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용서... 못해...
거대한 보육사 로봇이 굉음을 내며 쓰러졌고, 마지막 억울함은 전자 여음과 함께 어두운 지하실에서 사라졌다.
간신히 적을 쓰러뜨린 밤비나타는 기체를 지탱할 신념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제야 바네사가 밤비나타의 심각한 기체 손상을 발견했다. 가능하다면 통제할 수 있을 때, 기체 손실을 계속 가중시키는 전투 행위는 피했어야 했었다.
순환액관이 몇 군데 파손돼서 바로 처리해야 하고 다리 부품도 교체해야 해.
그런 표정 하지 마. 이래 봬도 지금은 보조형 구조체야.
넌 여기서 바비 인형과 심층 연결을 유지하는 게 좋겠어. 일단은 밤비나타의 의식의 바다를 안정시키고 있어, 난 수송기로 돌아가 응급 재료를 가져올게.
알았어.
베라의 하이힐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자, 크고 둥근 지하실은 다시 적막해졌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위해 후방을 엄호했던 전장에서 밤비나타가 자신을 돌봤던 때처럼, 바네사는 밤비나타를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주인님, 밤비나타는 길고 긴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밤비나타는 큰 집에서 주인님과 함께 살았고, 집에는 항상 실험실 가운을 입은 아빠와 엄마도 있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주인님은 밤비나타와 키가 같았어요.
주인님은 밤비나타에게 낮잠 잘 때는 배를 덮어야 하는 것과 커피를 소리 없이 타는 방법, 머리를 편안하게 다듬는 방법을 가르쳐 줬어요.
그리고 주인님은 지금의 밤비나타가 거의 들을 수 없는 말들을 많이 했어요. 노력한 후의 막막함, 실망, 억울함... 밤비나타는 그것들이 주인님한테서 나타나는 것이 싫어서 그것들이 들릴 때마다 주인님 곁에서 멀리 쫓아내려 했어요.
주인님이 춤추는 모습, 잘 자라고 인사하는 모습, 책을 보는 모습... 주인님은 모르시겠지만, 밤비나타는 몰래 그 모습들을 그림으로 그렸어요. 하지만… 그 이후,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나요.
밤비나타는 주인님 옆에 밤비나타를 그려 넣고 싶었어요. 그런데 밤비나타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야 했을까요?
밤비나타는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없어서 어떤 신분으로 소원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그 꿈을 꾸게 된다면 엄마 아빠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밤비나타가 주인님 옆에 있고 싶은 건, 제 생각이고 꼭 해야 할 일이라고요.
명령이 없더라도... 아니요. "말을 잘 듣는" 것과 어긋난다고 해도, 버림받을지라도, 밤비나타는 이 소원을 주인님께 전달하고 싶었어요.
아직 다 그리지 못한 그림...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런 공백 따윈 남기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늘에 얼굴이 가려진 바네사는 밤비나타에게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바네사는 문득 자신이 잊으려 했던 수많은 나날에 항상 연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위로해 주고, 바라봐 주고, 인정해 줬다.
자신의 고독이 더는 혼자서 핥는 상처가 아니길, 자신의 감정을 말 안 해도 알아주길 바랐다.
이런 기대를 품고 첫걸음을 내디뎠는데, 왜 연푸른 두 눈은 오히려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거지?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실패자"라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주도권을 이용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 그러면 연푸른 그림자의 시선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름길을 이용해 얻고 싶은 결과를 얻은 후,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렸던 답이 찾아왔다.
음, 어제 오후 생명의 별에서 온 이후로 우린 밤비나타를 쭉 관찰했어.
중간에 몇 번 깨어나서 로사가 의식 교정을 진행했어. 지금 결과로 추단할 땐, 밤비나타의 의식의 바다는 이번 부상으로 인해 크게 변이된 부분은 없어.
변이된 부분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보고서에서 밤비나타가 지상에 있을 때, 기억 데이터 회상과 적 로봇에 의해 조종된 상황이 있다고 했었지?
정상적인 상황에서 구조체 의식의 바다가 이에 인해 편차, 혼란 혹은 의식 데이터 잔류가 생기는 건 흔한 일이야. 하지만 밤비나타의 지금 상태는 평소와 비슷해.
손상은 대부분 역원 장치에서만 나타났고, 다른 후유증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그리고 너의 보고서와 우리가 획득한 자료에 따르면, 로봇의 "조종" 행위는 사실상 로봇 자체의 실험 기능 연장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 너희들이 회수한 전자두뇌에서 완전한 실험 조작 기록과 조작 프로세스 코드가 존재한다는 게 증거이고, 너희가 받은 공격 행위도 유사해.
그리고 기억 회상은 아마도 역원 장치와 의식의 바다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고농도 퍼니싱의 충격을 받아서 생긴 급성 증상일 수 있어.
뭐, 밤비나타가 참여했던 그 실험도 원인에서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까지 말한 아시모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로봇이 밤비나타의 역원 장치에 간섭할 때, 아마도 실수로 어떤 실험 반응을 일으킨 것 같아.
그래서 역원 장치를 복구하고 나니 관련 증상이 모두 사라졌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외장 기억 모듈에 이번 임무의 기억 데이터가 있어?
아쉽지만 없어. 구조체가 적에게 조종당한 걸 알고, 밤비나타의 외장 기억 모듈 속 캐시 내용을 포맷 처리한 흔적이 있어. 그리고 이 임무에 참여한 케르베로스의 멤버도 심문에 불려 간 것 같아.
포맷? 누가 내린 명령이지?
……
쯧, 역시 내 생각에도 이런 권한이 있는 건 그놈뿐이야.
포맷되기 전 일부 데이터 스냅을 수집했어. 로봇 전자두뇌 속 데이터를 분석한 후, 구조체 기억상실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길 빌어야지.
그러니까 회수물은 너한테로 온 배달된 거야?
그래. 다른 질문이 없으면 회수 샘플 분석하러 갈 거야.
아시모프 님? 실례할게요.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하산 의장님께서 회의실로 와달라고 하시네요.
알겠어. 바로 갈게.
아시모프는 책상 위의 자료를 집어 들어 관찰실을 떠나려 했다가 두 걸음 내딛고 또다시 돌아와 바네사에게 내실 문을 가리키며, 안에 누워 있는 밤비나타를 데려가라고 눈치를 줬다.
밤비나타. 가도 된대.
주인의 부름에 휴면 중이던 구조체가 눈을 떴다.
네. 주인님.
오늘은 다른 일이 없으니, 바로 대기실로 돌아가.
……
왜?
밤비나타가 임무 과정 중에 잘못을 저질렀나요? 외장 기억 모듈의 데이터가 주인님의 조작 기록이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네가 깨어나기 전에 외장 기억 모듈을 가져가서 정비했을 뿐이야.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아.
알겠어요.
……
……
……
……
저기, 날 감시하는 건 반대하지 않지만, 제발 내 시야 범위 내에 들어오지 말아 줄래?
요 며칠 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눈에 보이기만 하면 손이 근질거리거든.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
너희들은 소대로 복귀해.
명령을 받은 두 명 구조체 병사는 즉시 방을 나갔다. 견고한 문이 다시 닫히자 그제야 마음 편히 의자에 앉은 베라는 통신 너머의 사람이 현 상황을 설명해 주길 기다렸다.
심문은 끝났다. 너의 의식의 바다에는 이번 전투로 인한 후유증이 없으니 잠시 후에 이곳을 떠나도 좋다.
총사령관은 처음부터 결과가 이럴 거라는 거 알고 있었지.
글쎄. 그래도 프로세스는 필요한 거니까.
하하, 그래?
내가 쿠로노의 누군가와 사적으로 접촉할 기회도, 접촉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지금부터 그래도 돼.
무슨 뜻이야?
앞으로 너의 모든 사적 접촉은 특별히 허용된 거로 간주될 거다. 임무 일지를 두 개 작성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중 하나는 암호화 채널로 직접 나한테 보내면 돼.
그동안은 다른 "필요 프로세스"가 있겠지만, 너한테 특히 케르베로스의 대원들한테 실질적인 피해는 주지 않겠다고 보장하지.
총사령관이 추가로 약속한 그 물건은?
그건 별개다. 암호화 통신에서 말했듯이 회수물을 상납하기 전에 처리만 잘해준다면, 당연히 다음 단계 준비에서 착수하게 될 거다.
과학 이사회에서 보고서가 나오면 결과도 곧 알 수 있겠지.
알겠어.
쿠로노 쪽에서 아무도 연락 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연락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누군가가 미끼를 던졌을 때, "낚이기"만 하면 돼.
다른 질문 없지? 그럼, 네 심문은 이것으로 끝이다.
구조체의 운명은 잘 알고 있지만, 베라는 누군가의 손바닥에서 놀아난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꼈다.
하지만 대기실에서 소란을 피우며 자신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21호와 녹티스를 생각하니 이번 진흙탕에 뛰어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 이게 누구야? 그 잘난 베라 대장 아니야? 심문 과정이 힘들었나 봐?
어라? 굳이 대원을 따라 지상 임무를 맡겠다던 백로 소대 지휘관 아니야? 조정 받는 것까지 직접 데려다주고, 바비 인형에게 한결같이 지극 정성 다해주는데?
손에 익은 장난감일 뿐이야. 새 인형을 구할 때까지 두어 날 더 가지고 노는 건 정상이지.
그래?
바비 인형을 잃어버렸을 때, 초조해서 입까지 비뚤어진 게 누구였더라? 그 "예쁜" 얼굴에서 그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다니 정말 잘 봤어.
베라의 야유에 바네사의 눈살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하지만 바네사가 반격을 하기도 전에 베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주인과 하인의 멋진 공연 잘 봤어. 행운을 빌게. 고귀한 아가씨."라는 말과 함께 대화를 끝냈다.
바네사는 노여움을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고는 가볍게 웃었다.
하, 피차일반이네. 너 같은 구조체랑 따지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야.
베라와 바네사 둘은 말로 계속 싸웠다. 하지만 밤비나타는 공기 중에서 팽팽한 분위기 대신 어색한 케미를 느낄 수 있었다.
밤비나타. 가자.
네. 주인님.
얌전한 인형이 주인과 같은 보폭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로 복도 세 개를 지나면 백로 소대 휴게실에 돌아갈 수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복도를 가득 채웠고, 차례로 걷고 있던 밤비나타와 바네사의 그림자가 벽에 비쳤다.
얌전한 인형이 주인과 같은 보폭으로 시종일관 전방의 주인을 따라갔다.
그녀가 이 몸이 필요하다면, 그녀가 이 이름을 불러주기만 한다면...
어떤 내일을 반복하더라도 밤비나타는 공백 속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