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0 사기술의 황홀경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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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0-8 바빌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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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막 위로 섬세한 거미줄 무늬가 퍼지다가, 다섯 번째 줄에서 멈췄다.

잠시 후, 시야가 완전히 선명해졌다.

릴리스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익숙한 하얀 레이스 장갑 대신, 기계적인 관절이 드러났다.

이거 좀 드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

의사가 튜브가 꽂힌 PVC 백을 건네주었다.

...

전해액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셔야 할 거예요.

구조체 수술의사는 릴리스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혼란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네. 혹시... 유사 알코올 전해액은 없나요?

새로운 몸을 얻게 된 구조체는 수술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목 관절을 조심스럽게 움직여보더니, 옆에 있는 의사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

그 질문에 구조체 수술 의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몬자노에게 허락을 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기체가 버틸 수만 있다면, 그냥 마시게 해.

그럼 말씀하신 대로 하죠.

의사가 수술대 옆 냉장고에서 시험관 모양의 용기를 꺼냈다.

이론상, 의료용 알코올과 유사한 성분입니다.

진통과 소독 효과가 있는 거겠죠? 제가 원하던 거네요.

릴리스는 밀봉을 뜯고, 그 안의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보랏빛 혀끝으로 전해액이 묻은 입술을 핥았다.

흐트러졌던 모습은 이내 단정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돌아왔다.

조금 전 수술에서 고모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네요.

나중에 시간이 되시면, 도미니카 기념 공원에 있는 바에 가서...

그러나 몬자노의 거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너는 내 눈앞에서 이론상 불가능한 수술을 견뎌냈어. 그 과정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들은 없었던 걸로 해주지.

그러니까 그 가식적인 말투는 집어치워.

릴리스가 반응할 틈도 없이, 몬자노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장난에 불과해. 앞으로의 시험이야말로 진짜 위험할 거야.

정말로 내게 사죄하고 싶다면, 차라리 지옥을 향해 앞장설 각오나 해.

이제 내려와.

몬자노는 릴리스에게 수술대에서 내려오라고 손짓하며, 의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수술 자료를 수집하고, 의식의 바다가 점차 오염되는 데이터 모형을 복원해.

조속히 마무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수술의사는 동료들과 함께 수술실을 떠났다.

앞으로의 시험이라고요?

그나저나... 고모도 구조체 실험을 시작하셨군요.

릴리스의 말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만을 담담하게 전달할 뿐이었다.

게임에서 원칙 따위는 의미 없어.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승리뿐이야.

로프라도스 봉쇄의 몇 년 동안, 군부는 전투용 구조체를 최전선에 투입하는 데 성공했지.

퍼니싱이 기존의 판을 뒤엎어버렸어. 항성 간 이동을 위해 설계되고, 완벽한 생태계가 조성된 에덴 Ⅲ형은 이제 출항할 수 없게 되었지.

우리는 과거에 쿠로노와 세계 정부 의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어. 아무리 지금 남한테 빌붙고 있다고 해도, 하산 같은 자들의 명령에 휘둘릴 체스 말로 전락할 순 없어.

고모 말씀대로, 그들은 구조체 기술을 독점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이길 방법이 있을까요?

바람 부는 대로 돛을 다는 것을 임기응변이라 미화하는 일, 이는 릴리스가 로프라도스에서 셀 수 없이 마주했던 비열한 처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들이 마지막에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아 왔기에, 혀끝에 맴도는 비꼬는 말을 삼켜야 했다.

1세대 군용 구조체는 강한 퍼니싱 환경에서의 전투를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해. 의식의 바다 안정도나 기체의 강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지.

네가 수집한 겨울 계획의 정보는 일부에 불과해. 쿠로노는 크틸라 계획을 기획한 이래로, 방대한 기술적 토대를 쌓아 올렸어.

쿠로노가 능력을 감춘다고 해서, 나도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어.

패는 잘 숨겨두되, 수완은 과감히 보여줘야죠.

수완이야말로 공정한 게임을 보장하니까요.

릴리스는 고모가 원하는 답을 잘 알고 있었기에,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좋아. 의식 전이로 네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네.

릴리스의 대답에 몬자노 부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세대의 기체를 보면, 군부는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와 협력할 거야.

이윽고 몬자노는 릴리스를 데리고 수술실을 나와 복도로 향했다.

창밖으로는 영원히 변함없는 고요한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가자. 우리가 공중 정원을 되찾을 패를 보여줄게.

네가 정말 드문 성공 사례인 건 맞지만, 네가 마지막일 거라는 보장은 없어.

릴리스와 몬자노는 함선 내부의 복잡한 구조물 사이를 지나며, 기술자, 관리자 그리고 군인들과 계속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듯 바삐 움직였다.

릴리스는 그 속에서 몇몇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아, 케프하트 씨...

그는 고모가 철수하기 전 마지막으로 거래했던 인물이었다.

네?

그 금발의 남자는 잠시 멍하니 서서 릴리스를 바라보았다.

아... 릴리스 양이군요!

케프하트가 재빨리 몬자노 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실험이 성공한 거군요.

이에 몬자노는 말없이 모호한 눈빛을 던졌다.

마술 모자를 쓴 구조체가 분위기를 풀어내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네, 고모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이에요. 쿠로노에서 쌓아온 성과도 역시 결정적이었죠. 특히, 고모께서 겨울 계획의 옛 자료들을 보관하지 않으셨다면,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몰라요!

릴리스는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가는 속눈썹이 살짝 떨릴 정도로,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이런 암울한 시대에 우리에게 한 줄기 빛 같은 반가운 소식이군요!

케프하트의 우렁찬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면서, 순간 선거 유세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당히 해. 여긴 공중 정원이지, 동해안의 폐쇄적인 부촌이 아니야.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 죽을 고생을 했어. 그런 이들에게 그 고리타분한 말투로 표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몬자노의 말 속엔 다른 뜻이 숨겨져 있었고, 케프하트는 그 숨은 의도를 한눈에 알아차렸다.

금발의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때가 되면 제가 의회에서 구조체 기술 재평가를 위한 의안을 발의하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저는 쿠로노 그리고 군부와 갈라지게 되겠죠.

그의 눈썹 끝에 희미하게 경박한 기색이 스쳤다.

그때가 되면... 몬자노 부인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것 같네요.

그는 몬자노의 오른손을 불쑥 붙잡더니, 지나치게 과장된 동작으로 몬자노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릴리스와 몬자노가 향하는 방향을 등지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네가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어. 네 보상도 준비해 두었으니까, 조급해하지 마.

공중 정원 궤도 수송 시스템

거대한 홀로그램 아이콘이 복도 끝에 나타났다.

빨리 타.

약 5분 후, 함선 내 수송기가 한 플랫폼 옆에 멈춰 섰다.

앞서 지나온 실험 시설의 주변과 비교하면, 이곳은 병원 지하의 영안실처럼 조용했다.

인적, 안내방송, 심지어는 함선의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기계음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몬자노는 릴리스를 데리고 플랫폼 끝에 있는 방폭 문 옆으로 갔다.

자동 출입문 시스템

홍채 인식 중... 에이드리언느·몬자노 부인, 기체 식별 코드 UAF-07. 환영합니다.

기체?!

릴리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몬자노 부인을 바라보았다.

금속 외골격과 과장된 모자 장식, 심지어 깃털까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그 우아한 외모 아래의 육신이 순환액과 기계 부품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게 믿기 힘들 정도였다.

허, 네가 괜히 0호가 아니라 1호 실험체라고 불리는 건 줄 알아?

사랑하는 조카야, 넌 내게 고마워해야 해. 네가 수술대에 눕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모든 위험을 검증해 줬으니까 말이야.

릴리스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 상황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눈앞의 키 큰 여자는 언제나 세상이 자신의 발밑에 있다고 믿어왔으니까.

그런 고통을 고모께서 저보다 먼저 겪으셨다니요. 수술할 때 실례를 범한 것에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릴리스는 기체의 의식의 바다도 뇌와 마찬가지로 말투를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내게 보답할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거라고 했잖아.

잠시 후, 몬자노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음성 감지 흰색 조명이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차례로 켜지며 어둠을 밀어냈다.

방 중앙에는 기체 배양기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군부와 쿠로노의 구조체가 고농도 환경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건 '역원 장치' 덕분이야.

간단히 말하면, 미량의 퍼니싱 결정을 항원으로 사용해 중화 조율을 거쳐 기체 주변에 저농도 또는 무농도의 공간을 만드는 거지.

일종의 차단 안테나라 보면 돼.

그런 기체로는 고위험 환경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요.

바로 그거야.

고드윈의 연구 덕분에, 의식의 바다도 결국은 인간의 뇌와 본질적으로 같다는 걸 알게 됐어.

인간의 장기가 항체를 만들 수 있다면, 구조체라고 못할 건 없지.

그 말은...

독극물이 몰려오는 걸 피할 수 없다면, 여과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내 구조체는 차단 안테나 같은 건 필요 없어. 그 대신 나는 투석기를 선택했지. 내장형 차단 장치를 설치한 거야.

그래서 너와 내 기체의 머리에 그 못생긴 돌기가 없는 거야.

몬자노 부인의 거만함은 여전했지만, 퍼니싱을 받아들인 것은 분명 옳은 결정이었다.

릴리스는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몬자노가 쿠로노와 같은 대답을 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내장형 차단 장치로 기체가 고농도 환경에서 더 오래 버틸 수 있다고 해도... 퍼니싱 농도가 순환 속도의 한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내가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야...

뇌와 의식의 바다는 본질적으로 같아. 그리고 너도 잘 알다시피, 뇌는 이식이 가능하지.

육체 같은 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도 있고.

퍼니싱 여과, 의식 백업.

단 몇 분 만에, 몬자노는 두 가지 터무니없는 생각을 마치 기술적 논의처럼 진지하게 늘어놓았다.

그럼... 오블리크는 이런 걸 알고 있던 걸까요?

릴리스는 결국 그 금기된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그 애는 쿠로노의 지상 시설에 남았어. 아마 지금쯤 개조도 끝났겠지. 물론, 구식 모델로 말이야.

의회에 새로운 세대의 구조체 기술을 제출하기 전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대조군이 필요했거든.

공중 정원에서 공식 경로로는 얻을 수 없었던 데이터를 오블리크가 곧 수집해 올 거야.

지표면은 위험하잖아요.

릴리스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너를 위해 준비한 보상은 당연히 네가 직접 얻어내야 하지 않겠어?

쿠로노의 구조체 데이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나는 내장된 차단 장치의 신뢰성도 증명해야 하거든.

공중 정원에서 가장 뛰어난 민간인들을 뽑아 개조할 거야. 그들이 직접 지상 전투에 참여하면서 1차 데이터를 제공하겠지.

그리고 너는 오블리크가 퍼니싱에 완전히 잠기기 전에 그 애의 위치를 찾아내야 해. 그게 바로 네게 주어진 마지막 시험이야.

...

오해하진 마. 그 애가 죽으면 나도 그 귀중한 자료들을 얻기 어려워지잖아?

우리의 이해관계는 언제나 같았어. 가족으로서는 정말 드문 일이지.

몬자노는 계속해서 제멋대로 릴리스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니에요. 그보다 고모의 계획이 이렇게 치밀하다니, 정말 놀랐어요.

몬자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배양 캡슐의 매끈한 표면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보크농 계획이든, 겨울 계획이든, 모두 인간이 가상의 최종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것이었지.

지금은 그 시험이 우주에서 퍼니싱으로 바뀌었을 뿐이야. 그리고 진화의 발걸음은 결코 여기서 멈추지 않아.

때로는 릴리스도 그녀의 결정을 높이 평가했다. 비록 계산된 것 외에는 다소 맹목적이었지만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그러나 이는 결국 한순간의 스침에 불과했다.

잠시만요. 머리가 조금 어지럽네요.

기체에 적응하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조금 전에 유사 알코올 전해액을 마시겠다던 게 누구더라?

릴리스는 몬자노의 비꼬는 말을 무시한 채, 이마를 가볍게 매만졌다.

그녀는 의식의 바다에 백업한 데이터에서 간단한 바이트 코드를 불러왔다. 겉보기에 성공적이었던 개조 수술 과정에서 출처 불명의 신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진리는 언제나 이토록 명쾌했다.

그 바이트 코드는 퍼니싱의 코드 중 일부였으며, 이는 본 네거트가 승격 네트워크를 통해 그녀에게 준 선물이었다.

공중 정원이 인간의 마지막 희망인 건 맞지만, 우리는 그 희망을 더 빛나게 만들 수 있어.

산꼭대기에 있는 도시의 주인이 새로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거야.

다시 들리는 고모의 말에, 릴리스의 의식이 몽상에서 깨어났다.

우리의 반격 시대가 도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