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기억의 회랑 / 심연에서 선택한 길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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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하늘과 습한 공기 그리고 주변엔 숨 막히는 녹슨 냄새가 가득했다.

번개가 구름을 찢고 지나가자, "상처"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비였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폭우였다.

색 바랜 긴 머리를 적신 빗물이 인공 섬유를 타고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선을 흐리게 했다.

폭우 속에서 무작정 걷다 보니 조금씩 높아지는 수위도 눈치채지 못했다.

귓가에 어렴풋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고여있는 물 같은 의식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목소리의 방향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모호해진 옛날의 기억이 시간의 궤적을 이었다.

???

당신이 바로 훈련 성적 3위인 루시아인가요? 망했어요. 무롤. 우린 둘 다 발목이나 잡을 거 같은데요.

이날은 루시아가 소대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첫날이었다. 듣기론 이 소대는 모두 새로운 대원으로 구성된다고 했었고, 소대 명은 그레이 레이븐이라고 했다.

루시아가 배정된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 온 지 오래돼 보이는 구조체가 둘 있었다.

진, 어서 조용히 해요. 루시아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게 안 보여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무롤이고, 입에서 개소리만 하는 자식은 진이에요.

이제부터 우린 전우예요. 지구를 탈환하는 그날까지 잘 살아 봐요.

오늘이 합류 첫날인데 그렇게 정색하며 무거운 말을 하지 좀 말아요. 너무 불길하잖아요.

진, 무롤, 만나서 반가워요. 우린 지구를 탈환하는 그날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루시아 당신까지 왜 그래요. 다른 걸 생각할 수는 없어요? 예를 들면, 나머지 보조형 대원이 어떤 구조체일지 궁금하지 않나요?

나머지 대원이요?

루시아의 얼굴에 의문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엘리트 소대는 기본적으로 3인 구성에 지휘관 1명이 표준이었기 때문에, 4인으로 구성된 소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 루시아는 모르고 있었나요?

방금까지만 해도 신이 났던 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계속 휘두르던 손도 허공에서 멈췄다.

숨길 것도 없네요. 사실 저와 진은 훈련소 통과 표준을 간신히 넘을 정도로 개인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와 진의 협동 능력을 좀 더 중요하게 보신 지휘관님이 저희를 받아 주셨어요. 그런 다음, 상부에 아는 분을 통해서 정원 한자리를 더 늘리셨어요.

그렇게 말한 무롤은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상부든 지휘관님이든, 저희 두 "꼴찌"를 하나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 같아요. 그리고 루시아도 우리 소대 소속이니 어느 정도 실력을 맞춰야 한다고 판단하셨겠죠. 하하하.

지휘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루시아는 위로를 잘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상대의 비관적인 자조를 한마디 정도로만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

여기가 그레이 레이븐 휴게실인가요? 당신들이 앞으로 제 동료인 건가요?

문 앞에 한 구조체가 차분한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구조체는 답답한 분위기에 어안이 벙벙한 듯 잠시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제 이름은 헤론이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보조형 구조체예요.

문패에 적힌 글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방 안으로 들어온 헤론이 자기소개를 했다.

어, 아저씨였어요?

구조체가 됐는데, 나이에 의미가 있나요? 어딘가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우리보다 나이 많은 구조체가 존재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왜 다들 억지로 야채 주스 먹은 것처럼 울상인 거죠?

아, 간단하게 말하면...

진의 두세 마디 설명을 통해, 헤론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들을 소대에 들어오게 하신 분은 레븐쉬, 즉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이 직접 신청하신 거예요. 단순히 수를 채우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개인적으로 지휘관님과 친분이 있거든요. 제 딸을 치료하는 의사도 지휘관님이 찾아주신 거예요.

참, 제 딸 얘기가 나온 김에 귀여운 제 딸 사진 보실래요? 어제 새로 찍었거든요.

헤론은 자기 딸 얘기가 나오니 무슨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열정적으로 변했다. 유쾌한 진도 헤론에게 기가 눌릴 정도였다.

그래도 헤론 덕분에 답답한 분위기도 걷히고, 루시아 마음속 팽팽했던 줄도 느슨해졌다.

그리고 루시아는 헤론이 말한 레븐쉬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 레이븐의 멤버들은 레븐쉬라는 남자를 만나게 됐다.

레븐쉬

내가 바로 너희 새로운 소대의 지휘관이다.

내 팔? 그건 내가 전에 실수를 저질러서 그런 거야. 내 지휘 실수로 팀이 전멸했었다.

침식체가 된 대원이 내 팔을 잘랐고, 나도 그 대원을 직접 처단할 수밖에 없었지.

난 그들을 증오하지 않아. 기계 팔은 내가 범했던 실수를 상기시켜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힘을 쓰게 해 줘. 난 너희가 바친 힘마다 합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해줄 거야.

무롤, 진, 너희 둘은 내가 협력시켜서 2명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할 거다. 너희들을 깔보는 이들이 "꼴찌"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게 만들겠어.

헤론, 네 딸은 내가 잘 아는 의사한테 부탁해 놓을게. 그곳의 조건이 생명의 별 공공 병실보다 훨씬 좋으니까. 그리고 비용도 걱정하지 마. 네가 그레이 레이븐에서 일하고 있는 한 받을 자격이 있어.

루시아, 방황할 필요 없어. 그레이 레이븐이 바로 네가 있을 곳이다. 우리만이 널 배신하지도 버리지도 않을 거야.

그리고 널 그레이 레이븐 소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싶어.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는 거 알아. 일단 이유는 묻지 말고, 내 얘기를 들어 봐.

헤론은 이전부터 나와 아는 사이야. 하지만 임무 중에 사적인 친분이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어. 그러니 대장으로 적합하지 않아.

진과 무롤은 최고의 집행자야. 그들 중 누구 하나 빠지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어. 그러니 그들의 의견은 중요한 참고가 되겠지만, 결단을 내리기엔 적합하지 않아.

루시아, 난 네 자료를 봤다. 네 현장 대응 능력과 판단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최고야. 그리고 난 제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인간의 육체로 너희들과 함께 전장에서 활약하긴 어려워. 그리고 안전 공사에서 내린 명령은 지연되기 마련이지.

솔직히 내가 널 데려오기 위해서 선수 치지 않았다면, 정찰 부대 사람들이 먼저 널 데려갔을 거야.

그러니 대장에 제일 적합한 건 너야. 내 이유는 여기까지다. 다른 의견 있나?

없나 보네. 그럼, 그레이 레이븐 소대, 3일 후에 수행하는 첫 임무의 준비를 시작한다.

진지하지만 다소 비관적인 무롤, 유쾌하지만 명성에 신경 쓰는 진, 차분하지만 딸만 꺼내면 냉정을 잃는 헤론, 전력을 다하는 듯한 레븐쉬 그리고 오랜만에 소속감을 느끼는 루시아.

이렇게 5명으로 구성된 그때의 그레이 레이븐 소대. 그들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으윽... 삐삐삐.

미안해요. 루시아... 미안해요. 진... 무롤...

레븐쉬

헤론 그리고 루시아, 왜 얌전히 죽어주지 않는 거야?

총소리와 극심한 통증이 잇따라 전해졌다. 장대비도 새빨갛게 변했고, 모호한 감지 속 전류의 잡음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

인간들은 널 배신했어. 그들은 믿을 수도 없고, 도와줄 가치도 없어.

넌 전부를 바쳤는데 뭘 얻었지?

돈? 명예? 마음의 만족?

아니, 난 그런 걸 위해서 전투하는 게 아니다. 내가 구조체가 된 건...

???

더 많은 사람의 희생을 막기 위해선가?

동포를 지상에 남겨두고 혼자 도망가는 게, 그게 바로 인간이야.

지구를 탈환하겠다고 너희들을 수술대와 전장에 보낸 것도 인간이야.

희생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들뿐이잖아?

……

???

아니면 루나를 위해서야?

롤랑, 가브리엘, 너희들은 일단 물러나 있어. 언니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

루나 아가씨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감동적인 재회네요. 그럼 관계없는 자는 이만 물러날 테니, 즐거운 대화를 나누세요.

커다란 로봇과 미소 가면을 시종일관 쓴 구조체가 떠나면서, 완전히 변해버린 자매에게 텅 빈 대지를 남겨줬다.

루나, 너 지금...

맞아. 언니. 난 이미 퍼니싱에 침식됐어. 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맞지 않는 거 같아.

승격 네트워크의 선별을 통과해서, 퍼니싱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것 같아.

적색의 전광이 루나의 은백색 기체를 스쳤다. 이미 많은 침식체들과 교전했던 루시아는 적색의 전광이 낯설지 않았다. 그건 고농도 퍼니싱이 논리 전기회로에서 만들어 낸 특별한 전깃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루시아는 타는 듯한 익숙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눈앞의 퍼니싱이 루시아에게는 공기처럼 아무런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롤랑과 가브리엘도 선별을 통과해서 승격자의 일원이 됐어.

그 인간이 연결하려고 시도했던 구조체도 그랬어. 언니...

지금의 언니도 마찬가지야.

……

그 승격자를 알아?

아니. 난 상대방을 몰라. 선별에 통과된 승격자가 모두 같은 단체에 속하는 건 아니야.

우리의 목적이나 선별 추진 방식도 모두 달라서 보통은 서로 접촉하지 않아.

그 승격자가 언니 소대와 접촉한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 승격자가 어디 있는지 알아? 너도 현장에 있었어?

나도 후에 현장에 있던 침식체의 기억체에서 그 장면을 읽어낸 거야.

침식체의 기억체를 읽는 것도 승격 네트워크가 부여한 능력이야?

루나, 그날 공중 정원 사람들을 따라가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 일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려줄게. 사실 요 몇 년 동안 난 언니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어.

오랜만에 재회한 따뜻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루시아와 루나에게 있어서 이별 후의 경험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명은 배신으로 계속 증오와 공포의 길을 걸었고, 다른 한 명은 씁쓸한 결말이 찾아올 때까지 거짓말에 속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더 빨리 데리러 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괜찮아. 이젠 헤어지지 않아도 돼. 내가 언니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 거야.

???

그녀도 너와 비슷한 피해자야.

이제 언니로서 그녀의 소원에 응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건 바로 퍼니싱이다. 엄마, 아빠, 루나... 퍼니싱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

퍼니싱은 인간의 무모함이 불러들인 벌이야. 그리고 너희들은 이 잘못된 결정의 피해자일 뿐이지.

피해자인 너희들이 왜 잘못된 결정을 한 사람 대신 잘못을 만회해야 하는 거지?

네 진짜 소원이 뭐야?

난...

루나

언니, 이제 난 언니를 지킬 수 있어...

???

소원을 이루려면 뭐가 필요할까?

약자는 소원을 이룰 수 없고, 미래를 선택할 권리도 없어.

날 완전히 받아들이면, 너에게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줄게. 넌 그런 자질이 있어.

루나

그러니 오늘부터 언니 자신으로 살아.

잡음이 조금씩 뚜렷해지면서 루나의 음색과 겹쳤다. 그리고 루시아는 다시 휴면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도 루시아는 그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언니, 좋은 아침이야. 오늘은 어때?

은백색 기체는 루시아의 곁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이별할 때보다 루나의 기체가 상대적으로 많이 자란 것 같았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루나의 미소에서 익숙한 느낌을 찾을 수 있었다.

루나, 나 이번엔 얼마나 휴면했어?

한 시간밖에 안 됐어. 전보다 많이 짧아졌네.

이제 막 선별에 통과한 언니가 아직 승격 네트워크의 힘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이건 지극히 정상이야.

괜찮아. 언니가 이 힘에 익숙해지고 장악할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

추억에 잠긴 기색이 역력한 상대방의 표정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예전엔 항상 언니가 날 가르쳤는데, 이젠 나도 언니를 도울 수 있어.

정말로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루시아의 마음속에서 의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루나처럼 주변의 퍼니싱을 제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적색 번개가 번쩍이더니...

(윽...)

승격자가 됐지만, 루시아가 무의식적으로 이 힘을 배척하는 동시에 이 힘도 루시아를 배척하고 있었다.

맞부딪친 검처럼 남은 건 상처뿐이었다.

루시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바닷속 찌르는 듯한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 그리고 적색 번개는 낡은 군복에 검게 그을린 자국을 남겼다.

또 그 소리가 들렸어. 루나. 너도 그 소리가 매일 들리는 거야?

난 가끔 들려. 무시하면 금방 사라질 거야.

루시아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가장 가까운 이에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 뿐 발성 장치를 통해 전해지지는 못했다.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됐지만,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었다.

음, 언니는 아직 선택하지 못해서 들리는 내용을 나한테 말할 수 없는 거야.

괜찮아. 여기에서 언니를 핍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언니는 하고 싶은 선택을 천천히 해도 돼.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

선택... 인간의 적이 되고, 자신이 맞서 싸웠던 것의 졸개가 되는 선택 말인가?

루시아는 마음속 의문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쩌면... 우린 이미 인간의 적일지도 모르죠.

루시아가 일어섰다. 오래 잤던 루시아지만, 지금은 깨어 있는 것에 시달리고 있었다.

언니는 오늘도 나가서 걸을 거야?

응. 나 혼자면 돼.

……

알겠어. 근처에 공중 정원 부대가 있으니 조심해.

난 이곳에서 언니가 돌아오길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