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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R03-01 환통의 잔영

>

문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문 한 짝이 나타났다.

그리고 큰 소리와 함께 그 문이 닫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

넌 참... 사람을 실망시키는구나.

……

너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가치를 낭비할 뿐이야.

타인의 심혈을 짓밟은 거라고.

……

쳇, 네가 이런 식이면... 진심으로 너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

가게 놔둬!

손에 들고 있던 단말기의 화면이 밝아지더니 규칙적인 통신 알림이 울리며, 미처 시작도 하지 않은 꿈에서 깨어났다.

……

잠들었었나.

상처가 어느 정도 완쾌됐지만, 생명의 별 의사가 보름 정도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바람에, 오늘에서야 익숙해졌던 병실을 떠날 수 있게 됐다.

의도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지만 어떤 전투 임무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가 평화로워진 게 아니라면, 분명 누군가의 시시한 지시 때문에 그녀의 근무 시간이 휴양 시간으로 된 게 틀림없다.

바네사는 자세를 가다듬고 잠깐의 휴식으로 인해 헝클어진 머릿결을 빠르게 정리하고 근무 태세를 취했다.

그녀는 모든 정리를 끝내고 나서 통신을 수락했다.

백로 소대의 바네사 지휘관님이신가요? 시간 괜찮으시면, 소대 충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도 될까요?

말해.

저희 쪽에서는 충원 신청을 받지 못했는데요. 혹시 제출 프로세스에 문제가 있었던 건가요?

전에 보내준 후보 리스트를 체크했는데, 그중 테슈를 대체할 수 있는 적합한 구조체가 없다고 생각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 적절한 인원을 계속 찾아볼게요. 하지만 엘리트 소대 대원이 잠시 공석이 되는 건데, 정말 괜찮나요?

물론 결정권은 소대 지휘관님께 있지만, 임무의 난이도나 독립성 문제를 고려해 보면, 임시로 적절한 대원을 선택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어요.

고려해 볼게.

밤비나타의 상태는 어떤가요? 어제 보고서 내용을 보면...

전과 같아. 외장 기억 모듈에서 다시 읽게 하면 문제없어.

전투 데이터는 외장 기억 모듈에 고정으로 입력됐기 때문에 전투 성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야.

통신이 끝나는 대로 밤비나타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

밤비나타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상 상황이 여전히 심각해서 조만간 임무가 배치될 겁니다.

당분간 백로 소대 충원을 추진하지 않기로 하셨다면, 안전을 고려해서라도 현역 대원의 상태를 잘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어.

통신을 마친 바네사는 수십 명의 후보 자료가 있는 단말기를 옆에 놓았다.

구조체의 프로필과 자료가 빽빽이 표시된 단말기 스크린이 어두워지며 위의 내용도 따라서 희미해졌다.

참모부 부하 인원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테슈가 떠나자 지금 백로 소대의 소속 구조체는 밤비나타뿐이라 전술의 시행이나 전투 강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지휘관으로서 바네사는 이 상황을 일찍이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원 충원 신청을 제출하지 않은 건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충실한 장난감으로 키울 수 있을까?

잘난 수석이 자주 사용하는 이성적이지 못한 행위와 우스꽝스러운 가치 측정법과 같은 어리석은 방법으로 거짓된 "가족 놀이"를 한다는 건 바네사에게 맞지 않았다.

모두가 밤비나타처럼 바네사의 말에 완전히 복종한다면, 모든 것이 편하고 효율적일 거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장난감이 왜 자기 생각을 가지려고 하지?

그것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면서까지 배신하고 싶었던 건가?

테슈가 바닷가에서 걸음을 멈추기 전에 바네사는 이 말을 꼭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방금 시작도 하지 못하고 깨어난 꿈을 떠올리며 왠지 모를 초조감에 사로잡혔다.

참으로 기분 나쁜 꿈이야.

주인님, 오늘 어디 불편하신가요?

표정과 옷차림이 평소와 다를 바 없고 걸음걸이도 여느 때와 같았지만, 바네사의 몸에서 감도는 연한 향수와 함께 초조한 아우라가 공기 중에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파란 생체공학 동공은 주인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관찰하며, 고민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했다.

기체에 문제없지?

외장 기억 모듈의 기억 데이터를 읽었어요. 데이터 동기화 범위는...

직접 체크할게.

네. 주인님.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외장 기억 모듈을 단말기에 연결하고, 각 기억 영역의 기억 데이터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전투 데이터 읽기 속도가 이전보다 늦어. 오랫동안 지상에 있어서 유지 보수 빈도가 떨어졌기 때문인가?

밤비나타가 제때 발견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잠시 후, 아시모프한테 가서 외장 기억 모듈을 검사해 봐. 신청서는 내가 추가로 제출할 테니까.

네.

밤비나타의 "기억상실"은 과거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구조체 개조 수술은 초기에 리스크가 컸고, 결함도 기체 가동 후에 즉시 나타났었다.

연구계에서 볼 때에는 밤비나타와 같이 장시간 안정 후, 갑자기 간헐적으로 기억 데이터를 불러오지 못하는 특별 사례는 연구 가치가 매우 높았다. 특히 의식의 바다 방면으로 깊게 연구하고 있는 구조체 연구자에게 있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전황이 심각해지면서, 일시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구조체 증상이나 잠재적 문제는 제쳐두고, 당분간은 보수적인 조치를 통해 연구 대상자들이 정상적으로 직무를 수행하게 해야 했다.

바네사가 밤비나타를 소대에 가입시킨 후, 아시모프는 밤비나타의 기존 기억 보조 장치를 업그레이드했고 또 내부에 일련의 기본 데이터를 포함시켰다. 밤비나타의 병증이 언제 발작되든 상관없이 바로 중요 정보를 분석할 수 있고, 전투에 영향을 주지 않게 했다.

하지만 외장 기억 모듈은 전투와 임무에 필요한 내용 외에 밤비나타의 기억을 무한대로 저장할 수는 없었고, 때문에 새로운 데이터가 업데이트됨에 따라 최초의 데이터가 모두 사라지게 됐다.

이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개인적인 추측이긴 한데 이건 "그 실험"으로 인한 후유증인 것 같아, 다만 나한테 실험 관련 상세 데이터가 없으니 자세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

밤비나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역원 장치가 밤비나타 의식의 바다에서 충돌을 일으킨 이유와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역원 장치의 원리에 대해 아직은 모색하는 단계라 기존 조건을 가지고 정확한 회피 방법 혹은 해결책을 내기는 어려워.

역원 장치의 비밀이 풀리면 거부 반응과 관련된 이론을 보완할 수 있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봐.

……

유일하게 좋은 소식은 "기억상실"의 본질이 데이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데이터가 의식의 바다 심층에 빠져서 밤비나타 스스로 불러올 수 없다는 거야. 인간도 기억나지 않는 일이 많지만, 그 기억이 잠재의식에 존재하잖아. 그것과 비슷해.

즉,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론상 밤비나타는 모든 기억 데이터를 불러올 수 있어.

이게 최선의 처리 방식이라고 판단했으니 일단은 그렇게 해.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구조체는 명령을 잘 따르기만 하면 돼.

그렇지? 밤비나타.

기억 데이터 일관성... 문제없고, 데이터 시작일은...

바네사의 손가락은 순간 단말기에서 경직됐다.

그 날짜들은 일종의 낙인이었으며, 이 숫자 조합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네사 머릿속에선 과거의 장면과 가물가물한 고통이 번뜩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울 수 없는 아픔, 끓어오르는 적조, 지하실에서 누워있는 폐인이 된 수석과 너덜너덜한 기체의 그레이 레이븐 소대...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힌 바네사가 단말기의 기억 데이터 재구성 버튼을 터치했다.

의식 장면 구축 중>>>>>>100%

기억 데이터 재생 중>>>>>>100%

!!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어요!

후, 그레이 레이븐이 간 지 얼마나 됐어?

적과 만난 뒤, 1시간 54분이 지났어요.

아직 2시간이 채 안 된 거야?

콜록... 끝이 없네... 결국 내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니.

삐-

조심하세요!

밤비나타는 뒤돌아서 바네사를 대신해 측면에서 달려드는 적을 처리했다. 하지만 소녀가 자리를 비운 그 순간, 몰려오는 적군들은 소녀가 방금까지 사수했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다친 바네사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그래서 밤비나타는 한 손으론 바네사를 부축하고, 다른 한 손으론 적의 공격을 막았다.

파손된 단거리 비행체에 폭발물을 부착해 눈앞에 다가오는 적들을 처치했다. 하지만 이합 생물들은 동족의 잔해를 밟고 선 잇달아 공격해 왔다.

밤비나타와 바네사는 전투하면서 조금씩 후퇴했고, 붉은빛 조수는 그녀들을 거리의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밤비나타는 바네사를 잔햇더미에 기대게 해서, 그녀가 최대한 힘을 덜 쓰게 해줬다.

밤비나타는 준비됐어요.

주인님은 여기서 쉬고 계세요. 밤비나타가 주인님이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버틸게요.

여기 발신기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연락할 수 있어요. 그리고 가동기, 약물, 혈청 및 다른 건 전부 여기에 있어요.

움직이지 않는 바네사의 모습을 본 밤비나타가 가동기를 바네사가 자주 사용하는 손에 가볍게 쥐여줬다.

"비밀 무기"는 이미 고정시켜 놨고, 주인님이 자주 사용하는 지연 모드로 설정해뒀어요. 가동하시면, 밤비나타가 지연된 5초를 이용해 발파 위치를 조절할게요.

밤비나타는 팔을 들어 기체에 부착된 폭발물을 바네사에게 보여줬다.

밤비나타가 수많은 조각이 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의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폭발물의 설치 장소는 정밀하게 계산해뒀다.

그리고 그 순간은 스스로 몸을 바친 경건한 자의 가치를 최대한 높일 수 있었다.

끼익-

!!

밤비나타는 몸을 돌려 덮치려는 적을 밖으로 밀어냈다. 적색 바다 앞에 선 작은 체구는 흐름을 거스르는 파도와 같았다.

피곤과 아픔을 무릅쓰더라도, 작은 체구가 재앙의 파도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시간을 벌었으면 그레이 레이븐 놈들도...

살아남아서 나한테 구원받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게 좋을 거야.

바네사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상처에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몰려와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우린 힘을 합쳐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을 거고, 곤경과 두려움 때문에 전장에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앞서 리브가 했던 말이 눈앞에 떠오르자, 바네사는 적조 속에서 분투하는 하늘색 그림자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밤비나타...

여기까지 오면 이제 충분했겠지?

아직 응고되지 않은 피가 묻어 있는 가동기가 바네사의 손에서 떨어졌다.

마지막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게 아니라 적어도 목욕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안 돼요!!!

!!

윽!

순간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밤비나타의 몸에 끔찍한 상처 몇 개가 늘었다. 바네사의 정교한 손질을 받지 못한 지금의 밤비나타는 버려진 낡은 장난감 같았다.

그래도 너덜너덜해진 인형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체 연산 능력을 동원해 주인이 살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카드와 수단으로 삼는 여러 방안을 연산해도 밤비나타는 답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답안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의미가 사라질 것이었다.

의미 없는 "비밀 무기".

의미 없는 카운트다운.

의미 없는 전투.

의미 없는 기체.

이합 생물들은 눈앞의 기체가 행동을 늦춘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보이는 모든 것을 찢을 뿐이었다.

삐-

잠기기 1초 전 밤비나타 앞에 있던 이합 생물이 예고 없이 쓰러졌다.

갑자기 적이 공격 욕망을 잃은 것처럼 그곳을 중심으로 차례차례 움직임을 멈추더니,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정지된 공세 속에서 훤칠한 그림자가 태양을 등지고 바네사와 밤비나타에게 다가갔다.

임시 권한으로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테슈...

밤비나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기절 직전이던 바네사가 필사적으로 눈을 떴다.

……?

거의 멈출 것만 같았던 뇌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이합 생물의 깊은 파도 사이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락 두절된 구조체는 적조에 잠식됐거나 전장이 무서워 혼자 살기를 선택했다는 걸 의미했다. 어느 소대 지휘관이든 한때는 자신의 대원이었던 구조체가 적이 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잠시 놀란 바네사는 눈앞의 구조체가 자신의 명령만 따르던 "장난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를 대하는 방식은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흥, 일부러 잔챙이들을 멈추게 한 건, 옛 주인을 가까운 거리에서 비웃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너도 인형을 통제하는 재미를 알게 돼서 나와 교류하려고 온 건가?

밤비나타가 무정하게 적을 절단하던 팔 외곽의 맨티스 소드를 들어 올릴 때까지 테슈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테슈,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세요.

오게 놔둬. 날 죽이고 싶었다면 일부러 나타나진 않았을 거야.

충성을 다하지 못한 인형이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군.

하지만...

밤비나타. 오게 놔둬.

네... 주인님.

밤비나타는 한발 앞서 바네사를 향해 달려간 뒤, 테슈를 경계하며 바네사의 손을 꼭 잡았다.

테슈는 천천히 쭈그리고 앉아, 옷에서 깨끗한 붕대와 약물을 꺼낸 뒤, 바네사 왼쪽 눈의 거즈를 다시 갈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붕대를 감은 테슈는 텅 빈 붕대 통을 바네사의 머리 옆에 놨다.

비어 있는 붕대 통과 땅이 접촉하자, "퉁" 하는 소리를 냈다.

테슈

공중 정원에서 가져온 마지막 물자야.

테슈는 바네사의 눈을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말을 마친 테슈는 피바다 속에 있는 가동기를 주운 뒤, 기억 속 바네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것을 손에 쥐었다.

바네사

——!

테슈

네가 누르기만을 기다렸어.

자세히 생각해 보면 난 네가 매번 가동기 버튼을 누를 때의 표정을 기억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미끼 될 차례가 됐을 때, 넌 어떤 표정으로 버튼을 누를까 상상하게 됐어.

하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아마도 무표정이었겠지.

너의 미소, 빈정거림, 야유 혹은 만족. 그 모든 것을 원망해. 그건 "주인"이 소유물에 주는 피드백이니까.

하지만 그 "소유물"들이 조각이 됐을 때, 넌 좋은 연극을 봤다는 웃음조차 주지 않았어.

너에게 있어서 그들은, 아니 우린 그런 존재였겠지. 살아있을 때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조종하고 사라질 때는 "물품"으로써, 존재의 의미조차 빼앗잖아.

바네사

……

테슈

밤비나타는 아마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이겠지. 그래서 네가 밤비나타를 없앨 때 무슨 모습일지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네가 가장 좋아하고 말 잘 듣는 "장난감"을 죽인 후에 내가 널 직접 죽이려고 했어.

밤비나타

테슈,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을 거예요.

테슈는 밤비나타를 봤고, 그의 손가락은 계속 가동기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걸 본 바네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한때는 다른 이를 깔보던 바네사가 지금은 상대에게 깔보는 상대가 됐지만, 그녀의 오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바네사

역시 내가 가르친... 하, 너의 악취미는 칭찬하고 싶네.

하고 싶으면 해. 하는 김에 네 "장난감" 동료 밤비나타도 해방시켜.

테슈

그게 궁금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어떻게 널 설득해서 최후방을 지키게 했고, 일시적으로 "장난감"에 대한 태도까지 바꾸게 했는지 모르겠어.

넌 항상 그들의 방식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잖아.

바네사

네가 그렇게 알고 싶다면...

테슈

아니. 생각해 보면 알 필요 없을 거 같아.

내가 원하는 건 이 몸이 완전히 나에게 속하는 거야. 너나 백로 소대, 그레이 레이븐 모두는 중요하지 않아.

달빛 아래 흐르지 않는 물 표면처럼 테슈의 표정은 한없이 평온했다.

테슈

"테슈"라는 이름은 네가 정해준 거야. 난 그 이름이 백로 소대의 일원으로서, 기념비의 네 이름 옆에 새겨지는 걸 원치 않아.

이번 만남 후 이 세계엔 더 이상 "테슈"가 없다는걸, 말하고 싶어서 모습을 보인 거야.

바네사

너...

바네사는 계속 말을 걸려고 했지만, 견딜 수 없는 피로에 빠져 의식이 잃었다.

밤비나타

주인님!

테슈

기절했을 뿐 죽은 게 아니야.

테슈가 바네사를 안으려고 하자, 밤비나타는 바네사를 보호하는 태세를 취했고, 날카로운 칼날이 이미 테슈의 팔을 조금 베었다.

밤비나타

다치지 마세요.

테슈

바네사가 여기서 죽길 원한다면 안 다칠게.

넌 정말로 바네사를 원망하지 않는 거야?

밤비나타

왜 주인님을 원망해야 하죠?

테슈

바네사가 네 의식의 바다에 손을 댄 적이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네가 계속 맹목적으로 명령을 따르는 건 이해해. 하지만 정말로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거야?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야. 자유로운 구조체가 되는 거지.

밤비나타

밤비나타가 하고 싶은 일은 주인님이 원하는 일이에요.

자유는 임무를 완성하는데 필요조건이 아니에요.

테슈

아직은 안 될 것 같네. 언젠가 내 말을 이해한다면 날 다시 찾아와. 널 "그분"께 추천해 줄게.

그때가 되면 넌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거야.

기억 데이터 재생 종료>>>>>>

종료 버튼을 누른 바네사의 손가락이 데이터 편집 메뉴 윗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바네사는 자신이 쓰러진 후 테슈가 밤비나타한테 러브콜을 보낼 줄은 몰랐다.

밤비나타의 대답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고, 기체에 침입했다는 신호도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내 말을 이해한다면 어떻게든 날 찾아와. 널 "그분"께 추천해 줄게.

밤비나타가 "자유"를 이해하는 그날이 오면 밤비나타도 바네사를 떠날까?

따지고 보면 밤비나타가 전투 구조체로 백로 소대에 들어온 건 밤비나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만약...

아시모프를 찾아가 봐. 다른 건 아시모프한테 확인해 달라고 해.

네. 주인님은 여기에 남으실 건가요?

그래. 신경 쓰지 말고 가.

밤비나타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바네사에게 인사한 다음 급히 자리를 떠났다.

바네사는 밤비나타의 수면 캡슐을 열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액세서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바네사 본인이 선택한 거였다.

왠지 모를 짜증이 방금 전보다 더 심했다. 무엇 때문에 생긴 짜증이고 어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바네사가 주먹으로 수면 캡슐을 치자 합금 커버에서 마르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주인님이 말하고 싶지 않으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이건 밤비나타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규칙"이고, 주인님의 기분에 맞춰주는 교제 방식이었다.

주인님이 밤비나타한테 말해 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주인님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밤비나타는 그 과정 중에 겪는 불안과 초조를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억누르는 게 습관이 됐다.

백로 소대의 구조체 밤비나타가 외장 기억 모듈 검사를 신청해요.

또 왔어요? 이리 와봐요. 마침 제가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요. 30분 후엔 저 사람이 밤비나타를 봐주게 될 거예요.

연구원이 가리킨 옆의 연구원은 수습 기간 사원증을 달고 있었고 조금은 긴장한 듯했다.

백로 소대의 그 구조체요? 전형적인 구조체 기억상실증의 병례인가요?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입을 막았다. "병례"앞에서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아픈 곳을 말하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밤비나타는 병례보다는 어떤 특별한 연구 사례와 비슷했다.

수습 연구원이 자신의 무례에 대해 사과할지 말지를 망설이는 사이에 다른 한 명의 연구원과 밤비나타는 이미 대화를 시작했다.

밤비나타, 정례 검사가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건가요?

주인님께서 데이터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고 하셨어요. 아마 지상 임무의 수행 시간이 길어진 것 때문에, 제때 정비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어디 볼게요. 아, 또 이런 증상이 나타났군요. 어쩐지.

자세히 검사해서 나쁜 것 없으니까, 이참에 전면적인 검사를 진행해 보죠. 그럼 전 의식의 바다 탐사침을 준비하러 갈게요.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숙련돼 보이는 연구원이 기기를 보관하는 곳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삐삐하는 조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밤비나타. 전, 어, 방금 말한 거 고의로 말한 거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부르지 않아도 돼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면 밤비나타에게 불필요한 기억의 부담을 안겨줄까 봐 신입 연구원은 자기소개를 포기했다.

네.

방금은 미안했어요. 고의로 당신을 병례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예전에 밤비나타에 대해 듣기는 했었는데, 첫 출근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조금 아닌 것 같고...

그러니까 제 말은 밤비나타의 기체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서 힘들겠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시선을 내린 밤비나타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밤비나타가 아직 쓸모가 있다면 된 거예요. 다들 습관이 됐을 거예요.

습관? 연구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 습관은 슬픈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연민도 습관에 의해 없어졌다면, 이렇게 무력한 순간이 도대체 얼마나 많이 발생했을까?

됐다. 자, 인턴, 이걸 밤비나타한테 설정해 둬.

아, 네!

신입 연구원은 밤비나타를 대신해 서툴게 기기를 설치했다. 구조체에게 있어 기기를 연결한다고 해서 인간이 체감하는 고통을 느끼지는 않겠지만, 신입 연구원은 최대한 부드럽게 작업했다.

능숙하게 금속 침대에 누운 밤비나타는 눈을 감기 전에 신입 연구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금 전 신입 연구원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외장 기억 모듈에 그에 관한 기록이 남게 될 것이었다.

무의미한 생각으로 밤비나타는 명령에 따라 조금씩 무질서한 사고를 멈췄다.

네가 직접 보지 못해서 그래. 그 괴물이 10층 건물보다 더 커졌었어! 그걸 보면 누구라도 다리가 후들거렸을 거야.

뭐야? 오늘은 자기 자랑 안 하네?

아~ 그런 전장에서 혼자 열심히 싸워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넌 혼자서 널 한 방에 죽이는 건물을 부술 수 있어?

나 같은 게 한 소대가 있다고 해도 그걸 완벽하게 끝낼 수 없어.

너 같은 게 한 소대가 있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야. 지난번 전투에서 대기 중인 모든 엘리트 소대가 출동했다고 들었거든.

아무튼 순조롭게 해결돼서 다행이야. 난 그 바다에서 죽을 각오까지 했었어.

왜 겁을 먹고 그래! 어차피 새 기체에서 부활할 수 있잖아.

거짓말하지 마. 저번에 네가 중상 입었을 때, 무섭지 않았어? 가슴에 손 얹고 말해 봐.

내가 넌 줄 알아? 사내대장부는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지 않아!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오래 쉬지 않았어? 복귀 절차는 밟고 있지? 어느 소대로 갈 거야?

아직 정하지 못했어. 엘리트 대원 선발하는 거에 신청할까 생각 중이야.

어라? 그동안 나 몰래 많이 연습했나 봐?

야, 너 마침 말 잘했다. 어제 백로 소대에 충원 소식을 들었거든. 물론 구체적인 건 나도 잘 모르고 부고 같은 것도 안 봐서 잘 모르지만 한 명이 실종된 것 같아.

백로 소대? 거긴 가고 싶지 않아. 넌 소식이 빠르다고 그렇게 자랑하더니 이것도 몰라? 그 대원이 배신했대.

어?

설마? 거기 지휘관은 정상급에다 유능하기까지 해서 소대에 중대한 인원 사고가 없다고 들었었는데?

이상한 거 못 느끼겠어? 네 목 위에 달린 건 전자 휴지통이냐? 생각이란 것 좀 해 봐.

임무를 수행하러 나간 백로 소대는 중상자가 별로 없었어. 아무런 상처 없이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어. 그렇다는 건 뭐겠어?

그래서 가기 싫다고. 좋은 소대였으면 왜 대원이 배신하겠어? 그레이 레이븐을 봐봐 그런 얘기가 없잖아.

좋네. 심사위원회에서 네 큰 뜻으로 모든 심사위원을 웃길 수 있을 거야.

모퉁이에서 바네사가 손뼉 치며 걸어 나왔다. 방금 밤비나타의 휴게실에서 나온 바네사는 테슈가 떠난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구조체들의 말을 듣게 됐다.

이야기를 나누던 두 구조체는 깜짝 놀랐다. 그중 한 명은 재빨리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가 이내 무언가를 의식한 듯 손을 내려놓았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백로 소대는 쓰레기를 받지 않아.

뭐라고요!

쉿, 입 다물어.

너 같은 폐기급이 엘리트 소대에 가입할 자격이 생긴다면, 그건 인간의 운명이 아마 파멸로 향한다는 거겠지.

그리고 이건 엘리트 소대 지휘관으로서 말해줄게. 너 같은 건 미래의 그날까지 살지 못할 거 같아. 그냥 지상 임무에서 적조의 양분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

두 구조체를 향해 경멸의 미소를 지은 바네사는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 대기실로 향했다.

일을 크게 키우기 싫은 한 구조체가 필사적으로 다른 한 구조체를 끌고 복도 반대편으로 갔다.

휴대용 단말기에서 통신 알림이 들려오자, 바네사는 걸음을 멈췄다.

밤비나타? 외장 기억 모듈 검사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에요. 주인님. 검사 프로세스는 아직 진행 중에 있어요.

밤비나타가 임무 명령을 받았어요. 지금 당장 지정된 장소에 가서 상세한 임무 내용을 들어야 해요.

임무? 누가 내린 명령이지?

의장님께서 직접 결정하신 것 같아요.

난 별도로 임무에 대해 연락을 받은 적이 없어. 너 혼자 가라고 한 거야?

케르베로스 소대의 대장도 있어요.

케르베로스의 그 여자? 그녀가 왜...

밤비나타의 통신을 끊은 바네사가 세리카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바네사 지휘관님. 죄송해요. 제가 지금 막...

임무 내용을 전달하러 가는 거지?

난 밤비나타의 감독자로서 이 임무에 합류할 거야.

네? 밤비나타의 기체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하지만 최근 대원이 규칙을 위반하고 소대를 이탈한 걸 감안한다면, 소대에 남은 유일한 대원인 밤비나타가 지휘관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나도 임무가 없고.

사령관님?

가게 놔둬.

생각해 보면 바네사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알겠어요. 바네사 지휘관님. 지금 바로 임무 내용을 지휘관님 단말기에 공유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