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마는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 센터에 조용히 서 있었다. 게슈탈트 내부의 데이터 허브 중 하나일 뿐인데, 그녀가 본 모든 서적과 자료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방대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기록된 데이터를 모두 훑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기에 검색을 즉시 시작했다.
끊임없이 넘쳐나는 방대한 데이터 스트림을 보면서, 하카마는 "게슈탈트"라는 슈퍼 AI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 하지만, 게슈탈트도 기계 교회에서 오래전부터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정말 더욱 높은 수준의 존재인 것이 맞을까요?
로봇은 거의 완벽한 이성과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으며, 연산 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각성"을 탐구해야 하는 것인가? 로봇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각성해야 하는 것인가?
하카마는 완전한 각성을 이룬 로봇들은, 더 이상 퍼니싱의 침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로봇의 각성에는 그 이상의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카마는 수많은 자료를 뒤져봤지만, 자신의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인간에게도 어쩌면 로봇의 사상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탐색 완료. 목표 자료... 여기 확인했습니다.
파란빛을 뿜는 데이터 패킷이 추출됐다. 이것이 바로 기계 교회가 원하는 우주선의 설계 자료였다.
하카마가 손을 뻗어 받으려 하자, 데이터 패킷이 갑자기 사라졌고, 주변에 연산 능력으로 구축된 가상 공간은 순식간에 무너져 칠흑 같은 허공만 남게 됐다.
하카마는 침입이 탄로 났음을 깨달았고, 전쟁 준비 상태에 진입했지만, 연산 능력으로 구축된 세계에서 "게슈탈트"라는 슈퍼 AI를 이길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게슈탈트는 공격하지 않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전자음이 귓가에서 반복적으로 울렸다.
안녕하세요. MPA-01. 정정합니다. 지금은 "하카마"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어울리겠군요.
전자음은 마지막에 냉담한 여자 목소리로 합쳐졌지만, 하카마는 그 소리의 근원이 바로 게슈탈트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 저는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하카마는 전술적 회로의 제안에 따라, 말을 하는 동시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벌어서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아니면 한발 물러서서 목표인 우주선 자료를 전송할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의 의식이 이곳에서 파괴되어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호칭은 제게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게슈탈트"로 부르시거나, 나나미라는 로봇처럼, 당신이 좋아하는 코드네임을 붙여주셔도 됩니다.
하카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그녀가 계속 찾던 이름이 이곳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당신은 "나나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요?
감정 파동에 이상이 감지됐습니다. 당신의 프로그램은 상당히 불안정하고, 초기 설계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카마는 이 슈퍼 AI가 나나미의 이름뿐만 아니라, 자신의 코드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탄생에 대해 실재하는 모든 정보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당신이 바로 처음에 저를 설계한 존재인가요?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설계자는 아시는 대로 인간입니다. 그러나 로봇 의식에 기반한 실험은 확실히 제가 주도했습니다.
로봇 의식, 그렇다면 역시 나나미는 당신들의 실험 대상인 거군요. 당신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정정합니다. 나나미는 그 실험의 유일한 실험 대상이 아닙니다. 하카마, 당신도 로봇 의식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참여한 실험 대상이었습니다.
분명히 데이터양이 극히 적은 정보임에도, 하카마의 사고를 잠시 멈추게 했다.
저도 실험 대상이라고요?
황금시대의 인간이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겼던 것은 점점 더 지능적으로 변해가는 로봇들이었습니다. 로봇들이 언젠가는 인간을 능가하게 되어, 대처할 수 없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로봇이 자의식을 갖게 되면, 어떻게 사고를 하고, 로봇 간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의미 있는 사례를 통해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카마의 앞에 현재 나나미의 모습이 투영됐다. 하카마는 현재 나나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으로,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이 소녀가 나나미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나나미...
나나미가 이 실험에서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답안이었다. 로봇의 사랑이 마침내 프로그램의 굴레를 벗어나게 했으며, 인간으로부터 온 사랑과 선의가 그들에게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줬다.
하카마의 앞에는 수많은 데이터와 인적 자료가 펼쳐졌다. 이 중에는 하카마에게 몸을 만들어준 여성 연구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험은 퍼니싱의 폭발로 인해 결국 중단됐지만, 나나미는 여전히 로봇 각성의 기점이 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알게 된 지금, 이제 수많은 로봇이 각성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 그 인간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몇 번이고 연산해도, 인간이 멸망하는 미래는 변하지 않으며, 이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지고 있는 결함을 뜻합니다.
하카마는 로봇으로서, 게슈탈트 정도의 연산 능력이라면, 구축한 미래가 얼마나 정확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게슈탈트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무궁무진한 능력의 슈퍼 AI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나미라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찾는 것을 계속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카마는 조금 의외였지만,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미소를 지으며, 홀로그램으로 투영된 나나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과거에 수없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녀는 나나미의 얼굴을 만졌다.
역시 나나미 다운 선택이네요.
그렇다면, MPA-01 하카마,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요? 이것이 그 실험의 마지막 단계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하카마는, 자신을 인간과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로봇의 사랑이 마침내 프로그램의 굴레를 벗어나게 했으며, 사랑과 선의가 그들에게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줬다.
나나미는 그녀가 원하는 미래로 향하는 모험의 여정을 펼쳤다. 그렇다면, 그토록 나나미를 찾아왔던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퍼니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로봇과 인간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미래를 볼 수 없는 사람이 등불을 들고 미지의 장소에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흉내만 내는 로봇으로서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모든 것을 느끼고, 당신만의 선택을 하세요."
당신은 계속 방관하고 있는데, 그럼,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기계 선현만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내린 선택도 어떤 일들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은 바꾸길 원하나요?
인간이 사라진 후, 누가 로봇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 걸까?
인간과 로봇 모두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
로봇은 계속해서 인간의 발자취를 좇아갔다.
"방주 계획"이든, 다른 어떠한 계획이든 마찬가지였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선택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인간의 독특함을 만들어냈다면, 로봇도 다른 경험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하카마 자신이 질문하는 것이 아닌, 기억체에 기록되어 있던 데이터였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그녀의 사고 중에 나타났다.
제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생각해 볼게요.
인간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을 느낄 수 있었고, 이러한 특성에 그녀는 익숙함을 느꼈다.
부모는 말을 배우는 아기를 대할 때도, 이렇게 나긋나긋하고, 애정 어린 말투를 사용하며, 아기들이 주변의 모든 것을 인지하도록 이끌었다.
아기는 요람에서 두 손을 뻗어, 시야에서 흔들리는 모빌을 만졌다. 그리고 그 모빌은 나비가 하늘을 날듯, 속박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나비를 볼 때, 당신의 머리에는 생물 분류 정보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명이라는 것도 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아름답습니다. 로봇들은 이 행성에 있는 수천수만 개의 생명들과 같이, 모두 아름답고 특별합니다.
저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정의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움"을 판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저"는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입니다. 로봇도 인간과 같이 생명이 있으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저희를 사랑하고, 로봇도 그 속에서 사랑을 싹 틔워... 인간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합니다.
회색빛 머리를 한 소녀가 하카마의 기억 속에서 계속하여 번뜩였다. 하카마는 나나미가 정답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때의 하카마는 여태 이렇게까지 나나미를 만나, 자신이 깨달은 모든 것을 나누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논리 연산과 데이터 분석보다 더 우선시되는 어떤 것으로, 이를 "마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파란빛을 뿜는 데이터 패킷이 다시 한번 허무한 공간에 나타났고, 하카마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다.
당신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하카마는 고개를 들어, 푸른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누구의 선택이던지, 모두 미래를 결정짓게 돼요.
하카마는 손을 뻗어 자신만의 선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