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0 사기술의 황홀경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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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0-21 낙원 탈출기

퍼니싱의 검붉은 기운이 평원 너머 펼쳐진 알 수 없는 세계를 불태웠다.

라벤더 빛 머리의 누군가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몸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며, 이런 어긋난 느낌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됐었다.

혹사... 보아하니 새로운 몸을 찾은 것 같네요.

저 기억해요? 선생님 부탁으로 제가 마중 나왔어요.

키가 큰 여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다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는 이 단순한 질문에, 혹사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여러 가지 답을 떠올렸다.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하나? 그녀가 자신의 잔해에서 사고를 추출했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마술 모자였던가?

그녀가 거만한 태도로, 선생님에게 더 많은 위험과 기회를 요구했었나?

그 흐릿한 가능성들은 검붉은 악몽 속에서 잡다한 일들에 휘말린 전생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고마워요, 릴리스 아가씨.

선생님께 다른 일정도 있으셔서, 서둘러야겠어요.

릴리스는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고, 그녀의 교양 있는 태도는 참혹한 광경과 기이한 대조를 이루었다.

네.

본 네거트의 지시에 따라 사도들은 묵묵히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질렀다.

고위험 임무에서 오는 짜릿함은 그녀에게 언제나 특등석을 제공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오래전 로프라도스 근교에서 핵폭발이 일어난 이후, 허상이 강림하며 "적절한 시기"를 약속했으나, 그 기회는 늘 모호하기만 했다.

그녀는 생명을 선별판 위에 올려놓을 기회가 더 많이 필요했으며, 승격 네트워크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실력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대행자와 관련된 일이겠죠.

혹사가 침묵을 깼다.

무슨 뜻인가요?

선생님의 새로운 계획 말이에요. 다른 대행자와 관련이 있을 거예요.

그렇겠죠.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니에요.

릴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습관적으로 월산을 지팡이처럼 쥐며 땅을 짚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떠 있는 은빛 달을 바라보았다.

머나먼 24만 마일 너머에는, 공중 정원의 인간들에게 감금된 ‘다른 대행자’가 있었다.

승격 네트워크는 자신이 직접 부여한 힘도 빼앗아 가나 보네?

릴리스는 생각에 잠긴 채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건 누군가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관심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공중 정원을 "배신"한 또 다른 승격자… 그 사람이야.

그녀는 여정의 틈을 잡담으로 채우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혹사는 뭘 좀 알고 있나요?

릴리스가 자신 옆의 가녀린 형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틸라 계획이든, 겨울 계획이든... 과거의 고통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우린 그 어리석은 프로젝트들의 희생자일 뿐이잖아요.

강력한 육체를 만들든, 빈약한 사고를 하나로 합치든, 그건 모두 인간이 혹한을 견디려는 방법이었겠죠.

그 "혹한"이란 게 처음엔 은하계 식민지였다가, 나중에는 퍼니싱이 됐어요. 혹한을 막겠다는 그 달콤한 약속에, 우리의 "진보의 대가"마저 흔들릴 뻔했죠.

우리의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자신의 욕망이 뭔지 알아낼 능력조차 빼앗아 갔어요.

눈보라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그 안에 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 저를 도와주셔서 고마웠어요. 결국, 저희는 다시 동료가 됐네요.

혹사는 직접적인 답을 피하며, 완곡하게 동의의 뜻을 전했다.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그 배신자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네요.

전 확신해요. 적절한 때가 되면, 그녀는 반드시 극북 어딘가로 돌아올 거예요.

릴리스의 목소리에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선생님을 위해 그녀를 영입할 생각인가요?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다른 결의를 품은 힘과 맞서는 건, 임무에서 겪는 시련보다 훨씬 드문 기회죠.

릴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손끝으로 정교한 만년필을 꺼냈다. 혹사는 펜에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가 버튼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전 첫인사 선물도 준비했는걸요.

그녀가 만년필의 다이아몬드 장식을 살짝 누르자, 뚜껑 틈새에서 작은 꽃다발이 툭 튀어나왔다.

눈치채기 어려운 마술이네요.

그녀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그건 만나봐야 알겠죠.

릴리스는 몸을 돌려 평원의 끝자락, 희미한 자오선을 응시했다.

이제 그만 쉬고, 슬슬 출발할까요?

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릴리스는 무너진 담장과 썩어가는 시체가 나뒹구는 광야를 걸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달은 서쪽 하늘에 남아 대지를 사이에 두고 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태양은 눈 부신 백열로 타올랐고, 달은 그 빛을 흉내 내는 창백한 모조품에 불과했다.

해와 달은 마치 회전하는 실린더처럼, 세월을 공이 삼아 연명하는 대지에 상흔을 깊이 새겼다.

적조는 인간이 남긴 잔해 속에서 검은 수수께끼를 새겨 넣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고층 건물들은 바람에 쓸려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다.

태양이 수없이 돌고 난 뒤, 문명의 잔재는 결국 사라질 운명이었다.

바람이 폐허를 먼지로 덮으면, 유령도, 필경사도 없는 이곳에는 더 이상 황금시대의 인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해 줄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신비와 공포 속을 헤매는 한, 이 파멸의 진실에 도달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목숨을 판돈으로 건 자가 나타난다면, 우주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새로운 체를 준비할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휴식을 취하지도, 금은보화의 탐욕으로 배를 채우지도 않았다.

그녀는 은빛 빗줄기와 붉은 실 사이에서 춤을 추며, 운명의 여신이 내린 판결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모든 것을 바치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승격 네트워크 속에서.

진홍빛 빗방울과 썩어가는 시체가 자양분이 된 이 드넓은 대지 위에서.

그녀는 가장 행복한 이가 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