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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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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반딧불이

달이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자, 먼 하늘에 어두컴컴한 은빛이 한 겹 입혀졌다.

노안이 태엽 반딧불이를 비틀어 손바닥에 놓았다. 그러자 부드러운 빛이 여명 전의 어둠을 몰아냈다.

노안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한 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난 정말 좁은 곳에서 살았어.

사람들의 침대는 바짝 붙어있었고, 여건이 좋은 사람들만 누더기 커튼으로 가릴 수 있었어. 대부분의 사람은 침대조차 없었지.

모두가 같은 공간에 모여 있다 보니, 자랑하고 싶은 거나 숨기고 싶은 치욕들...

사랑과 성, 증오와 싸움, 절도, 약탈, 사고, 살인... 보고 싶든 보고 싶지 않든 이 모든 게 눈앞에서 벌어졌어.

임산부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울며 아기를 낳았고, 환자들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갔어.

노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들어본 적 있어?

고슴도치는 겨울에 서로를 의지하며 체온을 유지하려고 했어. 하지만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가 다치게 했고, 너무 멀어지면 추위를 느끼게 됐어.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다른 이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해.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서도 안 돼.

하지만 그곳에 사는 모든 이가 서로 밀착해 살아가다 보니, 사생활도 없고 거리를 둘 수도 없었지.

그런 상황에서 "고슴도치"는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그래서 선배들은 항상 의견 차이를 인정하고, 자신의 태도와 목표를 숨기라고 말했었어.

그런 환경에서 난 다른 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다른 이가 보이기 싫어하는 일들은 무시하는 법을 배웠어.

어떤 사람이 특정 화제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면, 그 사람과는 그 화제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어.

그 사람이 상처를 잘 감추고 있다면, 알더라도 모르는 체했어.

노안은 평소처럼 앞에 있는 사람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반딧불이의 빛을 빌려 본 노안의 호박색 동공에는 어딘가 어두운 감정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난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고 갈망하는 것이 없는 성인이 결코 아니야. 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사람과 일이 있어.

다만 그 감정을 최대한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야. 어릴 적, 다 드러내서 손해 본 경험이 많았으니까.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지휘관이 나에게 많은 걸 말해줬기 때문이야.

교환하고 공유하는 건, 여행 상인의 습관이겠지.

어.

중요한 거 아냐. 그냥...

지휘관의 머리카락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길어진 거 같다고 말하고 싶었어.

요즘은 어떻게 지내? 잘 되고 가?

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지휘관을 바라봤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지휘관이 대화를 이어가길 기다렸다.

그래서 예전처럼 천천히 최근에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행복, 보고 싶지 않은 서류 작업, 번거로운 일정, 아직 실마리를 찾지 못한 조사 임무 등에 관한 얘기였다.

고민 외에도 소소한 기쁨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오래전에 예약했던 작은 선물을 받았다거나 단골 가게의 신메뉴가 의외로 맛있다는 것들이었다.

말하고 싶은 걸 다 말했을 때, 하늘은 이미 하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노안도 지휘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같이 기뻐하거나 고개를 숙이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이 정말 많았겠네.

노안과 가장 친하다고 할 순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지휘관의 제일 피곤한 상태를 봤고, 지휘관의 게으른 면을 받아들였다.

노안은 이런 비밀을 지켜주며, 남의 상처를 비웃지도, 이런 일로 장난치지도 않았다.

그에 관해 물어보면 그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있는 한 모든 것에 무감각할 수는 없어. 당연히 힘들거나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을 거야.

가끔 다른 사람들이 "영웅"이라는 단어로 지휘관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노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음? 갑자기 그건 왜?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웅, 보석처럼 찬란한 희망, 백전백승의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갈림길에서 날 찾아내 주었고, 항상 날 믿고 내 편에 서주는 사람.

그럼,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야기 하나 들려줄게.

이건 <잠자는 숲속의 공주> 동화를 각색한 만화인데, 원작 동화와는 달리 이 이야기 속 공주는 요정의 축복을 받지 못했어.

공주 주변의 요정들은 모두 인간이 변장한 거였어. 하지만 공주 주위의 다른 이들은 공주가 진짜 축복을 받았다고 믿었어.

그들은 공주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여성으로 성장하길 바랐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공주는 타고난 행운아였어.

요정의 축복을 받지 못한 공주가 어떻게 그런 과도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까?

그녀는 밤낮없이 노력했고 공부했으며, 인생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했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재능과 행운만을 찬양했어. 그리고 그 모든 성과를 당연하게 여겼고, 아무도 그녀가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마도 이게 내가 본 지휘관 아닐까? 그래서 내 답변은 "그 이상"이야.

인간의 영웅, 희망, 백전백승의 지휘관 그 이상의 존재야. 나한테 있어 지휘관은 날 믿어주고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그 이상의 존재야.

내 눈에 지휘관은 다칠 수도 있고, 지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에 가까워.

소중한 사람과 일을 위해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계속해서 발버둥 치는 그런 사람 말이야.

난 그런 사람이 좋아. 약점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현실감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게 네가 날 신뢰하는 증거이기도 해. 그렇지?

구조체든 인간이든 고통에 짓눌리고, 울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

음. 그 말은 어머니도 나한테 하셨던 말이었어. 그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어.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어머니에게 "하지만 눈물은 자신을 구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거야.

하물며 이야기 속 영웅도 자신의 아쉬움이 있는데, 우리라고 왜 없겠어? 그러니까 지휘관, 너무 무리하지 마.

음. 햇빛이 없는 밤에는 해바라기도 머리를 숙여. 그건 나약함이 아니라 마음이 무감각하지 않다는 증명이야.

슬플 땐, 언제든지 찾아와.

그리고 같이 도망가자. 휴식할 수도 있고, 큰소리 내며 울 수도 있는 그런 곳으로 말이야.

지휘관이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옆에 있어 줄게.

이야기 속 "왕자"는 드디어 성안에서 공주를 깨웠고, 100년 동안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게 됐어.

공주의 시간은 순식간에 "현재"로 돌아왔고, 그대로 상대의 품에서 죽었어.

그들의 시간은 서로 달랐지만, 이야기 밖 사람들은 여전히 지금을 소중히 여길 수 있어.

상처의 정도에 따라 슬퍼할 자격증을 딴 다음에야 괴로워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잖아?

이야기 속,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조차도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어.

좋아할 수 없는 사람들, 다루기 어려운 인간관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번거로운 업무와 집안일 등...

이 모든 것이 조금씩 정신을 소모하고 피로를 쌓게 만들어. 기쁜 일이 없다면 평범한 일상만으로도 한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슬퍼할 자격을 심사하는 건 너무 가혹하잖아.

하지만 나도 알고 있어. 여기선 지휘관이 신경 쓰는 일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편히 쉴 수가 없다는걸.

좋아하는 게 있어? 음식이나 꽃, 이야기 혹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사람들은 좋아하는 걸 위해 노력해. 그래서 편히 쉴 수 없을 때도 상대방에게 자신을 치료할 권리를 부여하지. 그러니까...

지치고 힘들 때,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물에 도움을 청해봐.

응.

노안은 새벽녘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허락받기 전까지 노안은 그 감정을 둘 사이의 한 걸음 너머로 조심스럽게 되돌려 놨다.

아침이 밝았어. 돌아가자. 지휘관.

물론이지.

일어선 노안은 지휘관과의 거리를 더 좁히더니 다시 몸을 숙였다.

괴로울 정도로 긴 3초 동안의 기다림 끝에 눈앞의 사람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노안은 그 사람을 꼭 끌어안았다.

그 순간 노안이 귓가에서 안도의 한숨을 쉰 것 같았다.

기뻐. 정말 기뻐.

새벽녘 햇살이 구름을 뚫고 지휘관과 노안 몸에 부드러운 금빛 테두리를 둘러줬다.

조금 더 있다 가자. 물어보면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되잖아.

기체 문제가 좀 해결되면 먼 곳으로 가보지 않을래?

선택지는 많아. 예전 교환상이나 수송 대장할 때 가봤던 곳이야.

자연으로 뒤덮인 폐허의 꽃바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거점, 오염되지 않은 시냇물... 이 황폐해진 세계엔 아직 사랑스러운 풍경이 많이 남아 있어.

물론이지. 약속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