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프라도스
대서양 경제 공동체 지역 내
12월 24일
16:30 PM
이곳의 구조는 다른 로프라도스와는 달랐다.
고풍스러운 낮은 연립 건물들은 짙은색 벽돌로 지어져 고요함을 간직한 채,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황금빛 도시를 은은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쌓이며 세상의 가장 미세한 소리마저도 하얀 침묵 속에 스며들었다.
구도시의 거리는 마치 꿈결처럼 평온해 보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소녀가 조심스레 문을 밀자, 오래된 경첩이 삐걱 소리를 냈다.
찬바람이 문 안으로 밀려들면서 풍령이 흔들렸고, 맑은소리가 실내를 가볍게 울렸다.
아, 죄송해요...
소녀는 작은 실수에도 놀란 듯,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살짝 벌려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곧장 황동 손잡이를 꼭 쥐고 문을 닫아 실내의 온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로즈워터 양복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엘리너 아가씨.
깔끔한 차림의 남자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손님을 자리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그렇게 격식 차리실 필요 없어요.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오히려 제가 죄송한걸요.
영업시간에 오시는 게 당연한데요, 왜 죄송하세요?
손님께 맞춤 재단을 해드리는 건 제게도 즐거운 일입니다.
몬자노 부인의 주문이군요. 부인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지요? 장사도 잘 되시나요?
그는 이렇게 격식을 차리는 것이 어색했는지, 쑥스럽게 웃었다.
보시다시피, 바늘과 실로 밥벌이하는 직업이라, 카지노에 들를 여유가 없답니다.
카지노 소식은... 주로 손님들한테 듣곤 하죠.
괜찮아요. 도박 말고도 이 도시에는 좋은 것들이 많잖아요.
사장님처럼 평범한 일상을 즐기며 사는 분들도 많아요.
엘리너는 둘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고모는 잘 지내세요. 오늘 제가 가져온 이 주문도 고모가 본인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에요.
사장이라 불리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아주 잠깐 동요가 스쳐 지나갔다.
아, 그러신가요? 어디 보자…
목걸이 장식? 망토? 설마 모자 장식인가요?
소녀는 조용히 가방에서 비단 끈으로 묶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냈다.
다소 오래된 방식이었지만, 다이얼식 전화기를 사용하는 이 가게의 분위기와는 묘하게 잘 어울렸다.
역시 고모의 취향은 사장님이 가장 잘 아시네요.
소녀는 유리 진열대 위로 두루마리를 천천히 펼쳐 보였다.
중년 남자는 금테 안경을 가볍게 밀어올리고는 주문서를 읽어내려갔다.
여덟 인치짜리 코바늘 레이스 스카프와 깃털 장식...
마침 잘 오셨네요! 초겨울을 맞아 좋은 재료들이 새로 들어왔거든요...
로즈워터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선반에서 깃털이 담긴 나무 상자를 꺼내었다.
그리고 자주색 상자를 자랑스럽게 꺼내 그 안의 물건을 손님 앞에 펼쳐 놓았다.
이건 로프라도스 남부 반도에 사는 검은 꾀꼬리의 깃털이에요. 흔한 인조 깃털과는 완전히 다르죠.
게다가 내륙까지 절대 날아오지 않는 방울새의 깃털도 있어요. 이런 진귀한 깃털을 저희 가게에서 구하실 수 있답니다.
어떠세요, 한번 보시겠어요? 아니면 혹시 찾으시는 게 따로 있으신가요?
소녀의 시선이 검은 꾀꼬리의 깃털에 머물렀다. 실처럼 섬세한 깃털이 검푸른 깃대를 따라 늘어져 있었다.
모기마저 멸종한 세상에서… 아직도 산과 숲에서 새 깃털을 구할 수 있다니, 참 사치스러운 일이네요.
소녀는 미세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지금 우주를 향해 갈 수 있는 건 모두 이 땅이 우리에게 준 선물 덕분이죠. 별들을 향해 떠나기 전, 이 땅의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보답이 되지 않을까요?
로즈워터는 벨벳 위에 놓여 있는 깃털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한동안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 죄송해요. 불필요한 말을 했네요.
검은 꾀꼬리 깃털을 다시 상자에 넣은 가게 주인은 자신이 실례를 범했음을 깨닫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깃털로 할게요. 디자인은 전에 했던 것처럼 해주세요.
엘리너는 이내 평소의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 안목이 탁월하세요!
어울리는 레이스 원단 샘플을 가져와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홍차 한 잔 드릴까요?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휴게 공간에 특별히 준비해 두었거든요. 각설탕과 메이플 시럽은 테이블에 있으니 기호에 맞게 드시면 됩니다.
사장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가게 한쪽에 놓인 찻상이 눈에 들어왔다. 정교한 금속 주전자는 진열된 장식품 못지않게 우아해 보였다.
역시 사장님은 늘 세심하시네요. 이렇게 특별한 가게를 더 많은 분들이 알아야 할 텐데요.
"마드레", "영점 에너지 카우보이", "럭키 38"…
관광객은 물론이고, 이 도시 사람들조차 하루 종일 화려한 카지노 안에만 갇혀 있네요.
식사는 뷔페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정성 담긴 따뜻한 음료는 맛볼 수 없죠.
그녀는 마치 반가운 물건을 발견한 듯, 점장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녀는 차를 마시는 대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 이제 보니 카운터 밖에도 새 작업대가 생겼네요. 전엔 없었던 것 같은데요.
엘리너의 발걸음이 목재 탁자 앞에서 멈췄다.
실밥 정리나 재단, 소매 단추 고정하기처럼 간단한 수선만 부탁하시는 손님들도 계셔서요.
이런 작업들은 길거리 구두 수선처럼 카운터에서 바로 해드리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좋아하시죠.
활기차던 그의 목소리가 문득 한풀 꺾였다. 그 짧은 정적을 엘리너는 놓치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는데… 혹시 연회 참석 때문에 서두르셔야 하지 않나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레이스 샘플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창고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딸깍"
틀림없이 들었다. 작업대로 쓰던 탁자의 덮개가 열린 채 우아한 벽 장식물에 걸쳐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소녀가 조용히 탁자로 손을 뻗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긴 재단 가위를 집어 들자, 날카로운 날이 허공을 가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당신... 으악!
이윽고 밀려온 통증이 먹물이 번지듯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붉은 거품이 사장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고, 그의 목소리는 쏟아지는 검붉은 핏속에 잠겨 사그라들었다.
쉿... 폴라드 기관의 요원, 적어도 당신의 위장만큼은 완벽했어요.
자수가위, 재단용 긴 가위, 단추 구멍용 칼, 톱니날 가위...
도구를 이토록 완벽하게 준비했건만, 그것들이 당신의 죽음에 쓰일 줄은 상상도 못 했겠죠.
으... 쿨럭쿨럭...
뜨거운 피가 조끼를 적셨고, 남자는 괴로운 듯 몸을 비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사이로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 섬세한 재단사라고는 믿기 힘든, 건장한 체격이었다.
가위가 오른쪽 갈비뼈를 관통했다면… 비장만 찔렸겠네요.
날이 길어서 다행이에요. 덕분에 이 날카로움을 심장까지 전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사장의 입에서 포도가 으깨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뜨거운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액체는 마치 기관에서 우려낸 감로수 같았다.
어머, 말을 못 하시나요? 실수로 폐까지 찔러버린 모양이네요.
지저분하면 보기 좋지 않아요! 옷까지도...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사장은 본능적으로 몸을 추스르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핏줄이 불거진 손이 경련하며 앞으로 뻗었다.
제 드레스까지 더럽히시려고요? 치사하게 그러지 마세요.
소녀가 옆으로 재빠르게 피하자, 마지막 몸부림이 허공을 헤매다 끝나버렸다.
사지는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복숭아나무 마루 위에 쓰러진 그의 몸은 이미 생기가 사라져 버렸다.
귀찮네, 또 힘써야 하잖아.
사장의 양손을 붙잡고 손바닥 아래를 더듬거리자 거친 굳은살이 느껴졌다. 그것은 생전에 오랫동안 총을 쥐어 생긴 흔적이었다.
엘리너는 능숙하게 시체를 카운터 뒤 창고로 끌고 갔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공간에는 사장의 모든 비밀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는 이제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후...
소녀는 어둠 속에서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려, 손톱으로 불완전한 원호와 십자가를 그렸다.
그녀는 창고를 나와 문을 조용히 잠갔다.
에잇... 실수로 또 소매에 더러운 걸 묻혔네...
탄식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어두운 보라색 천 사이로 스며든 진홍빛이 점점 흐려지더니, 어느새 육안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동맥에서 뿜어져 나온 혈흔이 예상보다 크게 번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소녀는 핸드백에서 과산화수소 물티슈를 꺼내 바닥을 깨끗이 닦아냈다. 잠시 후, 가게 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해 있었다.
모든 걸 마무리한 소녀는 밀실에서 나와 가게로 돌아왔다.
사장님, 사장님?
로... 즈... 워... 터... 사... 장... 님?
소녀는 작업대와 진열장 사이에 서서 고개를 기울인 채 사장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그러나 금속과 원목으로 된 벽에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실례했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영업할 리가 없지...
그럼 나도... 아,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엘리너는 카운터 위의 물건들을 확인했다. 검은 깃털 사이로 어두운 붉은빛이 빛나고 있었다.
어차피 고모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검은 꾀꼬리의 깃털 색은 원래 검정과 붉은색이 섞여 있으니까.
그리고 작업대 안에 있는 극비 문서도 고모께 선물로 가져다드릴 예정이다.
샘플은 내가 받아둬야지. 레이스는 아직 필요 없어.
엘리너는 보라색 상자를 핸드백에 넣은 후, 고개를 들어 진열창 너머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쌓인 눈이 연립 주택들의 본래 색을 가리고 있었다. 엘리너는 지평선 너머의 도시 중심이 또 다른 모습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비스듬히 내리는 눈발이 공중으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만들어냈다. 마치 순백의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듯했다.
(공중 정원의 돔 아래에서... 살아있는 새들을 다시 볼 수 있겠지.)
(적어도, 고모는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엘리너가 커튼에 스치자, 유리에 장식이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소녀는 가게를 떠났다.
양복점이 있던 골목을 돌아서자 확 트인 거리 풍경이 보였다. 내리던 눈은 이미 멎어 있었다.
세련된 간판과 시설이 건물 사이를 수놓고 있었지만, 거리의 행인들은 그것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그들은 따뜻한 실내로 돌아가 칠면조와 에그노그 잔치를 즐기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너무 성급해 보였다.
정면에서 다가온 사람과 부딪힌 소녀는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 사람이 들고 있던 꾸러미도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드려야죠. 걸으면서 딴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가죽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이 부드럽게 포장지를 스쳤고, 금박 문양이 빛을 반사하며 은은하게 빛났다.
물건 여기 있습니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상대는 재빨리 꾸러미를 받아 들고 짧게 감사를 표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네? 아,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 되세요.
상대방은 예의상 응답을 했지만, 모든 표정이 후드 아래에 감춰져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둘은 스쳐지나 각 자의 목적지로 향했고, 두 개의 신발 자국이 눈 위에 평행선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어라... 치마가 젖어버렸네.
소녀는 고개를 숙여 치맛자락에 묻은 눈 자국을 살피며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