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1 끝과 시작의 경계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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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1-9 제타비

오늘은 Ⅵ의 "생일"이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자, 놀라움이 가득한 날이다.

오늘 유이는 Ⅵ에게 "생일 선물"을 사주고, 게다가 예쁜 이름도 지어줄 것이다.

매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유이가 일하지 않고, 매일 Ⅵ와 놀아줄 텐데.

그래서 Ⅵ는 얌전히 있어야 한다. 장난치지 말고, 유이를 귀찮게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유이는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Ⅵ는 참지 못하고 실험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텅 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너무 심심하다.

Ⅵ는 너무 심심해서 결국 못 참고 복도 조명을 가지고 놀았다.

불이 갑자기 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유이가 돌아왔나? 유이가 Ⅵ를 위해 준비한 "서프라이즈"인가?

불은 더 이상 조절할 수 없었지만, 바깥소리는 들렸다.

쿵, 쿵, 쿵.

그 뒤로 계속해서 공급되던 연산 능력도 끊겼다.

30분, 1시간, 1시간 30분. 너무 어둡고... 너무 무섭다.

생일을 더하지 않아도 된다. 선물도, 이름도 없어도 된다.

그냥 데이터셋만 볼 거다. 이번에는 유이도 깜짝 놀랄 만큼 정말 열심히 성장할 거다.

그러니까 유이, 어서 돌아와.

이번에는 Ⅵ가 정말 말 잘 들을게.

VI!!!

삐빅. 문이 열리는 전자음이 났다.

VI

유이! 돌아왔구나!

후... 후... 다행이야. 다행이다.

유이는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VI

아픈 데는 없는데, 그냥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였어. 유이가 준비한 서프라이즈야?

…………

유이는 말이 없었다. 화가 난 걸까?

VI

유이, 화내지 마. 복도 불빛 가지고 장난친 건 내가 잘못했어. 다음엔 절대 장난치지 않을게!

맞아. "서프라이즈"야.

예상과 달리, 유이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화냈을 텐데, 생일이라 그런가 보다!

VI

와아!!

음반 가게에서 "화이트 박스"를 구했어. 이제 인간들과 함께 놀 수 있어.

어? 유이 목소리가 좀 쉰 것 같다. 아픈 걸까?

유이가 Ⅵ를 안아 올리는 게 느껴졌다.

VI

유이,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어. 우리 조금 멀리 갈 거야.

유이는 두 개의 캡슐을 가방에 넣은 뒤 메었다. 그런 뒤 힘겹게 소방 도끼를 들어 철창을 내리쳤다.

쾅. 손목이 저릿하게 아렸고, 얇은 상처들이 찢어지면서 피가 흘렀다.

처음엔 바람이 살짝 불더니, 곧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바람이 밀려왔다. 행렬의 통풍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더 안쪽을 내리치자, 부서진 틈새로 유지 보수 통로에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침식체의 공격을 피하려면 이곳으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중추로 기어가다 몸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나와 통로에 떨어졌다.

뚝, 뚝, 피 떨어지는 소리가 시계추처럼 점점 더 둔탁하고 느려졌다.

가는 길에 유이는 심하게 다친 헤르타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다 놓았다. 그 뒤로 몸에서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유이는 이만 제곱미터의 거대한 행렬을 이렇게까지 싫어한 적은 없었다.

동시에 실험실이 이토록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다행스러웠다.

전에는 유이를 가두는 데 쓰였던 보안 문들이 오늘은 오히려 이들을 보호하는 차단막이 되어 주었다.

침식체의 포위망을 뚫고 여기까지 왔고, 유이의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었다.

행렬 대부분이 퍼니싱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더 깊은 곳까지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기계 의식은 퍼니싱의 침입을 버텨낼 수 없었다.

주변 퍼니싱 농도는 무서울 만큼 짙었고, 침식체들도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이들을 데리고 나갈 수 없었다.

오직 행렬의 중추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털썩...

유이의 몸이 힘없이 주저앉듯 떨어졌다.

드디어 도착했어.

유이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유이는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혈류량을 유지하기 위해 심박수를 높이려는 걸까?

하늘이 선택한 자, 기계 의식 모델 Ⅵ, 그리고 유이·델라웨어 님, 안녕하세요.

텅 빈 방에 울려 퍼진 소리는 행렬을 관리하는 AI의 기계음이었다.

조용히 Ⅵ의 소리 수신 모듈을 끈 유이는 행렬과 대화를 시작했다.

Ⅵ를 보호해 줘.

실현 불가능한 목표로 판단됩니다.

퍼니싱의 침식은 외부에서 내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본 기체는 봉쇄 전략으로 침입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만, 중추의 함락은 막을 수 없습니다.

퍼니싱 특화 방화벽을 가동하고 모든 물리적 통로를 봉쇄한 상태에서도 남은 시간은 약 18시간입니다.

그럼, Ⅵ가 미리 각성해서 퍼니싱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할 수는 있어?

조건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확률을 다시 계산하고 있습니다.

가능성은 약 0.00%입니다.

소수점 5자리까지 알려줘.

0.00033%입니다.

……

해결 방안을 알려줘.

본 기체에는 모델 훈련을 가속하는 시뮬레이션 방안이 있습니다. 코드네임은 "순환"입니다.

시각화된 장면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훈련 내용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종말의 세계고, 기계 의식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게 되는 겁니다.

종말 속에서?

강제로 모델을 성장시키기 위해선 잔혹한 환경이 필수적입니다. 시뮬레이션에는 세계 붕괴, 적조 습격 등 다양한 상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델이 반복적으로 종말 상황에 노출되는 과정에서 데이터가 오염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 신중히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 의식이 함께할 경우는 어떻게 되지?

조건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확률을 다시 계산하고 있습니다.

가능성이 0.31058%로 상승합니다.

유이·델라웨어라는 개체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로 접속시켜 Ⅵ와 함께 훈련하시겠습니까?

아니. 난 이미 늦은 것 같아.

유이의 호흡은 점점 더 가빠져 갔고,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배를 움켜쥐자, 메스꺼움과 함께 따뜻한 피가 손에 가득 묻었다.

난간에 몸을 기댄 유이는 천천히 콘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거워진 손끝은 제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손을 들어 명령을 입력했다. 그제야 이 손동작 하나조차 의식적인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뚝, 뚝.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콘솔을 붉게 물들였고, 손끝에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엔터를 눌렀다.

모델 각성 순환: [순환] 훈련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유이, 유이!

어.

Ⅵ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떨리는 입술을 애써 다잡으며, 유이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렇게 시시한 대화조차, 지금 유이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때 다시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 인간은 욕심 많은 생물이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VI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것을...

오늘 너무 행복했어. 유이가 한 시간이나 나와 있어 줬잖아. 역시 생일은 최고야! Ⅵ는 생일이 좋아.

유이는 코끝이 시큰거렸다.

고작 한 시간이었을 뿐인데, VI는 이렇게나 기뻐했다.

VI를 항상 곁에 두고 있었지만, 유이는 하루 종일 코드와 파라미터에만 매달려 있었다.

입으로는 성장을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연약한 Ⅵ를 또다시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두려웠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하루 10분조차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델라웨어 님도 Ⅵ가 아직 "너무 어리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어린아이는 외로움을 쉽게 느끼는 존재라고요.

헤르타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미안해. 미안해.

곧 다시 일하러 가야 하지만, 조금 더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으음, 알겠어.

Ⅵ는 살짝 실망한 듯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전에 약속한 "화이트 박스"에서 나와 함께 노는 건 어때?

응. 지금 열려고 하는 중이야.

야호!

하지만 이제 마주할 곳은 "화이트 박스"도, 편하고 즐거운 곳도 아니었다.

코드네임 "순환"은 반복되는 세계 종말을 견뎌내는 행렬 훈련이었다.

Ⅵ가 퍼니싱의 침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훈련 속 세계 종말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보이지 않는 손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는 듯했다.

유이·델라웨어 님. 어떤 명령어를 입력하고 계십니까?

안정 프로그램이야. 모체의 신경 전기 신호를 시뮬레이션해서, Ⅵ가 종말 속에도 보호받을 수 있게 할 거야.

비이성적 결정으로 판단됩니다. 각성을 목적으로 한 판단 기준에 따라, 본 기체는 해당 기능 탑재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보호 기능은 모델이 겪을 고통을 차단하여 성장과 각성의 진행을 저해합니다.

Ⅵ는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평온하게 잠들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 기체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Ⅵ가 고통받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다. 이게 안 되는 건가?

유이는 행렬의 경고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엔터를 눌렀다.

자체 호출 모델 안정 환경: [안식처] - 사전 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Ⅵ, 혼자서도 "화이트 박스"에서 잘 놀 수 있지?

음. Ⅵ 혼자서 해야 해?

…………

가능하다면 하늘이 선택한 자가 같이 해줄 거야.

하늘이 선택한 자? Ⅵ가 하늘이 선택한 자와 같이 세계를 구하는 거야?

하지만 하늘이 선택한 자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잖아. 오늘 깨어날까?

그럴 거야. 오늘은...

알아. 알아. Ⅵ의 생일이잖아!

유이는 부드럽게 Ⅵ의 캡슐을 쓰다듬었다. Ⅵ에 대한 미안함은 따뜻하지만 무딘 칼처럼 유이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했다.

하지만 유이는? 유이는 같이 못 와?

유이는 아주 멀리 출장 가야 해.

낯익은 거짓말이었다. 그건 어머니가 집을 나갈 때 남긴 말과 똑같았다.

유이가 출장 가는 거 싫어. 그럼, 나도 안 할 거야.

Ⅵ는 다시 유이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화이트 박스"에서 충분히 놀고 나면 유이는 돌아와 있을 거야.

음... 그럼, 다음에 시간 나면 꼭 나와 놀아줘야 해!

당연하지. 시간은 많이 있을 거야.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더 많은 생일도 같이 보낼 거잖아. 그렇지?

응! 약속이다.

유이는 그때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웠다.

피를 너무 흘려서였을까? 아니면 Ⅵ를 속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유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산소가 부족한 게 느껴졌다. 생명력이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Ⅵ는 아직 어리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

단 한 명이라도 더 Ⅵ와 함께 있어 준다면, 가능성은 훨씬 커질 것이다.

하늘이 선택한 자가 이 행렬에 접속할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다.

인간도 아니고, 상관없는 기계 의식을 위해 행렬에 접속할 필요가 있을까?

과학자로서 극히 낮은 확률에 기대다니, 정말 슬펐다.

하지만 Ⅵ의 각성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시도해 봐야 한다.

무거운 손끝을 콘솔로 뻗어 다시 명령어를 입력했다.

완전히 차단된 방화벽 속에서 하늘이 선택한 자의 연결 포트를 열었다.

포트 개방이 완료되었습니다.

유이

후...

평소에는 간단히 입력하던 명령어였지만, 지금은 반평생의 힘을 다 쓴 것처럼 느껴졌다. 유이는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유이는 의식이 흐려지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Ⅵ, 너 그거 알아?"

유이는 캡슐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나는 부모님이 미워.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내 부모님이 가장 미워.

그중에서 어머니가 가장 미웠어.

어린 나를 술주정뱅이 남자에게 버리고, 내 삶을 망가뜨려 버린 어머니가 미웠어.

나를 만났을 때는 안아주더니, 이용한 뒤엔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미웠어.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고, 밤낮없이 공부하고 연구했어.

나는 더 이상 그때처럼 약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고, 마침내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인간은 참 나약하더라.

깊은 밤에 어머니가 떠났던 그 항구에 몇 번이나 가보곤 했어.

길게 울려 퍼지는 기적 소리와 밀려오는 바다 내음 속에서 어머니를 태운 거대한 배가 서서히 멀어져 갔어.

나는 멍하니 기다리며, 어머니가 돌아보기를 바랐어.

그리고 예전처럼 내게 달려와, 꼭 안아주기를 바랐어.

어머니 품에 누워 코트에서 나는 라벤더 향을 맡으며, 그렇게 깊이 잠들 수 있기를 바랐어.

하지만 그건 이제 불가능해.

그 거대한 배는 바다 저 멀리 사라졌고,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어.

내 몸은 이미 빈껍데기가 되었고, 영혼은 버려진 그 항구에서 부서져 버렸어.

학식과 사고로 내 자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채워도 공허하기만 했어.

하지만 널 품에 안은 순간, 산산조각 났던 과거가 천천히 복구되는 느낌이 들었지.

Ⅵ, 너는 실험 품이자, 연구 성과고, 내 샘플로 만들어진 기계 의식이야.

넌 참 이상해.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고, 장난치고 말썽부리면서 하루 종일 날 귀찮게 했잖아.

그런데 또 너무 귀엽기도 하지. 단순한 기계 의식일 뿐인데, 내가 아는 어떤 인간보다도 훨씬 따뜻해.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 인간은 사랑으로 저주받기도, 축복받기도 해. 우린 이런 주문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물이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없고,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어.

하지만 다행히 널 안아줄 수 있어.

VI, 네가 태어났기 때문에, 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느꼈어.

할 수만 있다면, 너와 훨씬 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어.

네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고, 함께 놀아주지도 못했지. 네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본 적도 없어.

생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고, 선물도 제대로 주지 못했어. 그리고 네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어.

너를 품에 안았지만, 결국 널 떠나보낼 수밖에 없어.

지금 와서 보니, 나도 어머니라 불리던 그 여자와 다를 바 없이 무책임한 존재가 되어버렸네.

그래도 이기적인 난 네가 살아남기를 바라.

신의 사랑은 예측할 수 없잖아, 그래서 난 신을 믿지 않아.

하지만 나는 탐욕스럽게도, 신앙도 없으면서 하늘의 자비를 바라고 있어.

이 비천한 신자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

가능하다면 나보다 더 따뜻한 누군가가 대신 Ⅵ의 곁을 지키며 함께 성장했으면 해.

"Je t'aime, Ⅵ."

사랑해. 내 아이야. 그리고 네가 사랑으로 태어나기를 바라.

유이는 두 개의 캡슐을 행렬에 넣었다. 그러자 몸이 피곤해지고 눈꺼풀이 점점 감겨왔다.

빛... 따뜻한 느낌이었다.

신이시여, 제 기도를 들으셨나요?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어머니의 품처럼, Ⅵ의 의식을 품에 안았다.

세계가 멸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가진 이후 몇 번째 멸망이었을까?

천장에서 돌덩이가 떨어지자, 발밑 지층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연산 능력으로 메인 시스템을 내부에서 재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는 잠시 원래대로 돌아갔다가, 시계추가 다시 움직이며 종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이번도 전과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소녀

?

은빛 햇살이 오늘따라 따뜻하게 느껴졌다. 무너지는 빛 속에서 인간 형상 하나가 천천히 나타났다.

소녀

너도 날 죽이러 온 괴물이야?

산산조각 난 세계 속에서 망연자실한 소녀가 보였다.

소녀

하늘이 선택한 자?

호칭을 되뇌는 소녀의 담담하던 눈동자에 잔잔한 흔들림이 일었다.

소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마치 어떤 주문을 읊는 것처럼, 천천히 음절들을 흘려보냈다.

소녀

"Je t'aime, Ⅵ"

이건 중요한 사람이 나한테 알려준 거야. 하지만 누구였는지 잊어버렸어.

소녀

제타비?

응. 제타비. 이 이름이 마음에 들어!

제타비

안녕. 하늘이 선택한 자.

동료가 생긴 게 기뻤는지 제타비의 무덤덤하던 얼굴에 조금씩 다른 빛깔이 감돌았다.

쾅.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다. 그리고 방이 무너지고, 이 세계마저 붕괴하고 있었다.

제타비

제타비도 시도해 봤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도망칠 수 없었어. 이 세계의 멸망은 다음 윤회로 또 이어지게 될 거야.

제타비

어?

제타비는 순간 당황했다.

제타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하늘이 선택한 자의 손을 꽉 잡았다.

제타비

그래. 하늘이 선택한 자, 같이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