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하늘에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몸을 숨긴 폐허 뒤편에서 롤랑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롤랑에게서 평소의 여유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롤랑과 수없이 대결하고 수없이 도망치고 숨는 동안 루시아의 기체는 마모되고 퇴색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진 전투는 롤랑의 몸에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흔적을 남겼고, 빗물에 씻겨 내린 모습이 꽤나 초라해 보였다.
난 정말...질렸어...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루시아! 이 근처에 숨은 거 알아. 그러니까 더 이상 숨지 마.
루시아는 고통을 참으며 무기를 입에 물고는 왼손으로 제복의 끝을 찢어 천조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천조각으로 무기를 자신의 손에 단단히 묶었다.
제복이 찢어지고 구조체의 인식표들이 루시아의 품에서 떨어졌다.
루시아는 천천히 두 눈을 감더니 몇 초 후 살짝 고개를 들어 인식표를 주워 목에 걸었다.
모든 동작을 마친 루시아는 벽에 기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건물 폐허에서 가브리엘은 새카만 우산을 들어 루나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주고 있었다. 우산 아래 루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롤랑과 루시아가 있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벌써 1주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언니를 사로잡지 못했어.)
(그렇게 성급하게 언니한테 승격자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어...)
(하지만 그동안... 난 언니와 여러 번 만났고, 그저 일시적인 혼란이라면...)
(아니면 언니는 기억을 잃은 적이 없고 퍼니싱에 대한 증오가 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선 걸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루나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롤랑과 루시아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려는 가브리엘마저 만류했다.
필요한 게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어. 가브리엘, 여기서 롤랑을 지켜봐. 롤랑이 제어가 안되서 자기와 언니의 기체를 다치게 하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수색을 거쳐 드디어 루시아가 몸을 숨긴 위치를 파악한 롤랑은 신중하게 루시아에게로 다가갔다.
이봐, 이렇게 더러운 곳에 숨고 싶어?
!
롤랑이 벽의 사각지대에 도착한 순간 루시아는 갑자기 벽 뒤에서 점프하더니 롤랑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 공격은 롤랑의 체인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미리 기습을 대비하고 있었던 롤랑이 탈진 상태인 루시아의 기습에 당할 리가 없었다.
조금 부족했어.
아쉽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네. 이제 내 차례야.
롤랑은 체인검을 휘둘러 루시아의 무기를 아래로 내린 뒤 온 힘을 다해 루시아를 향해 돌진했다. 그 충격에 루시아는 도로로 날라가고 말았다.
윽.
허리를 숙이고 숨을 헐떡이던 롤랑은 체력을 조금 회복한 뒤 루시아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롤랑은 절뚝거리며 도로에 쓰러져있는 루시아에게로 다가갔다.
드디어!
이제 피할 수 없어...
쓰러진 루시아는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무기에 의지하여 일어나려던 순간 롤랑의 총이 루시아의 머리를 겨눴다.
……
움직이지 마. 다음 총알은 다리를 부러뜨리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흐앗!
루시아는 온 힘을 다해 무기를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롤랑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선 뒤에야 롤랑은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롤랑이 다시 다가서기도 전에, 루시아는 이미 자기 심장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뭐야!
롤랑도 루시아의 성격이 이토록 강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언니!
칼이 기체에 닿는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루시아는 동작을 멈추었다.
……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루시아는 루나가 거리의 다른 한끝에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빗물이 그녀의 몸을 흠뻑 적셨지만 루나의 단단하고 도도한 분위기에 전혀 영향을 주지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와는 달리 루나의 표정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훨씬 더 쉽긴 하지...
하지만 우리 같이 살아가기로 약속했잖아...
바보처럼 언니 뒤에 숨어 언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던 동생이...
끝내 살아남아 지금 언니 앞에 서 있어.
그런데 지금 날 버리고 가겠다는 거야?
루나가 등 뒤에 숨겨두었던 인형을 꺼냈다.
낡은 개구리 인형이었다.
하지만 이 인형은 진짜가 아니야. 내가 근처 폐허에서 찾은 거야.
원래 가지고 있던 그 개구리 인형은...내가 떠나기 전 언니한테 남겨뒀으니까...
그 개구리 인형은 지금...
아직 가지고 있어?
루시아는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루나의 말에 루시아의 눈앞에는 어렸을 때 지냈던 성당이 또다시 펼쳐졌다. 여자아이와 무력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기억 속 흐릿했던 소녀의 얼굴이 루시아의 눈에 점점 또렷해졌다.
언니. 난 언제쯤이면 언니와 함께 나갈 수 있어?
...나가면 안 돼. 밖은 너무 위험해.
하지만 지금까지 언니가 날 지켜줬잖아. 나도 언니를 지켜주고 싶어. 아니면...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엄마, 아빠랑 약속했어. 널 절대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모험은 내가 해야 해.
어른이 되면 나도 나갈 거야. 나도 언니를 지킬 거라고!
루시아는 왼손을 뻗어 어린 시절의 루나를 만지려 했지만, 아무것도 닿지 못했다. 두 여자아이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현재의 루나와 루시아 사이를 지나쳐 갔고, 눈 깜짝할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루나...
루나는 드디어 루시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한 손으로 루시아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 루시아가 든 칼 손잡이를 잡았다.
루시아 언니...
루...
루나!
루시아는 마음이 무너진 듯 루나의 품에 안겨 통곡했다.
아——!
루시아는 가슴이 찢어질 듯 통곡했다.
연기, 전장, 인간, 퍼니싱 바이러스, 생존, 구조, 신뢰, 배신, 절망, 희망...
지금 이 순간 루시아는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평범한 소녀가 되어 마음껏 울기 시작한다.
가브리엘과 롤랑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서 있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끄러운 빗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언니, 이제 나도 언니를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까...오늘부터...언니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