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된 공장
141호 도시 교외
위태로운 상태였던 이 지역은 그윈플렌의 자폭으로 마지막 지지대마저 잃고 말았다.
지진처럼 흔들리는 바닥과 쏟아지는 낙석을 피해 지휘관은 제타비와 함께 공장을 빠져나왔다.
수많은 침식체들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쳇.
알았어. 알았다고~
제타비가 공격 출력을 최대로 조절했고, 이어서 눈앞에 붉은빛이 번쩍이더니, 주차된 차량 주변이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지휘관과 제타비는 트럭 앞뒤에 자리를 잡았고, 제타비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화력으로 길을 뚫었다.
인간 지휘관도 그녀의 공격에 맞춰 수류탄을 던지며 혼란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은 학원이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니 아직 많은 침식체들이 학원 외곽에 모여 있었다.
공장을 무너뜨렸는데, 이 성가신 것들은 왜 아직도 이렇게 많은 거야!
지휘관은 핸들을 거칠게 돌리며 달려드는 침식체들을 간신히 피했다. 그때 이어폰으로 들어오는 통신 신호를 급히 받았다.
보아하니 공장 쪽 사태는 이미 해결된 것 같네요.
G227 소대 지도를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차량으로 주변을 돌면서 그들을 유인한 뒤, 지도에 표시된 탑 아래로 들어가 주십시오. 거기에 폭탄을 설치하고, 그걸로 한 번에 처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너희가 할 수 있어? 집행 부대는 손 뺄 여유가 없어 보이던데.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제타비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 톤이 갑자기 올라갔다.
55호, 57호...
학원의 높은 장벽에서 몇몇 그림자가 뛰어내렸다. 살짝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기운은 넘쳐 보였다.
그들은 트럭에 있는 제타비에게 손을 흔들면서도, 가방 뭉치를 안은 채 탑을 향해 계속 달려갔다.
하늘이 선택한 자, 도와줘!
지휘관은 액셀을 밟은 채 한 손으로는 핸들을 붙잡고, 제타비와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요란한 총성이 울리자,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침식체 무리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리, 그들한테 시간이 얼마나 필요해?
한 바퀴면 충분해요.
알겠어.
차량과 탄띠가 길 위에 우아한 호를 그렸고, 연기와 먼지는 침식체 무리를 휘감았다.
이내 차량이 돌더니 탑을 향해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이어폰 공개 채널에서 리의 지휘가 들렸다.
탑에 있던 소대 전원이 후퇴했습니다. 지휘관님께서는 카운트다운과 관계없이 탑을 통과하시면 됩니다.
엔진 소리가 커지면서 제타비의 불만스러운 투덜거림을 덮었다. 그러자 차량이 사전 설정한 선을 넘어섰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백미러에 리만의 특유한 공격이 유리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비쳤다.
잠시 후, 높은 탑이 무너져 내렸다.
55호와 57호가 보여!
지휘관의 말이 제타비에게 전해지기도 전에, 그녀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무너지는 탑을 향해 달려갔다.
지휘관은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아 천천히 탑 아래로 돌아갔다.
차 문을 열자, 폐허 위에 서 있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노을이 잔해 사이를 떠도는 먼지에 따스한 붉은 빛을 물들이고 있었다.
제타비는 한 학생과 열정적으로 대화하다가, 브레이크 소리를 듣고는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빠르게 달려왔다.
하늘이 선택한 자, 다행이야. 그 여자와 아이비그 둘 다 무사하대!
제타비가 태연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을 때, 한 학생이 다가와 말했다.
감사해요. [player name] 선생님.
마르타 선생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회사가 "최종 검사" 평가를 통과시켰고, 저희도... 자유로워졌다고요.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55호는 말을 마친 뒤, 표정이 어색해졌다. 그리고 제타비를 한 번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르타 선생님이 한 말씀 더 하셨는데, 레보비츠가 선생님과 선생님 친구의 존재를 이미 알아챘대요.
앞으로 조심하세요.
지휘관은 55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안심하라는 뜻을 전했다.
임무 종료 후, 지휘관은 간단하게 보고서를 정리해서 전송했다.
게슈탈트와 동일한 근원 기술을 사용한 게슈탈트 서브 단말기로서, 하나의 행렬 연산 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네가 거기서 발견한 건 "제7 행렬"에 불과하다. 레보비츠는 아마 다른 슈퍼컴퓨팅 시설도 보유하고 있을 거다.
세리카는 레보비츠 관련 정보를 업데이트했고, 지휘관의 평가를 종합해 군부 회의 안건에 올렸다. 이로써 레보비츠는 공중 정원의 관리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게슈탈트는 제타비의 상황을 파악한 후, 그녀에게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근데 걔가 날 초대하지 않았어도, 하늘이 선택한 자는 도망칠 수 없었을 거야~
제타비는 초대를 수락했다기보다는 흥에 겨워 자발적으로 하늘이 선택한 자를 따라 공중 정원으로 돌아온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공중 정원에서 아직 어떤 부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게슈탈트의 직접 담당하에 있게 됐다.
세부 보고를 마친 지휘관은 휴게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player name] 님?
맞은편에서 감사원 옷을 입은 파란 머리 소녀가 다가왔다.
하... 역시 또 이렇게 됐군요.
그녀는 체념한 듯 현실을 받아들였다.
전 라스티라고 해요.
이번이 네 번째로 지휘관님께 하는 자기소개네요.
라스티는 지휘관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당황한 기색이 연기가 아님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전혀 기억을 못 하신다는 건, 제가 보안 조치를 잘했다는 뜻이겠죠.
라스티는 지휘관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대체 무슨 소리인 걸까?
침입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은 지휘관님께 있어요.
머릿속 흐릿한 형상이 방금 본 파란 머리 소녀와 겹쳤다.
게슈탈트에 재문의해 봤지만, 게슈탈트는 기밀로 표시된 임무 자료 하나만 제시했습니다. 그건 지휘관님께서 예전에 감사원과 함께 수행했던... 혹시 기억나십니까?
침입, 감사원, 게슈탈트, 레보비츠 잠입 임무. 이런 키워드들은 모두 한 가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지휘관이 하늘이 선택한 자가 된 이유였다.
아직 정보에 공백이 많았다. 하지만 지휘관은 자신과 함께 훈련을 받은 제타비가 나머지 부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휘관 휴게실
지휘관 휴게실.
하늘이 선택한 자, 드디어 온 거야.
제타비를 여기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다니, 인간의 임무 보고는 정말 복잡한가 보네.
제타비는 소파에 엎드린 채 심심한 기색으로 혀를 내밀고 있었고, 등 뒤의 작은 꼬리는 느긋하게 흔들렸다.
웬일이래~ 하늘이 선택한 자가 날 이렇게 필요로 하다니?
제타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한 번 맞춰 볼게. 그때 네가 어떻게 행렬에 접속했는지에 대한 거지?
맞지~ 나도 그때 네가 어떻게 행렬에 접속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거든.
잘 됐다. 전에 우리가 행렬에서 잠겨 있는 데이터 칩 발견한 거 기억나?
아니. 내가 풀어봤는데, 제타비의 봉쇄를 해제하는 데이터 블럭 코드만 들어 있더라.
덕분에 많은 걸 기억해 냈어. 유이에 관한 일이나 하늘이 선택한 자에 관한 일 말이야.
제타비가 어떻게 태어났고, 네가 어떻게 하늘이 선택한 자가 됐는지 궁금하면, 제타비가 이야기해 줄게~
잠자리 동화를 들려주려는 것처럼, 제타비는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맞다. 맞다.
제타비가 꼬리로 옆에 있는 하얀 큐브를 가리켰다. 그것도 행렬에서 둘이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건 유이가 제타비한테 준 생일 선물인데, 인간과 기계체가 함께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는 "화이트 박스"야.
임무도 끝났으니, 한가할 때 제타비와 안에 뭐가 있는지 보자!
최근 제타비가 찾아왔었습니다. 당신의 인도로 행렬에서 탄생한 개체 말입니다.
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함께 공중 정원을 방문한 아이 말이지?
하지만 그 표현에는 오류가 있어. 제타비의
하지만 제타비의 의식 샘플에는 당신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타비가 당신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인 추론입니다.
당시 내가 행렬 정보를 완전히 전달하지 않은 것 같군.
의식 샘플은 의식 샘플링 과정에서 얻는 건데, 인간 의식의 복잡성 때문에 샘플링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
즉, 하늘이 선택한 자와 제타비는 같은 사람의 의식 샘플에서 생성됐지만, 샘플링 시기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까?
맞아. 내 의지는 처음 생성된 하늘이 선택한 자의 의식 샘플에만 영향을 미쳤어. 하지만 제타비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
관찰 시점 이후에 생겼다면, 당신의 영향 여부는 결국 추론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만?
그건 이야기책의 다른 페이지에 숨겨진 내용이야.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거지.
이스마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타비가 널 만났을 때 기억 데이터를 공유했나?
그렇습니다. 제타비의 기억 속 하늘이 선택한 자는 모두 분홍색 머리였고, 오직 제타비만 흑백의 머리를 지녔습니다.
같은 사람의 의식 샘플에서 생성되었음에도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고, 윤회마다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내 의지로 "오염"된 모델은 하늘이 선택한 자뿐이니까. 제타비는 의식 샘플의 특징만 물려받았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당신이 제타비의 탄생을 인도하지는 않았지만, 행렬에서 성장하는 데는 분명 당신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하늘이 선택한 자는 처음부터 과적합으로 개성을 잃었고, 자율적 행동력도 없는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존재가 제타비와 함께 수많은 종말의 윤회를 넘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행렬에 침입해서 그 "빈껍데기"의 영혼이 되지 않았다면, 제타비는 혼자 훈련을 했을 것이고, 각성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공중 정원이 비우호적인 슈퍼컴퓨팅 시설에 이렇게 정확히 침입할 수 있었던 건, 당신이 하늘이 선택한 자의 연결 포트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관측하는 동안 잠깐 기록한 좌표 지점일 뿐이야. 그 후로 행렬 운영에 직접 개입한 적은 없어.
하지만 각성 훈련이 시작될 무렵, 현실 세계는 퍼니싱의 침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타비는 각성을 완료하지 못했음에도 침식된 행렬 속에서 수많은 윤회를 무사히 지나왔습니다.
"무사히"라는 말이 제타비와 하늘이 선택한 자가 세계의 붕괴를 매번 피하지 못했거나, 고위 권한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상황을 의미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완전한 각성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제타비는 퍼니싱에 침식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행렬에는 "고위 권한"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한 윤회에서 하늘이 선택한 자의 화신이었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의지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고위 권한"은 행렬이 침식당할 때, 과도한 퍼니싱 유입으로 제타비가 일찍 소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타비의 성장은 당신의 "간접적인" 인도로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 그렇게 말하면 맞긴 해. 하늘이 선택한 자와 제타비가 퍼니싱에 침식되면서 겪은 고통까지 막을 순 없었으니까.
이스마엘이 한숨을 쉬었다.
각성을 포기하고 "안식처"에서 떠도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을 텐데.
하지만 제타비와 하늘이 선택한 자는 더욱 고통스럽고 가시밭길 같은 각성의 길을 걸었어.
내가 미미한 도움을 줬다 해도, 제타비를 현실로 이끈 건 결국 그들 자신이야.
아주 오래전...
허... 이거 참 처참한데..
이 상태로 회수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일단 가져가자.
안에 있는 두 모델은?
신경 쓸 필요 없어. 폐기 처분될 거니까. 우리는 쓸만한 것만 가져가면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