누었다.
다가오면 이 여자를 죽여버릴 거야!
일단 벨라부터 놔줘! 안 그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
소년은 슈렉의 말은 무시하고 차갑게 웃더니 칼날을 더 깊게 들이밀었다.
내가 겁 먹을 줄 알고? 총 돌려줘! 물자도 전부 포장해!
네가 이 물건들을 옮길 수 있을까?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하,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동료들이 이곳으로 올 거야.
………………
왜? 무서워?
소년이 의기양양하게 웃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시간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이 여자가 살아있는 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면 아저씨가 만화처럼 변신해서 이 여자를 구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도 <가면 라이더>를 봤어?
슈렉은 청소부 소년과 잡담을 나누며 항복하는 척 천천히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응? 이 아줌마가 말 안 했나봐? 어제 이 아줌마가 가지고 간 물건이 바로 우리가 주운 만화야.
누가 그러더라고. 이 여자가 상업 구역의 두목을 꺾어버렸다고. 지금 분명 좋은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아줌마를 미행했어.
가면 라이더를 봤다니 대화가 통하겠네.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
아저씨는...지금까지 가면 라이더로 살아왔어.
하?
슈렉의 "바보 같은 말"에 소년이 흠칫하는 순간, 슈렉은 빠르게 총을 들었다. 소년의 비수가 그에게 꽂히기 직전, 마지막 탄알을 발사했고 소년의 가슴을 명중했다.
너...
말을 채 끝내기 전에 소년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벨라!!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얼른 지혈해 줄게.
하지 마...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으로 이렇게 깊은 상처를 치료하는 건 불가능해. 난 이미...
슈렉은 고개를 숙여 벨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의 우측 가슴, 좌측 복부, 허벅지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슈렉은 벨라를 질타하며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네가 살아가는 것도...희망이지...
슈렉은 과다출혈로 새하얘진 벨라의 입술을 보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은 너와 싸울 때가 아니야. 이제 곧 사람들이 더 몰려올 거야.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멀리 떠날 수도 없었고 한참을 고민하던 슈렉은 벨라를 업고 옥상을 올라가 쓰레기더미 뒤에 내려놓았다.
벨라를 내려놓은 뒤 슈렉은 빠르게 두 번이나 방으로 돌아가 다른 이들이 건물로 들이닥치기 전 모든 물자를 옥상으로 옮겼다.
오후의 태양이 먹구름 사이로 사라지고 옥상에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슈렉은 추위를 막기 위해 덜덜 떨고 있는 벨라를 꼭 안았다.
너 혼자서 떠나...너라도 안전하게 살아야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똑같은 말 세 번 하게 만들지도 말고!
우린 최상의 파트너야. 네가 없으면 내 생존 퍼센트를 얼마나 올려야 하는지 생각해봤어?
멀리서 번개 소리가 들려오고 지면에서 쿠르릉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것은 적조가 분사되기 전 나타나는 징조였다.
정말 미안하게 됐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슈렉이 무식하게 응급 처리를 한 탓에 그녀의 다리는 벌써 보라색을 띄기 시작했다.
하지만...넌 무조건 살아남아야 해...계속 살아남으면...언젠가 희망을 맞이할 수 있을 거야.
봄은 올 거야...네가 좋아하는 꽃도 다시 필 거야.
이런 상황에서 시낭송이라니!
불평 가득한 대사였지만 슈렉은 이미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 글자가 아니야. 네가 꽃잎을 책갈피로 쓴다는 건...진작 알고 있었어.
지금 진짜 꽃은 보기 드무니까...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날까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슈렉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계단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을 발견했어!
벨라는 아무 대답없이 슈렉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버리고 위기에 대응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입을 벙긋거리더니 가방 안에서 지금까지 숨겨온 책을 꺼냈다. 그리고 벨라 옆에서 빠르게 모닥불을 붙였다.
나 대신 이 불이 널 따뜻하게 지켜줄 거야.
말을 마친 슈렉은 비수를 들고 계단쪽으로 달려갔다.
………………
번개 소리가 구름층을 뚫고 울려 퍼졌고 폭우의 징조가 하늘을 메웠다. 바닥이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생겼고 그 사이에서 붉은색의 조수가 용솟음쳤다.
벨라는 허약한 모습으로 모닥불에 책이 타들어 가는 걸 조용히 바라보았다.
슈렉...넌 분명...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미지를 탐색하는 임무는...나한테 맡겨줘.
그녀는 슈렉이 떠나는 방향을 향해 살짝 웃더니 비틀거리며 건물 옥상까지 올라갔고 적조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