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ze=42>역사는 연속된 성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흐름은 때로 상식의 한계를 넘어설 만큼 위태롭다.</size>
황금시대의 풍경은 사람들을 매혹하는 마취제와 같았다. 그중에서도 로프라도스의 거리는 유독 그 효과가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결국, 이곳의 인간들은 태양에 너무 가까웠고, 고해실과는 너무 멀었다.
하늘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던 승천의 사다리가 한순간 끊어졌다. 평지에서 하늘로 오르던 사람들은, 결국 이카루스처럼 태양 아래로 추락했다.
방송 사고가 발생하자, 흥이 깨진 군중들은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점화 실험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로프라도스의 일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직후, 짧은 몇 년 사이에 불길한 징후들이 연이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카지노에서 슬롯머신이 오작동해 금화가 쏟아졌다. 행운의 손님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급히 로비를 빠져나갔다.
다음에는 서비스 로봇이 오작동을 일으켜, 한 손님이 부상을 입었다. 사건은 몬자노 부인의 의료 지원과 보상으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작은 투자로 큰 이익을 좇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탐욕에 이끌린 순례자들은 불길한 소문을 외면한 채 신용카드를 손에 쥐고 이 황금빛 세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금빛 환상은 끝내 악몽으로 변해버렸다.
차 문손잡이, 크리스털 샹들리에, 카드 테이블 그리고 서보 기계 팔까지 모든 것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센서에서 섬뜩한 붉은 빛이 번쩍였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비상 계획은 뼈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무너졌다. 결국, 보크농 계획의 주도자들은 마지막 희망을 동기 궤도를 떠도는 식민 함선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몬자노 부인의 전용차가 텅 빈 거리를 가로질렀다. 한때 화려했던 도시는 이제 시민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만이 흩어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상점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예전의 활기참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 남아 있던 인원들은 로프라도스 북교외의 우주항으로 몰려갔지만, 몬자노 부인의 방탄 세단은 다른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곧이어 차량은 인적 드문 낮은 건물 옆에서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번에 제가 왔을 때와는 완전히 딴 세상이 된 것 같네요.
금발의 남자는 긴 기다림에 지친 듯, 몬자노 부인의 구두 끝이 차 문밖으로 보이자 곧바로 비꼬듯 말을 던졌다.
자금이 끊긴 순간부터 이곳은 더 이상 쿠로노 그룹과 무관한 곳이 됐죠.
쿠로노마저 위기에 처한 상황인데, 이렇게 경솔한 행동을 보이시다니요.
그녀는 케프하트의 말 속에 숨겨진 가시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으흠, 그렇게 날 세우실 필요는 없어요. 오늘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룰렛이 돌아가는 걸 보고 싶으신 거라면, 시원하게 한번 보여드리죠.
몬자노 부인은 뱀피 문양의 리볼버를 꺼내, 황금빛 실린더를 만지작거렸다.
폭발 이후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더 궁금해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당신의 협상 카드가 고작 그런 가치 없는 정보뿐이라면, 더 이상 대화할 필요도 없겠군요.
정보라고 하기도 뭐하죠. 사회 질서는 이미 무너졌고, 비극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어요. 이제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어졌죠.
군부의 우주 무기 공격은 성공적이었지만, 퍼니싱이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재앙으로 발전할 줄은 예상 못 했겠죠.
게슈탈트의 소스 프로그램이 변조되었고, 퍼니싱은 그 허점을 파고들어 우주 함선 편대에 잘못된 명령을 내렸어요.
"에덴 Ⅱ형 식민 함선과 충돌".
어떻게 위기를 해결한 건지 말해보시죠.
그녀는 세상을 깔보는 자들의 허세에 휘둘릴 생각이 없다는 듯 냉정하게 되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노인네가 기겁했어요. 대피소가 순식간에 박살 나버렸다면, 우리도 결국…
케프하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몬자노 부인을 바라봤다.
갈림길에서 선택한 건 결국 당신들이었고 이젠 되돌릴 수 없어요. 계속 말씀해 보세요.
물론, 그 책임감 넘치는 우주 함선의 지휘관들에게 감사를 표해야겠죠. 자폭이라니, 정말 영웅 영화 같은 결말이네요.
그래서, 당신의 부탁이 뭔가요? 설마 대피하라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시신까지 처리하라는 건 아니겠죠?
열사들에 대해 조금 더 경의를 표해주셨으면 하네요. 어쨌든, 아카디아 대이동은 큰 타격을 입었어요.
의회는 후속 대철수 의안에 대한 표결을 준비 중입니다.
우리 같은 부류는 늘 뒷수를 준비해 두죠. 교활한 토끼가 굴을 세 개 파듯, 정치가들도 도망갈 구멍을 마련해 두는 법이니까요.
몬자노 부인은 경멸이 담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결국 저는 일개 의원에 불과해요. 투표를 설득하는 것 외엔 큰 파장을 일으킬 힘이 없어요.
전쟁이 시작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군부가 세계 정부를 거의 장악할 지경이거든요. 노인네는 우리의 작업 속도에 몹시 불만족스러워하시더군요.
노인네의 사람들을 전시 실권이 있는 자리로 보내려면 교활한 수가 필요해요.
아직 철수 항공편을 타고 싶다면, 말장난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자신의 영역에서 제 세상인 듯 행동하는 방문객의 모습에, 몬자노 부인은 짜증이 치밀었다.
톨리드는 주요 인사들과 물자를 철수시키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어요. 게다가 시민들을 최대한 많이 구하겠다고 허세를 부리는데, 마치 자기가 홍해라도 가를 수 있는 사람인 줄 아나 보더군요.
군부의 공중 전력은 거의 전멸했고, 그의 수하에는 이제 몇 안 되는 수송기만 남아 있어요. 주제도 모르고 큰소리치는 거죠.
물 속으로 가라앉기 직전인 사람은 단 하나의 부목이라도 붙잡으려 애쓸 겁니다.
그리고 그 부목을 제공할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휴양 도시의 주인이자, 과거에 보크농 계획을 주도했던 당신이라면 수송력 부족 같은 문제는 없겠죠?
3개 연대의 수송기와 비행 대원. 이것이 제가 제시하는 가격입니다.
나머지는 노인네가 자연스럽게 해결하겠죠. 군부의 '열사'들이 자발적으로 희생해 준 덕분에, 우리는 전선에 나가지 않고도 대부분의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네요.
그리고… 노인네를 위해 이 정도 큰일을 해내면, 제게 쏟아진 의심도 말끔히 씻길 겁니다.
자, 이제 당신의 조건을 말씀해 보시죠. 제가 외상은 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몬자노는 자신을 버린 그 악의 소굴에 총알을 퍼붓고, 쿠로노의 썩어가는 시체 위에서 보크농 계획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리고 이제, 원수가 스스로 총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4개 연대를 내드릴 수 있어요. 어차피 이곳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자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고, 살고 죽는 건 결국 그들의 운명이에요.
오호, 생각보다 관대하시군요. 그럼 조건이 만만치 않겠군요?
그 아이요.
네?
그 아이는 저와 함께 가지 않을 겁니다. 자기 사람은 직접 데려가세요.
그녀는 마치 이 도시에서 배신과 음모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하! 그거야 쉽죠.
케프하트, 당신은 카드 테이블에서 항상 가장 수다스럽네요. 그래도 카드를 오픈하고 돈을 지불할 때는 그 누구보다 시원시원하더군요. 솔직히, 그 점은 인정해 드리죠.
로프라도스의 영광도 이렇게 막을 내리는군요.
겨울 계획에 대해서는 행운을 빌게요.
기회가 되면,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만나죠.
몬자노는 "새로운 세계"라는 단어를 특별히 강조하면서, 차 문을 열고 넓은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로즈워터는 당신이 죽인 게 아니죠?
이미 작별 인사를 했음에도, 방문객은 또다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몬자노는 차창을 내리며, 독기 서린 눈으로 케프하트를 노려보았다.
아니에요. 독사를 기르는 사람은 결국 그 독니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더군요.
몬자노는 시끄러운 타이어 소리로 답을 대신했고, 세단은 금방 경사로 끝에서 자취를 감췄다.
금발의 남자는 텅 빈 지하 주차장의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도넛 모양의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로프라도스 카지노
같은 시각
황금빛으로 빛나던 로비는 비상등의 붉은 조명 아래에서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과하게 장식된 부조와 탐욕을 부추기던 룰렛 테이블들은 이제 괴이한 갈색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구석의 카드 테이블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이곳이 무너질 듯한 위태로운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더 이상 손님들의 환호성도, 절망 어린 비명도, 기계체 딜러의 달콤하면서도 생기 없는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 적막을 즐기고 있었다.
몬자노는 이미 당신이 원하던 대로 방해될 만한 사람들을 내보냈을 겁니다.
그 관대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제 마지막 부탁이었어요.
릴리스는 딜러석에서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카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스테이.
음? 포인트를 다 채우신 건가요?
다음 카드는 10이에요. 인슈어런스를 걸어야겠군요.
그럼 말씀하신 대로 하죠.
딜러를 맡은 릴리스가 매끄러운 동작으로 테이블 맞은편의 남자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렇다면, 당신도 당신만의 선택을 한 거군요.
고모는 성문을 활짝 열어두셨어요. 제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트로이 목마를 만든 게 헛수고가 되지 않겠어요?
트로이 목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선생님의 계획은 정말 사실인가요?
인간이 이 혹한을 견뎌낼 수 있을지도 중요한 변수 중 하나죠.
저는 계획 자체보다 확률을 더 신뢰하는 편입니다. 릴리스 양도 마찬가지지 않나요?
쿠로노의 프로젝트는 무모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탐험가들이었죠. 그리고 그 금기된 실험들은 저에게 너무나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어요.
겨울 요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하지만 겨울 요새만이 아니죠.
몬자노의 프로젝트는 쿠로노의 초기 탐구가 낳은 부산물이었지만, 그 덕분에 당신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죠.
실패자의 성과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 없어요. 이후의 일은 안심하셔도 돼요.
딜러의 눈빛에 미묘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전 당신의 수완을 믿어요. 다만, 당신도 잘 알다시피 카드 테이블에는 두 분류만 존재하죠. 하나는 게임을 지배하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도살될 먹잇감이자,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들이죠.
그녀를 떠나보내면, 당신은 과거와 얽힌 실타래를 끊을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는 모든 게 당신의 손에 달렸어요.
귀중한 조언, 반드시 명심할게요.
릴리스는 천천히 손에 든 카드를 뒤집으며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블랙잭이네요. 이번 판은 제가 이긴 것 같군요.
게임 시작 전에 했던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말해보세요, 무엇이 궁금하신 거죠?
목마로 직접 왕좌를 공격하는 게 더 승산이 높지 않나요? 아니면, 아직 저를 신뢰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승자의 표정에는 도발적인 기색이 어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뻔한 답이 아니었다.
쿠로노는 한계를 넘어설 용기가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왕은 균형을 유지해야 하죠.
인간도 결국에는 체스 말에 불과하다는 걸 절대 잊지 마세요. 논제로섬 게임을 계획했다면, 매번 조금씩 앞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역병을 왕좌로 향하게 하는 것이 단지 유일한 생존자를 선별하기 위한 거라면, 그건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닐까요?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비행기도 곧 이륙할 시간입니다.
방문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는 손님을 내쫓는 듯한 차가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양쪽에 배팅하시다니, 역시 트라우트 씨다운 선택이네요.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가장 빛나는 자질이죠. 그러니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이런 위험을 감수하시다니, 정말 실력 있는 도박꾼이시군요. 상황이 달랐다면, 기꺼이 한 판 더 도전했을 겁니다.
그녀는 옆에 있던 월산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마쳤다.
무덤처럼 적막한 로비에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업 끝난 거 안 보여?
릴리스가 테이블 위 카드 더미에서 스페이드 10을 뽑아,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날카로운 곡선을 그렸다.
키이익...
반쯤 부서진 금속 잔해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다.
붉게 빛나던 센서의 불빛은 굴러떨어지던 잔해가 멈춰 선 후에야 꺼졌다.
시각 모듈 손상, 자... 자체 검사...
곧이어 소름 끼치는 기계음이 머리 없는 로봇의 흉부에서 반 박자 느리게 울려 퍼지더니, 마지막 숨을 내뱉듯 이내 사그라들었다.
솜씨가 좋군요.
앉아 있던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바닥의 잔해를 살펴보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침입자는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돔에서 돌조각들이 카드 테이블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어두운 로비의 벽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쉽네요. 이곳은 중심가에서 유일하게 브라만테 양식의 아치형 천장을 가진 카지노인데. 재앙은 언제나 무심하게 아름다운 것들을 앗아가는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공중 정원에는 감상할 만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권세가들은 수송기에 금은보화를 위한 자리를 남기려고 머리를 짜내고 있다던데…
제 짐들은 그것보다 훨씬 수수하답니다.
릴리스는 검처럼 생긴 월산을 마술 지팡이처럼 한 바퀴 돌린 후, 트라우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요. 다음 대결 전까지 평안을 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릴리스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 로비 복도 끝에서 사라졌다.
트라우트는 말없이 자리에 앉아,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이 카지노는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았고, 그 둘이 이곳에서 벌인 게임도 마지막이 아닐 것이었다.
통로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품위는 온데간데없었고, 탑승 대기열에서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해 손에 든 가방조차 내팽개칠 기세였다.
로프라도스 도시 경비대의 진압 병사들이 간신히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총기와 권위만으로 상류층의 타고난 오만함을 억누를 순 없었다.
제기랄! 몬자노가 내게 우선 대피권을 약속했다고!
그는 무례하게 주변 사람들을 밀쳐내며 경비병 앞에서 으스대듯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보였다.
너희 같은 병사들은 눈앞의 이익밖에 모르지? 그래,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빌어먹을 것들.
그는 투덜거리며 손가방을 열고 안을 뒤졌다.
월산을 든 여자가 우아한 발걸음으로 대기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릴리스는 거친 고함을 들으며, 뻔뻔한 항의에 가볍게 경멸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봐, 럭키 38 카지노의 플래티넘 기념 코인이야. 몬자노가 직접 수여한 거라고.
자! 순도를 확인하고 싶으면 물어보든가! 네 이빨이 얼마나 튼튼한지 보자고!
곧이어 그는 군중을 막느라 애쓰는 경비병에게 손바닥만 한 은색 동전을 건넸다.
이 행동은 불안을 터뜨리는 계기가 되어, 사람들이 앞다투어 통행권과 맞바꿀 물건들을 내보였다.
난 3년 연속 올해의 시민상을 받은 사람이야! 세계 의회 사람들도 날 보면 허리를 굽히기 바쁘다고!
이건 대서양 유나이티드 항공의 특별 통행증이야. 공동체 영토 내에서 유효한 장기 통행증이라고.
이런 난리통에서는 배급이 부족하겠지? 나한테 비상식량 몇 개가 있어. 가져가!
질서를 유지해 주십쇼! 짐을 챙겨 대열로 돌아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금속 우산 끝이 바닥을 치는 또랑또랑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주변의 어지러운 소음을 갈라놓았다.
사람들은 금세 과거 사교계의 스타를 알아차렸고, 방해하던 경비병 대신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급해하실 필요 없어요. 철수 일정은 몬자노 부인께서 이미 발표하셨잖아요. 시간이 충분한데도 여러분들께서 계속 이러신다면... 더 이상은 보장해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이 도시는 모하비 사막이라는 자연 방벽이 있으니, 외부의 침식체들이 당장 이곳까지 몰려들지는 않을 거예요.
전 세계의 수많은 빈민이 수송기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최고의 안전을 보장받고 계시면서도 이렇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시다니요. 평소의 품위는 다 어디로 간 거죠?
릴리스의 말투는 우아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었다. 원망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 광경이 역겨웠다.
재난은 야심가들에게는 기회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엘리트'라는 자들은 결국 겁쟁이로 전락하고, 닥치지도 않은 위협 앞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주 함선을 비웃던 이들이 이제는 승선 기회를 얻기 위해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배양 접시 속 박테리아처럼.
가라앉는 여객선에서는 바이올린을 켜는 신사도 있지만, 여자와 아이들을 밀치고 먼저 살아남으려는 위선자들도 있죠. 마지막 순간,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군중은 다시 혼란에 휩싸여 서로 다투기 시작했지만, 릴리스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릴리스는 말을 마친 뒤, 경비병들이 만들어준 좁은 통로를 따라 탑승 복도로 향했다.
대형 우주선 관측실의 방폭 문이 아무 소리 없이 양옆으로 열렸다.
지나치게 첨단적이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기술력을 보면, 쿠로노가 로프라도스의 자원을 필요로 했던 이유도 자연스레 이해됐다.
여태 어디 있었던 거야?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탑승구엔 손님들이 많이 몰려 있더군요.
릴리스는 평소처럼 살짝 몸을 숙여 인사했다.
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마. 우리가 준비한 수송기의 자리를 침식체가 빼앗아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저들은 늘 저래... 천국에 가더라도 지옥보다 덜 따뜻하다고 불평할 사람들이야.
승객분들은 모두 준비가 끝난 건가요?
릴리스의 말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 널 기다리고 있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실례를 범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출발하시죠.
릴리스의 말이 끝나자, 몬자노 부인은 벽면의 터치식 통신 장비를 조작해 조종실에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금속 바닥이 미세하게 떨렸다. <color=#ff4e4eff><b>그 진폭은 너무 작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b></color>
고체 로켓으로 이륙을 보조하는 구식 수송기들과는 달리, 이 냉핵융합 동력 수송기는 추진력을 보장하면서도 승객의 승차감을 고려한 설계를 갖추고 있었다.
수송기 바닥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짙은 구름층이 릴리스와 몬자노에게 중력을 벗어났음을 실감하게 했다.
순백의 색이 점점 옅어지더니, 차츰 남색으로 변하며 반짝이는 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기체가 방향을 틀자, 창문 너머 둥근 지평선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시야를 가로질렀다.
거대한 강철 꽃이 궤도 위에 높이 매달려 있었고, 날카로운 꽃잎은 햇빛의 일부를 가렸다.
저것이... 에덴 Ⅱ형 식민 함선이군요.
회색빛이 감도는 보라색 눈동자에 함선의 은빛이 아른거렸다. 그것은 완전히 폐쇄된 자가순환 생태계와 체계적인 생명 유지 시스템, 그리고 영점 에너지 동력과의 호환성을 갖춘, 인류의 우주 개척 꿈을 집약한 존재였다.
원래라면 미지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야 할 위대한 항해선이었지만, 이제는 황금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유물처럼 보였다.
최근 안건에 따르면... 식민 함선은 "공중 정원"이라고 명명될 거야.
적절한 이름이었다. 아니, 오히려 반어적인 이름이었다.
고대의 정복자들이 세미라미스 여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들여 공중 정원을 건설했던 것처럼, 지구를 떠나 떠도는 인류도 반응 없는 고향을 향해 마지막 자원을 바치는 헛된 경배를 계속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 식민 함선은 지구 동기 궤도의 종말 속 등대가 될 거야. 세계 정부와 군부는 저들만의 '지구 탈환' 계획을 세우겠지. 그리고 우리와 쿠로노의 대립도 더욱 첨예해질 거야.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돼.
부인의 어조는 마치 공중 정원의 우주 항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기체처럼 평온했다. 그것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최후의 유언처럼 들렸다.
알겠습니다.
전에 의원님과 말씀하신 그 거래는 성사된 건가요?
그녀는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함선에 매료된 듯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단지 승객 몇 명의 우선 대피 기회를 희생한 것뿐이야. 사소한 대가지.
어차피 그들도 언젠가는 공중 정원에 도착할 테니까. 나는 로프라도스에 공헌한 귀빈들을 절대 버리지 않아.
릴리스는 몬자노 부인의 말에서 미묘한 부조화를 감지했지만,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 이면에 감춰진 불길한 기운에 더 이끌렸다.
고모의 뜻은... 잠깐만요, 뭔가 이상해요.
릴리스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의 연기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상했다. 예를 들면, 왜 고모 곁에 자신만 있는 것인지.
그녀는요?
릴리스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작은 떨림 하나까지 조심스럽게 연기했다.
아... 미안하구나. 그녀는 우리와 함께 공중 정원에 가지 않을 거야.
내가 말 안 했나? 오블리크는 처음부터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에 불과했어. 그리고 거래는 이미 끝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