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의 지시에 따라 아이라가 건넨 송신기를 품에 넣은 채 계속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천문대의 정상에 이르렀다.
그곳은 별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전장 속의 경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발 밑은 풀 밭이고 옆에는 자홍색 꽃이 피어 있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몸에 강한 타격을 맞아 그대로 난간에 부딪혔다.
후후... 도망치는 것도 여기까지야.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아직도 저항하고 있지만 내 수하가 곧 끝장내겠지.
따라잡힌 게 아니라 네가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너에게 작별 선물을 주고 싶었거든.
곡이 망설임 없이 이쪽을 향해 온다. 칼날에 반사되는 빛이 눈을 찌르지만, 방금의 통증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눈앞에서 칼을 들었다.
이제 끝이야. 너도 지구의 역사가 되겠지. 공중 정원의 지휘관!
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아래 층에서 빠르게 뛰어든 누군가가 곡의 움직임을 막았다.
이어지는 검술에 곡은 뒤로 물러섰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차가운 입자를 튕겼는데, 그 입자들은 천문대의 정상에 있는 식물을 서리로 뒤덮었다.
이게 도대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지킨 건 검붉은 소녀였다. 그 뒷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는데, 이때 소녀가 이쪽의 불안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지휘관님, 괜찮으세요?
그 말보다 더 기쁜 건 없을 거예요, 지휘관님.
네. 루시아예요. 지휘관님의 루시아요.
일단, 지휘관님, 일어서실 수 있겠어요? 지금 제가 손을 뗄 수 없었어요.
그렇게 말한 곡은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고, 루시아도 손에 든 쌍도로 그녀에게 맞섰다. 외형은 비슷하지만, 공격 수단을 보니 홍련이 아닌 다른 기체였다.
루시아는 공격하면서 공중 기동력을 더해 곡과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곡은 도중에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칼을 휘둘러 루시아를 공격 범위에서 밀어냈다.
그러고 보니 지휘관님에게 새로운 기체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네요. 아우에요. 제가 도중에 생각한 이름인데, 나쁘지 않죠?
루시아는 자세를 다시 세우는 동시에 이쪽을 향해 기체의 이름을 전했다. 자기소개인데 이상하게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엿보였다.
얼음칼을 일단 등 뒤로 거둔 루시아는 다시 두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곡을 향해 치켜든다.
화서, 저 구조체는 도대체 뭐야!
확인된 구조체 번호는 BPL-01, 개체명 루시아.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정보가 아니야!
기체에 적응하기 위해 전투를 이어가면서 의식의 바다를 계속 초기화해나가고 있어.
뭐!?
양측의 무기가 부딪치자 루시아는 등 뒤의 제트 장치를 이용해 곡을 밀어내면서 곡이 든 장도를 부러뜨렸다.
그 순간 곡은 방어 태세로 루시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곡은 다른 손에 새로운 무기를 형성한 후 이쪽으로 던졌다. 하지만 루시아도 자신의 얼음 칼을 던져 전처럼 공격을 막아냈다.
더 이상 지휘관님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어.
쉽게 말씀드리자면, 저를 최초로 가동됐던 그때로 돌아가게 한다는 겁니다. 지휘관님,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나요?
그 인형 같은 저를...
이미 반을 잃었지만, 전투를 위해 아직 일부를 유지하고 있어요.
지휘관님, 이유를 묻고 싶은 건가요? 이처럼 의식의 바다를 초기화하지 않으면 이 기체를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너 이 녀석... 기체를 가동시키려고 자신을 죽인다는 건가?
저는 자신을 죽인 적이 없어요, 다만 새로운 자아를 택한 거죠.
그건 변명에 불과하다. 대체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길래, 네 영혼까지 버려가면서 그런 선택을 한다는 거야?
물론 그런 가치가 있죠... 당신은 당연히 모르고요.
내가 단순히 일시적인 재미로 너희들에게 손을 댓다고 생각하지 마!
우리 구룡은 퍼니싱 발발 후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해왔어. 지구의 운명을 추측하고 [만세명] 계획을 준비했지.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정의다!
네게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알 텐데? 아름다운 모든 것은 영원히 과거에만 존재한다는 걸!
당신은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는 겁니다!
양측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칼이 서로 스치면서 상대의 몸을 향해 베어냈다. 양쪽 모두 피하지 않고 오로지 받아내기만 했다.
하, 어차피 지구의 정해진 결말은 하나뿐이야. 눈앞의 너희들을 죽이고 내가 반드시 지구의 불꽃을 끌 거다!
당신에게 그럴 능력은 있나요?
게슈탈트, 한 시대를 창조한 동시에 지금을 유지하는 존재. 그것과 같은 근원의 AI로 너희 공중 정원의 모든 것을 지배하겠다.
공중 정원의 그 질량을 끌어내리면 지구 전체가 빙하기에 들어서겠지...
그리고 더 이상 우주로 도망칠 수 없게 될 거다. 남은 존재는 화서가 전략을 세워 제거할 테니, 그때가 되면 구룡은 유일한 존재가 되겠지.
진정한 [만세명]이 될 거다.
고작 인간 따위가 홀로 뭘 할 수 있다고!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냐는 사용자가 결정한다!
함께 그녀를 막아내요! 지휘관님!
루시아가 태도를 들어 올린 자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두려움이 없었지만, 거기에 상냥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