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39 블럭의 공장 구역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소대가 공장의 깊은 곳으로 진입함과 동시에 점점 더 많은 침식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아는 가장 선두에 서서 침식체의 몸을 갈랐다. 침식체들은 루시아가 칼을 거두는 순간 다시 그녀를 기습했다.
침식체의 공격을 발견한 루시아는 그 자리에서 점프를 했고 침식체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고 루시아의 기체를 스쳐지났다. 침식체들의 공격이 실패하자 그들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리의 총알이 그들의 전자 대뇌를 명중했다.
루시아는 바닥에 엎드린 채 기체를 안정시키고 있었다. 방금 전 날 기습했던 침식체는 이미 쓰러진 뒤였다.
리, 10시 방향 침식체 5마리가 천장을 따라 이동하고 있어요.
해치웠어.
리, 비켜.
루시아의 칼에 잘린 침식체의 잔해가 달려오고 있었다. 리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침식체의 공격을 피했고 나는 내 곁에서 분석에 집중하고 있는 리브가 침식체와 부딪히지 않도록 주먹을 휘둘러 침식체를 날러버렸다.
엥? 지휘관님, 지금 웃고 계시는 건가요?
뭐가 그렇게 좋으신데요?
흥, 또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칼날과 총알이 공장의 로봇들 사이를 가르고 침식체들의 잔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편, 공장의 생산 라인은 위협을 느낀 듯 생산 침식체의 속도가 대폭 상승했다. 새로 생산된 침식체로 구성된 강철 홍수가 생산 라인을 따라 주위로 흘러가며 눈앞의 모든 구조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루시아와 리는 명령을 받은 뒤 빠르게 전방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규모로 커진 침식체 앞에서 소대의 역량은 너무나 미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막고 있던 침식체들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칫.
수가... 너무 많아요. 게다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쾅——
이건...?!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좌측을 공격하던 침식체가 하늘에서 내려온 흰 빛에 잠식되었다.
원격 지원?
뒤이어 두 번째 빛이 하늘에서 또 내려왔다. 공장에서 돌아가던 기기들이 빛에 잠식되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뜨거운 기운에 밀려온 기계 부품들이 멤버들의 발 아래로 떨어졌다.
이 목표점은... 안, 안 돼!
지휘관님! 모두들!
리브가 높은 소리로 모두를 부르기 시작했다. 리브는 내 어깨를 눌러버렸다. 무슨 상황인지 묻고 싶었지만 주위에 연한 핑크색 자기장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지휘관님, 제가 함부로 움직였네요.
그래.
분홍색 역장이 점차 확산하면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전원을 감쌌다.
뒤이어 세 번째 흰빛의 역장이 위에서 떨어지면서, 겹겹의 물결을 일으켰다.
전원 폭발 구역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네 번째, 다섯 번째 수많은 흰 빛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며 더 이상 이동할 수 조차 없었다.
폭발음과 침식체들의 포효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방금 전까지 밟고 있던 지면은 폭발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뒤이어 쏟아지는 공격에 가루가 되어버렸다. 순간 몸이 허공에 붕 뜨고 흰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공장에 있던 모두가 바닥에 지하로 파묻히고 말았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파손된 외골격의 고통이 목까지 전해졌다. 생생한 고통이 대뇌 신경까지 전달되고 흐릿한 의식을 깨웠다.
두 눈을 떠보니 흰빛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고, 분홍색 역장도 점차 사라지면서, 짙은 어둠으로 주위가 뒤덮이게 됐다.
지——
————!
[player name]!
지——휘——!
부름에 대답하기 위해 난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들었지만 오른손이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행동 덕분일까 내 몸을 깔고 있던 바위가 손끝에서 흘러내리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밝은 빛이 어둠을 뚫고 시야가 점점 더 환해졌다. 리와 루시아의 다급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리, 지휘관님, 좌측에 갈림길이 있어요. 그쪽부터 시작하죠.
지휘관님, 드디어 찾았네요.
됐어요. 리브보다는 못하지만 응급 처치는 됐을 거예요.
외골격 보호 장치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리가 날 위해 응급 처치를 해주자 루시아가 날 천천히 일으켰다. 난 천천히 손발을 움직여 보았고 다행히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행이에요...
괜찮아요. 지휘관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
아직 못 찾았어요. 지금 검색 연산을 상상시키고 있어요.
한참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주위에 있던 공장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엉망이 된 폐허 뿐이었다.
높이 솟았던 건물은 평지가 되어 버렸고 폭발로 인해 지반까지 살짝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런 폭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 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펑——
이때 총알이 바로 내 발 옆을 적중했다. 세 사람이 고개를 들어보니 블럭의 끝에 아름다운 남성 구조체가 서 있었다.
침식체가 아니잖아?
테슈, 무기를 거둬.
테슈라는 이름의 구조체 뒤로 바네사가 아담한 여성 구조체와 함께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방금 전 폭발도... 전부 당신 짓이었군요.
뭐?!
그래, 우리가 한 거야. 이 정도 규모의 공격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모를거다.
사실 여기에 쓸 건 아니었는데 너희들의 실수 때문에 아주 귀한 폭발 기회를 이곳에 사용해 버렸어.
이봐, 난 너희들이 걷잡을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정리해 준거라고.
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는 거지? 게다가 그렇게 추악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니.
정말 비참하네. 테슈, 밤비나타 이쪽으로 와. 저렇게 더러운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바네사 곁에 있던 두 명의 구조체가 앞으로 나서며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바네사 사이를 막아버렸다.
그래서 뭐?
방금 전 폭발로 인해 너희들 팀 전체가 희생되었다고 해도 난 아무렇지 않았을 거야.
팀 하나의 목숨으로 전쟁의 승리를 바꿀 수 있다면 아주 합리적인 거래 아닌가?
테슈, 넌 어떻게 생각해?
..말씀대로입니다.
아주 좋아...
바네사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손으로 테슈의 아름다운 얼굴의 뺨을 내리쳤다. 공격을 받은 테슈는 무기를 꽉 잡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바로 손에 힘을 풀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마에 드리운 앞머리가 테슈의 두 눈을 가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널 때렸는지 알아?
모르겠어요.
야, 왜 몇 번을 가르쳤는데도 모르는 거야. 겉모습만 이쁜 쓰레기 같으니라고.
밤비나타, 네가 테슈한테 이유를 알려주도록 해.
첫째, 주인님의 질문에는 바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둘째, 주인님의 말씀은 영원히 정확합니다.
테슈는 방금 전 망설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아주 좋아~
테슈의 긍정적인 대답에 바네사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테슈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수석은 여전히 순진하다니까. 방금 전 그 말은 참 귀여웠어.
뭐가 널 이렇게 만든 거지? 퍼니싱인가?
참, 네 옛 동기로서 조언을 하나 하지.
지휘관 일은 그만두고 전선에서 떠나.
전장은 너처럼 순진한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니까.
서로 속고 속이고,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버리고 버림당하는 것이 전장 필승의 법칙이다.
그냥 공중 정원에서 지내. 백로 소대의 연락관이나 후방 보장 인원으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리브가 쫓겨났으니 리브의 몫이어야 할 자원도 너한테 줄 수 있어.
리브도 너처럼 순진한 자식이었지. 그래서 낡은 인형처럼 그렇게 버려진 거야.
뜨거운 피가 손바닥에서 흘러내렸다. 리브가 묶어준 붕대는 방금 전 폭발로 인해 전부 엉망이 되었고 총을 든 오른팔을 따라 바닥에 떨어졌다.
총구의 발열 시스템이 방금 전 총알이 발사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가늠쇠의 방향을 따라 바라보니 그곳에는 바네사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