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어스는 평소와 같이 실험실에 서 있었고, 오랫동안 봉인해 둔 철제 상자를 열었다.
밀봉된 스펀지 속엔 조용히 누워있는 섹스턴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각종 글씨로 가득 채워진 카드가 놓여 있었다.
와이어스는 그 카드를 집어 들고 이미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모든 글자를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안녕, 와이어스. 금방 갔다 올게.
빌
와이어스. 우리 막내. 슬퍼하지 마. 네가 논문을 다 쓰기 전에 실험 참가자를 결정한 건 박사님께서 잘못 하신 거 같아.
하지만 넌 아직 어리니까, 위험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넌 아직 여자 친구도 사귀어 본 적 없잖아. 형이 돌아가면 좋은 여자를 소개해 줄게!
안드레이
와이어스. 널 혼자 남겨두게 돼서 미안해. 하지만 박사님께서도 많이 고민하신 걸 거야. 꼭 지구에서 힘내야 해.
그리고 위가 안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네 수납장에 위약을 남겨뒀어.
내가 아는 사람 통해서 어렵게 구한 거니까 시간 맞춰서 꼭 챙겨 먹어.
나제
와이어스. 네 논문이 빨리 통과되기를 바라. 그리고 우리 돌아가면, 맛있는 거 사줘야 해!
구스타프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어. 다 술에 담겨있으니까. 언젠가 형이 술 한잔 사줄게!
양
와이어스. 무사히 졸업하기를 바라. 누나의 글솜씨가 별로라 많이 쓰지는 않겠지만, 우리 모두 널 사랑해.
안나벨
와이어스. 앞으로 네가 우리 캐논팀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야. 우리 박사님의 명예를 꼭 지켜줘.
그 옆팀 누구누구가 전에 널 놀렸었지. 빌이 그들에게 복수해 줬어.
영상은 네 이메일로 보냈으니, 보고 기분 풀어.
토마스
와이어스 동생. 네 앞길이 창창하기를 바라.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형이 네게 빌린 돈은 조금 미뤄서 갚아도 될까?
헨리
...
와이어스는 그 카드를 조용히 한 번, 또 한 번 읽고 난 뒤, 조심스레 자신의 상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결정을 내리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다.
와이어스는 침묵 속에서 빈 카드를 꺼내 새로운 문장을 썼다.
카레니나.
박사님께서 남겨주신 걸 너에게 줄 생각은 없었기에, 네가 이 글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언젠가 네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잘 처리해 주길 바란다.
그때쯤이면, 너도 나와 캐논 박사님의 관계를 알게 됐을 테니까.
박사님께서 이 섹스턴트를 내게 준 진정한 이유를 난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
하지만 난 이 섹스턴트로 가끔 달을 바라보곤 했다. 영원히 갈 수 없는 그곳을 말이야.
난 뛰어난 선배들에 비해선 평범한 편이었다.
그래서 난 마지막에 낙오하고 말았고, 홀로 남겨진 사람이 돼버렸다.
이건 내 인생의 한이자, 내가 영원히 메울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게 됐다.
난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과거에 계속 살고 있었다.
그리고 박사님의 재능과 통찰은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나도 박사님의 뒤를 이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넌 나와 달라. 넌 이미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했고, 네 세계는 내가 접한 것들을 넘어섰어.
나는 항상 네 마음을 닫으라고 네게 가르쳤지. 그건 약자가 도망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이야.
난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난 매우 약하지만, 약한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길이 있어.
그리고 난 믿어. 네가 이 글을 볼 때쯤이면, 넌 충분히 강해져 있을 거라는 걸.
그 강함으로 더 넓은 세상에 당당히 서 있을 거라는 것도 말이야.
...
생각지도 못했어. 와이어스가 이런 말을 쓸 줄이야. 소름 돋을 뻔했네.
지금에서야 이걸 보니 뭔가 많은 생각이 드네.
달 표면 기지에서의 사건이 끝난 후, 카레니나도 자기 할아버지가 그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됐다.
카레니나는 그 실험을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미래를 위해 싸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가 와이어스를 그 실험 프로젝트에 넣지 않은 건, 달로 가는 여정이 돌아올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을 거야.
할아버지께서 젊은 제자의 삶이 그 나이에 멈추는 걸 견딜 수 없었을 거니까.
와이어스의 선배들도 다 각오했었겠지. 그래서 가장 어린 막내를 남겨두고, 가장 위험한 곳을 스스로 간 거야.
결국, 와이어스는 이해하지 못했던 건가요?
아니. 와이어스는 이미 이해했을지도 몰라. 근데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 거야.
그건 기술자들의... 과학자들의 고집이야. 이 부분만큼은 나도 이해할 수 있어.
자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자기 나름의 선택을 했던 거야.
이제 와이어스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는 건 별 의미 없어. 그건 예전의 일이니까.
난 이미 신경 쓰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맞지 않네.
신경 쓴다 해도 소용없다는 거죠?
응. 맞아.
이 섹스턴트는 어떻게 할까요? 가져갈까요?
카레니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이걸 가져가지 않을 거야.
함교의 창가로 걸어간 카레니나는 광학 패널을 해제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한없이 깊고 넓은 우주 아래, 행성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태양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고, 그 빛이 카레니나의 옆모습을 비췄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기 위해서 기준이 필요해.
태양이 있기에 지구는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고, 지구가 있기에 달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어.
두 물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런 방식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어.
할아버지가 와이어스에게 이 섹스턴트를 남긴 건, 이런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는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 38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두 지점에 있더라도, 이 작은 장치가 그들을 연결할 수 있다는걸.
그래서 언제나 자기 항로에서 벗어나지 않게, 폭풍의 영향받지 않고 항상 곧게 나아갈 수 있다고 말이야.
그리고 이 모든 건 "중력"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거야.
...
고개를 숙여 섹스턴트를 한참 동안 조용히 바라본 카레니나는 결국 시선을 돌려 비앙카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에겐 섹스턴트는 필요 없어.
왜냐하면 나에겐 너도 있고, 테디베어도 있고, 정비 부대의 대원들이 있으니까...
루시아도 그럭저럭 포함할 수 있고... 그리고.... 그 지휘관도 있어.
너희들이 있기에 난 내 위치를 확인했고, 더 이상 방향을 잃지 않을 거야.
너희들이 있어서 내 마음의 형태를 또렷하게 볼 수 있어.
이 섹스턴트는 기초 교육 센터나 예술 협회에 보내줘.
요즘 어린아이들은 섹스턴트를 본 적도 없을 거야. 게다가 이건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거라, 분명 많은 사람이 소장하고 싶어 할 거야.
그러니까 비앙카, 나 대신 이걸 아이라에게 전해줘. 그녀라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보다 잘 알 거야.
알았어요. 제가 갖다줄게요.
카레니나. 확인 결과 나왔어. 일하러 가자.
정비실의 문이 열리고, 테디베어가 들어왔다.
오? 손님이 있었네? 너도 카레니나가 불러서 도와주러 온 거야?
아니요. 전 오히려 여러 면에서 카레니나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저... 정말이야?
물론이지! 날 어떻게 보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대장이 될 수 있었겠냐고? 안 그래. 부, 대, 장?
그럼, 혼자서 이 일을 처리할 수 있겠네? 난 대원들 데리고 먼저 돌아간다.
아니. 안돼. 장난이야! 장난을 왜 그렇게 진심으로 받아들여?
카레니나는 다급히 테디베어의 옷소매를 붙잡고, 그녀와 함께 정비실을 나서려고 했다.
가자. 빨리 처리해서 지휘 센터 대원들에게 우리 정비 부대의 실력을 보여줘야지.
기존 규정 잊지 마. 임무 끝나고 다들 밥 사 주기로 했잖아.
알고 있어! 비앙카. 너도 그때 와. 어차피 내가 쏘는 거니까.
그럼,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겠죠?
그들은 복도에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비앙카는 카레니나와 테디베어가 나란히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언제부터인지 카레니나의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레니나의 세상은 이미 넓어져 있었다.
앞으로 모두 바빠지겠네.
그리고 카레니나는 자신이 선택한 미래의 길을 단호하게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