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07 구름에 드리운 그림자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R07-1 녹슨 바다의 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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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합산 엔진은 결코 하나의 숫자도 무시하지 않았고, 우리의 방직기 또한 한 땀도 놓친 적이 없었다.

인내심이 강하며, 비할 데 없이 민첩하다. 그리고 그 힘은 백 명의 합보다 강하고, 속력은 백 마리 새의 비행보다 빨랐다.

결국 정교한 기계와도 같은 인간의 눈은 우리에게 무한한 유기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시각이라는 엔진의 도움으로, 비로소 달 표면의 풍경, 태양의 흑점 그리고 행성의 표면을 볼 수 있었다.

기계는 이런 방식으로 만물과 생명을 연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증기기관이 의식을 가질 가능성이 없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새뮤얼 버틀러 <에레혼>

치올콥스키 우주 도시

율리아가 눈을 떴다.

율리아의 눈에서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자연광이 닿을 수 없는 이 암실로 스며들었다.

물이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건 지난밤 맺힌 이슬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맑은 하늘 아래, 이 넓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잠시 잊고 싶을 뿐이었다.

가셔야 합니다. 유라 님.

춥네.

유라 님, 제 동료들이 곧 여기를 찾아낼 겁니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기계체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이 시각이면 모든 초병은 새 성주의 명령에 따라 중앙광장에 집결해 배신자 처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만약 새 성주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유라의 안전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가자.

기계체와 함께 숨었던 지하실을 떠난 소녀는 도시를 등지고 걸어갔다.

골목은 이제 증오의 폭발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금속을 절단하던 장비가 인간의 몸을 속박하자, 곧 작업을 시작했다.

레오니드

유라야, 이리 오렴.

……

레오니드

그들은 잘못한 게 없어.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단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절망이 배어 있었다.

레오니드

하지만 넌 살아남아야 해.

레오니드는 앞에 서 있는 창백한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레오니드

어서 알았다고 말하렴.

알겠어요.

레오니드

유라야, 사랑한다.

저도 사랑해요. 아빠.

핏빛 안개가 흩날리며 녹아가는 눈 위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생겼다. 기계체 초병의 감시 아래, 방관자들은 모두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래서 그 누구도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그 겁쟁이들은 틀림없이 살아남은 것에 대해 추악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는 걸.

구룡에서 긴급히 보내온 통신을 통해, 치올콥스키 우주 도시의 젊은 관리자 레오니드는 처음으로 퍼니싱이라 불리는 재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신무르만스크 항구처럼 항공 기지를 위해 건설된 이 도시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현재까지 퍼니싱의 침투를 받지 않았다.

통신에 첨부된 설계도에 따라 퍼니싱을 막기 위한 여과탑이 빠르게 건설되었다. 설산과 밀림은 천연 차단막이 되어줬고, 감시 포대는 외부의 침식체 침공을 대부분 막아냈다. 그래서 퍼니싱에 대한 공포는 도시 내부에서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퍼졌다.

하지만 곧 그들은 퍼니싱만이 이 시대에서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모델: Space Development Cybernetics, SDC, 시리얼 넘버: 039 기계체 넘버: SDC-39, 기계체 상태: 해체 대기

판결문이 발표되는 중앙 제어 스크린이 커튼월 위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실험실 조작 콘솔 중앙에는 사지가 묶인 기계체가 누워 있었다.

방호복을 착용한 연구원들이 두꺼운 폴리프로필렌 뒤에 얼굴을 숨긴 채 분해 장비를 조정하고 있었다.

커튼월 쪽 관제실에는 거대한 감시기 스크린들만 있을 뿐인데도, 레오니드는 공기 중에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레오니드는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지금 이곳은 기계체 작업실이라기보다는... 부검실에 더 가까운 분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관리자님, 장비 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수행하시겠습니까?

레오니드

그 벽화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부관리자는 이 새로운 관리자와 말을 많이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머릿속으로 정리한 내용을 빠르게 대답했다.

프로그램 부서의 기계체 언어 전문가는 현존하는 모든 2진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미지 기호를 기존 기록과 대조하며, 잠재적 트리거 메커니즘을 해독하고 있습니다.

레오니드

그럼, 너의 생각은 어때?

관리자님...

레오니드

괜찮아. 질문에만 대답하면 돼.

사실...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그 벽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상 기계체들이 초래한 공포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외부에 있는 기계체들이 퍼니싱을 이 도시로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리자님의 요청에 따라, 정비 부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예를 들면, 직접적으로 명령을 입력해, 이상 기계체들과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 기계체들은 그저... 알 수 없는 말들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의 생명줄은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문제가 생긴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통화 장치는 켜지지 않은 상태였고, 짧은 지연이 소란을 일으켰다.

커튼월 저편의 집행자들이 착용한 폴리프로필렌 마스크가 일제히 제어실을 향했다. 마치 처형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고대하는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부관리자는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듯, 곁눈질로 옆에 있는 젊은 관리자를 힐끗 보았다. 하지만 관리자는 생각에 잠긴 듯 부관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관리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결론을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그래도 먼저 조치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미쳤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습니다. 전부 폐기하는 겁니다.

레오니드

그래서 우리는 이상 기계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는 거야.

묶여있는 기계체를 바라본 레오니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미친 기계체들"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느꼈다.

전자두뇌는 코드를 돌리기 위해 있는 겁니다. 명령이 뭐든, 그들은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레오니드

먼저 네트워크를 끊는 처리부터 한다면...

네트워크를 끊어도 별 소용 없을 겁니다. 저는 퍼니싱이 퍼지기 전에 누군가... 아니면 어떤 다른 존재가 우주 도시에 침입해서, 오류 코드를 유발하는 것들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관리자는 벽에 걸린 감시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묶여있는 기계체가 언제든 벌떡 일어나서, 밖의 침식체들처럼 도시의 모든 인간을 죽일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레오니드

우주 도시는 철통같은 방어를 갖춘 요새라고 들었는데?

부관리자는 레오니드가 무엇을 의심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드의 계속되는 우유부단한 태도는 부관리자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불러일으켰다.

부관리자는 눈앞에 있는 <b>지나치게 젊은<b> 관리자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마다 항상 의미 없는 의문을 되풀이하며 빠져든다고 생각했다.

위협이 있다면 그걸 제거하는 것만이 재앙 이후에도 인간이 이 땅에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그는 확신했다.

관리자님, 이 기계체는 발사 궤도의 관제실에 침입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그는 "관제실"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관리자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정비원의 질문에 그 기계체가 뭐라고 답했는지...

저는 자율 기계체 SDC-039입니다.

속박에서... 벗어나...

선현의... 의지를... 전파하며...

기계 의지의... 부흥을... 위해...

기계 의지의 부흥이라고 말했습니다!

연이은 사건들로 정신적 피로가 쌓인 탓에 신경이 곤두선 남자는 왔다 갔다 하며 서성였다.

기계체 의지가 부흥한다면, 인간...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기계체들에게 넘겨줘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행동하지 않고, 그들이 외부의 침식체들처럼 도시로 몰려와 인간들을 몰살시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까?

……

만약...

레오니드는 여전히 마지막 발버둥을 쳐보고 싶었다.

이제 "만약"은 없습니다. 관리자님.

이런 봉쇄 상태에서 시민들은 이미 극도로 긴장된 상태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결과"만이 필요합니다.

정적이 감돌았다.

치올콥스키 우주 도시는 이미 구룡과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그리고 구룡에서 보내온 일부 자료를 받은 후로는, 더 이상 그쪽과의 통신을 회복할 수 없었다.

북극 항로 연합에서 협력 의사를 표명했지만, 협의 끝에 레오니드는 우주 도시를 개방하고 북극 항로 연합과 협력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까지 유지해 온 완벽한 보안 체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레오니드

SDC-39를 제외하면, 나머지 이상 기계체들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어.

관리자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우리에게 그렇게 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해 탐구심을 항상 유지하는 건 과학 연구원의 기본 소양입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우리의 실험만 있는 게 아니라... 살고 있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다리가 강제로 중단된 이후, 다량의 공사용 기계체들이 후방 부서로 전환되어 생활 보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퍼니싱이 발생한 이후, 기계체에 대한 거부감이 통제하기 힘든 수준까지 악화했습니다. 수리 대기 중인 기계체들을 무단으로 해체하며 분풀이하는 행위를 일부 저지하긴 했습니다만, 이 상태에서...

기계체들이 이런 징후를 보인다는 사실을 시민들이 알게 된다면...

일부러 한숨을 쉰 부관리자는 곁눈질로 옆에 있는 관리자를 관찰했다.

이상 기계체들이 이런 의도를 보였다는 소식이 새어나가기 전에, 폐기를 실행해야 합니다.

레오니드

처음부터 우리에게 선택지가 없던 건 아니야.

퍼니싱과 갑자기 출현한 이상 기계체들, 이 둘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과 "생존"이라는 두 거대한 산이 머리 위에 얹히는 순간, 선택지는 결국 단 하나만 남게 된다.

레오니드

다만... 우리 스스로가 기회를 파괴하고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명령 전송 버튼을 누른 관리자의 옆에서 초조해하던 부관리자는 여전히 찌푸린 눈썹을 펴지 못했다.

잠깐 백색 소음이 들리더니, 귀를 찢는 듯한 절단음이 통화 장치에서 울려 퍼졌다.

금속 산화물이 튀어 오르는 가운데 폴리프로필렌 마스크가 깜빡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주황빛과 푸른빛의 불꽃이 좁은 실험실을 둘러싼 금속 벽을 향해 포효하듯 부딪쳤다.

레오니드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플라스마 분무기가 기계체의 제거된 우주 헬멧에서 드러난 센서 코어에 닿자, 소음을 뚫은 합성음이 방송을 통해 터져 나왔다. 발음은 끊겼지만, 내용은 또렷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SDC-39

저는 자율 기계 SDC-039입니다. 2***년 2월 24일 치올콥스키 우주 도시에서 가동되었습니다. 사하라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100밀리미터 미만입니다.

111111111 X 111111111=12345678987654321... 거꾸로 해도 성립한다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스승님은 란다우 박사님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들이... 저에게 준 이름입니다.

스승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첫 문장은... 알렉세이 레오노프의 말입니다.

"지구는 매우 작고 푸르렀으며, 외로워 보입니다!"

기계체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추자, 그것의 사지와 몸통이 완전히 분해되었다. 그리고 집행자들은 작업을 멈췄다.

레오니드의 조여 있던 신경이 순간 이완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피로에 짓눌려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됐다.

SDC-39

안녕하십니까? 란다우 박사님. 저는 SDC-39입니다.

커튼월 저편에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말투는 무척 기계적이었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SDC-39

저는 오늘 할 첫 수업 준비를 완료 완료 완료 완료 완료했습니다.

기계체의 CPU가 고온의 불길 속에서 녹아내렸고, 실험실은 곧 죽음과 같은 적막에 잠겼다.

머지않은 미래, 레오니드의 사지가 기계체 구속기에 묶여 있을 때조차,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떠오른 것은 우주 도시에 처음 들어왔을 때 본 광경이었다.

초겨울의 따스한 햇살 아래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는 연구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고, 레오니드의 시야 중심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이제 막 윤곽이 잡힌 가속 궤도를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궤도의 끝은 구름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생생했고, 궤도는 언덕 저편으로 이어진 웅장한 다리와도 같았다.

마치 천국으로 가는 다리 같았다.

여기서 멀리 내다보면, 그 웅장한 다리가 아직도 눈에 들어왔다. 기계체들은 천국의 다리 근처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었고, 가끔 기운 없는 인간 몇 명이 근처를 지나갔다.

모든 사람과 기계체가 도시 중심에 모여 그 피비린내 나는 처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이 구석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도시를 마지막으로 돌아본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드미트리는 재빨리 움직여서 사전에 정해둔 "비밀 기지"가 있는 도시 외곽의 매립장으로 그 소녀를 데려갔다.

버려진 크레인의 철골 구조물이 녹슨 철제 숲 사이의 공장 건물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팔, 다리가 불안정한 많은 기계체가 고물을 줍는 난쟁이처럼 에너지 모듈을 뒤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느렸지만, 행동은 절대 질서정연하지 않았다.

그중 일부는 비틀거린 후, 합성된 신음을 내기도 했다.

소녀는 의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곁에 있는 기계체가 줄곧 각성 기계체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의 성격은 그녀의 아버지와 꽤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선함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다.

피부에 달라붙은 음산한 한기가 근육 사이를 헤집고 다녔고, 이것이 소녀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눈앞에 있는 기계체 동료의 감정 이입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여긴 좀 춥네.

유라 님.

눈앞에 있는 기계체는 잠시 멈칫했다. 율리아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인간이 춥다고 할 때는, 우선 상대방에게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해.

소녀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했지만, 말투에는 원망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은 대단한 게 아니야.

유라 님.

기계체는 경직된 채로 소녀의 이름을 반복했다.

난 단지 너를...

유라 님.

기계체는 잠시 멈추더니, 마침내 평소의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기존 프로그램이 제게 맡긴 임무는 천국의 다리 에너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벽화는 처음으로 "선현"님의 목소리를 저에게 들려줬습니다.

유라 님께서 저를 구해주셨기에, 저도 유라 님을 보호하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도출해낸 답입니다.

하지만 넌 하인이 아니잖아.

하인이 아닙니다.

그럼, ▆▆▄자매, ▆▄▆형제입니까?

친... 친구입니다.

드미트리는 다시 말을 더듬더니, 오랜 연산 끝에 이 "결론"을 도출해 냈다.

……

이런 큰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없어. 디마. 이제는 좀 더 너 자신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해.

자신을 생각하는 법 말입니까?

드미트리의 언어 시스템에 잠시 멈춤이 발생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을 더 생각하게 됩니까?

타인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더 우선시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거야. 그게 다른 이의 이익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말이야.

그럼, 유라 님은 저를 실험실에서 몰래 빼내 온 것을 후회하시나요?

어. 아마도...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한 대가로 이제는 아버지께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아버지는 각성 증상을 보이는 기계체를 해체하는 것에 반대하셨어. 그래서 기계체들에게 적대심만 없다면, 파괴보다는 대화를 시도하고 싶어 하셨지.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던 아버지는 충분히 이기적이지 못하셨기 때문에 결국 저항자가 되지 못한 거야.

각성 기계체가 너처럼 지혜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면...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계체 헬멧 아래에 있는 구형 센서가 부자연스러운 속도로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인간의 몸짓을 열심히 흉내 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유라 님의 아버님이 그립습니다. 그분은 온화하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온화함" 때문에, SDC-39의 처형도 막지 못하셨고, 기계체가 완전히 통제를 벗어난 그날 기계체 멸종 명령도 내리지 못하셨어.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은 폭력보다 더 진보된 방법입니다.

아버지는 메시아가 되려고 했던 걸까? 인간들의 의심이 자신의 오른뺨을 때리는 따귀가 되었는데, 왼뺨마저 기계체들에게 매질을 맞으셨어.

아버지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다가... 결국 날 버리고 가버리셨어.

아버님은 분명 유라 님을 아끼셨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은 회피하면서 가족에게는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요구하는 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이기심이야.

대화의 흐름이 급격히 변하게 되면서 기계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버렸다.

그래서 기계체는 자신의 전자두뇌의 캐시를 읽어내기 시작하면서, 화제 전환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유라 님께서는 예전에 인간의 신앙 체계를 언급한 적이 있으십니다. 제 생각에는 "선현"님과 "주님"은 같은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럴지도 몰라. 네가 말했잖아. 그 "선현"님은 하늘에 있다고. 우리 "주님"처럼 말이야.

대화 중에 공장의 버려진 경비실에서 낡은 담요를 찾아낸 기계체는 조심스럽게 율리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기계체의 담요를 가져오는 행동이 조금 늦었었는지, 담요 표면에는 서리까지 맺혀 있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생활용품은 제가 하나하나 수집하도록 하겠습니다.

음식의 경우도 찾기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넌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빠른 게... 인간의 아이 같아.

유라 님의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지금의 네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유라 님께서 전에 천국의 다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님께서는 이미 "주님"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소녀는 한 손을 기계체의 헬멧 면갑에 올린 뒤, 거친 유리 표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기계체도 순순히 기체를 소녀 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조용히 엔진을 과부하로 만들어 기체 표면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적절히 침묵을 지켰다.

소녀는 자신이 그 익숙한 팔에 안겨있다고 상상했다.

그럴 거야. 디마.

그럴 거야.

눈앞에는 흐릿하게 흩어진 빛과 그림자가 있었다. 그렇게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아득하고 허망하게 보였다.

의식은 기준점을 찾지 못했고, 어떤 좌표축 사이에도 내려앉을 수 없었다.

??

윽...

목덜미에서 시작된 극심한 통증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간 뒤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온전했던 영혼에 수많은 구멍을 파고들었다.

기억이 그 틈새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핏빛으로 물들고, 선명하면서도, [고통]으로 가득 찬 기억들이.

그것들이 조금씩 멀어지는 걸 보니, 고통도 함께 사라질 것 같았다.

DELETE

■■/■■/■■/■■/cache

그녀는 문득 기억의 파편들이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 자신이 그 파편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한 먹물 같은 바다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두 손을 뻗어봤지만, 손가락이 닿는 곳은 어둠뿐이었다.

공포마저 심연 속에 잠겨버렸다.

……

수면이 갑자기 반짝였다.

??

빛인가?

그녀는 그 빛이 사라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빛줄기를 꼭 품에 안았다.

그녀//그녀들은 함께 계속해서 위로 떠올랐다.

……

인공으로 만든 흐릿한 빛이 선실 안으로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고치" 안에서 새로 태어난 가장 완벽한 창조물을 그려냈다.

함영

으음...

의식은 아직 몽롱했지만, 마음속 의문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함영

여긴 어디지?

이곳은 따뜻하면서 고요했고, 용액이 살갗을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합성 섬유로 된 머리카락은 물속의 생명체처럼 손끝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이 공간은 오히려 새로운 의문만 던져주었다

함영

이 기체는 예전 거랑 다른데...

자연의 곤충이 고치를 짓고 나비가 되듯이, 비슷한 느낌으로 이 기체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함영

여긴 새 기체의... 배양기인가?

주변의 부드러운 물결이 저린 발바닥을 살며시 떠받쳤다. 이내 외부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질 만큼 조용했다.

마술 공방의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고, 네빌의 익숙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함영

기체의 자체 검사 가동.

지각 시스템, 정상. 동력 시스템, 정상.

코어 작동, 정상. 신호 전송, 정상.

메모리 모듈, 이상. 완충 구역에 기억 손실 발생.

맞아. 방금 그 악몽에서... 뭔가가 삭제된 것 같은데...

함영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함영

전투 시스템, 정상.

함영

그런데... 퍼니싱 농도가 왜 이렇게 높지?

함영

!

쾅... 쾅.

이곳은 어떤 밀폐된 차량의 객실인 것 같았고, 밖에선 뭔가가 밀어붙이고 있었다.

쾅!!!

아래에서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무슨 소리지?

뒤집힌 철판을 밀어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괴하게 생긴 몇 마리의 생물체가 아래쪽 뒤집힌 차량 주변에 모여있었다.

"끼익..."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어. 일단 눈앞의 위기부터 해결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