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려와.
무언가를 힘겹게 끌고 있는 롤랑이 조금 가파른 언덕을 넘었다.
등 뒤의 햇빛을 따라 무언가를 잡은 손을 잠시 내려놓고 가파른 언덕을 가볍게 뛰어내리자 먼지가 날렸다.
가파른 언덕을 넘은 롤랑은 다시 두 손으로 밧줄을 잡아 가파른 언덕 꼭대기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아——! 뭐 하는 거야! 아파——!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밧줄에 이끌려 가파른 언덕에 넘어져서 땅에 굴러 떨어졌다.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밧줄에 이끌려가다 가파른 언덕에 넘어져서 땅에 굴러떨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좀 놔줘. 이렇게 걸으면 불편하다고….
그럼 일단 설명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왜 나를 보자마자 첫 행동이 도망이었는지.
한참 전—— 적어도 롤랑이 라미아를 폐허에 버리기 전에.
(……?)
롤랑의 기억 속에서는 자신이 지하 수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지하수 밖 버려진 땅이 아니었다——
암흑.
롤랑을 감싸는 끝없는 어둠은 부드러운 양수와 같았지만 따뜻하지는 않았다.
롤랑은 자신의 머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머리가 원하는 만큼 돌아가지 않았다. 다른 부위를 옮기고 싶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이 부드러운 어둠에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아니, 소리가 나지 않는 것보다는 입이 느껴지지 않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롤랑은 막연히 어둠 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나타나자 이전에 발생했던 결말이 롤랑의 의식 속에 울려 퍼졌다——
마지못해 나한테 감사함을 표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나?
네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해.
정말 매정하네.
자, 이미 모든 지하 수로를 탐색했어. 그래도 여기에서 루나 아가씨를 계속 찾을 생각이야?
아직 남아 있는 일이 좀 있어.
그럼 행운을 빌지.
Hasta luego.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기억이 나지 않아.)
롤랑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손으로 만지며 자신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감촉도 전달되지 않았다.
(...젠장!)
(그 이후로...)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지? 내가 이 상태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롤랑은 자신의 이마가 은근히 아프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강한 고통이 그의 의식의 바다에서 재생됐다——
Hasta luego.
알파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롤랑의 망가진 척추는 상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롤랑은 등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눈앞은 캄캄했고 의식의 바다로 전달되는 신호는 소음뿐이다. 아무래도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다.
왼팔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니까.
적조에 잠긴 후 구덩이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많은 체력을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루나가 실종된 것을 알고 지하수로를 샅샅이 찾아다닌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절망적인 수색은 전부 헛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여기까지 생각하고 롤랑은 자신의 기체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대부분 파괴되거나 강제 종료됐고 아직도 가동 중인 것도 폐기가 멀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초라한 모습은 전 연령대 연극 무대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복잡한 기억과 이유 없는 생각이 가뜩이나 어수선한 생각을 흐트러뜨리자 롤랑은 고개를 흔들며 강제로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어떻게든 처리해야 돼... 적어도 루나 아가씨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기체를 보강해야 돼.
롤랑은 너덜너덜한 몸으로 지하 수로의 벽을 짚으며 한 발짝씩 간신히 밖으로 나갔다.
좋아. 계속 걸을 수 있어.
그래. 롤랑, 이런 곳은 막을 내릴 장소가 아니야.
한 걸음 걷기 위해 열 번을 쉬어야 해도 폐허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씩 더 깊어진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주위에 끊임없이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져 갔다.
'그들'이 남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처음의 선택을 후회해?
달갑지 않아? 이 슬픈 최후를 맞아서?
...후회하거나 달갑지 않은 게 뭐 있어. 좀 처참해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방금 전까지 다 계획 안에 있었어.
그것도 맞지. 거짓에서 시작된 삶도 잠시나마 진실을 얻었지.
다음 계획을 진행할 기력이 남아 있는 거야? 아직도 자신의 행동이 어떤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거봐. 이미 일어서는 것도 못하잖아.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거지?
시끄러워 죽겠네...
그러는 동안 그는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지만 바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순환액이 빠져나가면서 감각이 하나씩 멈추는 동안 롤랑은 내면의 그늘에서 오는 비웃음에 힘없이 반박했다.
...구조체가 죽으면 가는 디지털 천국 같은 게 있을까?
하지만 내가 갈 곳은 지옥이겠지.
다만 그에게 이제 그곳은 더 이상 언제 떨어져도 상관없는 장소가 아니게 됐다.
롤랑이 그렇게 생각할 때...
(응? 저게 뭐지?)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롤랑의 눈앞에 희미한 반점이 나타났다.
빛의 반점이 점점 커졌다—— 아니, 반점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롤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
롤랑은 잠시 당혹스러움을 느꼈지만 이내 그는 웃었다. 적어도 자신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식의 바다 손상' 증상은 전에도 들어봤지만 곧 죽을 자신에게 일어나니깐... 좀 웃기네.)
(이런 광경을 가브리엘에게 보여주면 기뻐할지도 몰라.)
(하지만 천사가 나를 데리러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빛은 아직도 롤랑을 향해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움직임이 느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정말 천국이란 게 날 기다리고 있을까?)
(지옥이면... 이 색깔의 지옥... 괜찮을지도 몰라...)
빛이 부드럽게 롤랑의 시야를 가렸고 롤랑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람의 소리,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 땔감이 불속에서 타오르는 소리가 마치 먼지투성이의 톱니바퀴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의 귀에 들어왔다.
………………?
그는 다시 눈을 떴다.
……
텐트였다.
롤랑의 시야에 나타난 것은 몇 개의 나무 막대기로 낡은 보자기를 받치고 있는 간신히 텐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보자기는 낡았지만 의외로 눈에 띄는 큰 구멍이 없었다. 다만 작은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그리고 롤랑은 텐트 아래에 누워 있었다.
...이건?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롤랑의 몸이 다시 통제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들었는데 성공했다.
이게... 뭐야?
원래 자신의 손과는 다른 구조로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만 다른 모습이었다.
의심을 품고 롤랑은 자신의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지려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왼손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도대체...
점점 깊어지는 의혹에 롤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체인 블레이드가 자신의 옆에 놓여있자 롤랑은 망설임 없이 체인 블레이드를 집어 들었다.
체인 블레이드는 평소와 똑같았다. 익숙한 무기를 손에 쥐니 롤랑의 기분도 조금 안정이 됐다.
누가 됐든... 지금은 적대적이진 않군.
적어도 몇 마디 나눌 수 있는 녀석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텐트의 연결 부분을 들어 올렸다.
응? 깨어났어?
롤랑의 눈앞에 나타난 건 불더미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이었다.
롤랑이 잠에서 깬 것을 발견한 듯 그녀의 머리는 롤랑 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자 아래에서는 희미한 웃음만 보였다.
깨어났어?
... 당신이, 자비로운 자?
...요즘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많아진 것 같아.
얼굴이 가려진 여성은 난감한 듯 웃었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응, 그들은 나를 '자비로운 자'라고 불러.
자비로운 자는 롤랑의 의문에 명쾌하게 대답했고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널 알고 있어.
'적군과 아군, 선과 악 구분 없이 평등하게 적임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라는 대행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적어도 롤랑이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한 명의 대행자만 그랬다.
비록 '수리'보다는 '재구성'에 가깝지만.
그는 천천히 손목을 돌려서 몸 구석구석이 원래 대로인지 확인했다.
왜 나를 구한 거야?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의 '못다 한 일'을 떠올리지.
하고 싶은 일 다 하지 못하고, 금기의 연구가 진리에 닿지 못하고, 만세의 평안이 보장되지 못하면...
'때마침 오늘 날씨가 좋아서', '오늘 아무렇게나 딴 풀잎 차가 의외로 단맛이 나서', '차에 이끌려온 쥐가 귀여워서'.
...'그럼, 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그래서 풀잎 차 마실래? 오늘 의외로 달아.
자비로운 자는 방금 마시고 있던 주전자에 담긴 차를 잔에 따라 롤랑에게 건넸다.
강요도 아니고 초대도 아닌 그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페이스에 따라갈 뿐이었다.
롤랑은 이상한 향기가 나는 잔을 받고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내가 구한 아이들 중에서 너의 반응이 가장 특별해.
나는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아니까.
'자비로운 자.'
...응?
'적군과 아군, 선과 악 구분 없이 평등하게 적임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준다.'
그렇다. 그 절망적인 수색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둠 속을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우연히 그녀가 알파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단순한 보강만으로는 치료될 수 없었다. 그때 알파를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도움'을 청했지만 당신이 정말로 응답할 지는 확실치 않았어.
지금 보니 내가 맞았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여성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돌아갔다.
똑똑한 아이야.
거짓말이라도 이렇게 침착하게 말할 수 있다니.
나는 황금시대 말기의 가장 권위 있는 배우니깐.
롤랑은 웃으며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과장된 인사를 했다.
오해하지 마. 나를 구해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워하고 있어.
내 목숨이 여기서 끝난다면 아마 세상은 재미 없어질 거야.
그건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될 거야. 특히...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흰색 아이를 위해서?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름이 '루나'라고.
비록 행방불명이지만 그녀가 너에게 준 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
가볍게 내뱉은 이 말이 그녀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했다.
그러나 롤랑은 루나의 이름을 듣고서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고 손에 든 체인 블레이드가 예전보다 무거워진 것 같았다.
내 인생을 들여다본 건가. '대행자'?
자비로운 자의 말에 롤랑은 경계했고 그는 손가락을 슬그머니 방아쇠에 올려놨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고는 다시 내려놨다.
역시 봤겠지? 그래서? 대행자로서 이것은 그녀와 루나 아가씨가 가진 권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더구나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을 봤으면서도 자신에게 적대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다.
이건 롤랑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응, 봤어.
보아하니... 넌 여전히 저 아이들처럼 막막해 하고 있군.
그래서?
이것은 네가 나에게 물어야 할 문제가 아닌 너 자신에게 물어야 할 문제야.
?
그리고? 어떻게 할 거야?
당신한테 물어보는 거야.
나?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
만약 내가 방해된다고 느낀다면 이곳을 떠나도 좋아. 아니면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면 내가 떠날게.
...당신을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어.
... 풉풉.
자비로운 자는 농담을 들은 듯 가볍게 웃었다. 이어서——
그래서?
롤랑은 자비로운 자가 왜 웃는지 이해했다.
... 그래, 그래서?
아무래도 상대방은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사람... 아니, 세 번째 기회를 준 사람이다.
당장 자신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눈앞의 자비로운 자 뿐이었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도 말할 기회는 지금 밖에 없을 것이었다.
롤랑은 갑자기 마음에서 뭔가 풀린 듯 입을 열었다.
루나 아가씨에 관한 일, 알파에 관한 일, 몇몇 승격자의 마지막 분열.
자비로운 자는 듣기만 하고 수시로 고개를 숙여 풀잎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롤랑의 말이 다 끝나서야 자비로운 자는 다 마신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풀잎 차는 왜 이렇게 맛있을까.
……
... 그래, 풀잎 차가 맛있는 걸 어떡하겠어.
롤랑의 움켜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풀렸고 그의 눈빛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사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
너 '자신'의 생각을 모르는 척하고 있을지도.
... 이해가 안돼.
나도 이해하는 걸 도와줄 순 없어.
자비로운 자는 나뭇조각 몇 개를 모닥불에 던져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땔감으로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땔감을 주우러 간 아이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당신에게 동료가 있을 줄은 몰랐어.
...동료가 아니야. 단지 그 아이와 같은 곳에 있을 뿐이야.
그녀의 발이 나보다 빠른 거 같아서 작은 일을 부탁했어.
아, 돌아온 것 같은데 안 그랬으면 불을 다시 피웠어야 했을 거야.
바스락바스락 발자국 소리 뒤에 헝겊으로 묵은 장작 뭉치를 짊어진 라미아가 롤랑과 자비로운 자 앞에 나타났다.
휴, 살았다, 드디어 왔네.
이것밖에 찾지 못했어요... 어?
...네가 왜...
롤랑과 라미아는 경악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라미아는 휙 돌아보더니, 서둘러 도망가려고 했다——
앉아, 라미아.
다른 사람 앞에서 갑자기 도망가는 건 매우 예의 없는 행동이야.
자비로운 자의 말에 라미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순순히 몸을 돌리고 다리를 꼬았다.
그렇지. 이래야 착한 아이지.
그리고 자비로운 자는 롤랑에게 돌아서서——
얘가 널 보고 도망가려고 하는 거 보면... 둘이 아는 사이야?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적대?
... 동료.
재밌네. 친구니까 뭔 일이 있으면 제대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비로운 자는 라미아가 놓아둔 장작더미에서 한 개를 뽑아내 조금 부러뜨린 후 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하지만 내가 말했듯이 우연히 너와 같은 곳에 있었을 뿐 날이 밝으면 난 떠날 거야.
…………
... 너에게 이미 여러 번 말했는데.. 그래도 몸을 숨기고 나를 따라오려고?
……!
너의 은신은 공중 정원이나 다른 승격자에게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아.
…………
라미아가 침묵하는 사이 아침 햇살이 구름과 산봉우리를 뚫고 비추어 텐트 그늘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날이 밝았네... 그럼 나도 가야겠다.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너희들의 문제는 너희들 스스로 해결해.
그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뭐 하나 물어봐도 돼?
?
왜 '자비로운 자'로 사람들에게 불리는 거지?
…………
분명히 다른 사람이 부여한 이름인데 왜 부여받은 사람한테 물어보는 거야?
몰라,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어.
점점 높아가는 햇빛이 숲을 넘어 아직도 잔잔한 온기가 남아 있는 모닥불 잔해를 비추고 있었다.
자비로운 자는 이미 떠났다. 그녀는 텐트를 거두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가져가지도 않았다.
롤랑과 라미아가 있는 텐트와 모닥불은 그녀가 가는 길에 '마주친' 것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
……
롤랑과 라미아는 서로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에 빠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두 승격자 사이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롤랑은 라미아가 승격자 작전 중에 잠시 잠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그는 눈앞의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라미아 또한 롤랑이 자신이 잠적한 것으로 롤랑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만은 롤랑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롤랑의 수법을 잘 아는 라미아에게는 지금 롤랑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아도——
——롤랑은 롤랑이이다. 라미아는 '그 롤랑'의 수법을 본 적이 있었다.
어쨌든 롤랑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라미아.
어?
말해봐. 왜 날 보고 도망치려고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