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가동 중.
논리 사고 회로 검사: 정상 실행.
기억체 장치 확인: 이상.
감정 시뮬레이션 모듈 상태 검사: 이상.
환경 감시 가동: 완료.
기억 데이터 검사: 손상.
외부 단말기 검사: 손상.
진척 검사: 이상.
가동 완료.
전혀 다른 시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들여다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방에서 계속해서 폭발음이 들렸고, 쉴 새 없이 터지는 폭발로 방 안은 진동했다. 혼란으로 케이블이 끊어졌고, 크고 빽빽하게 서 있던 컴퓨터가 쓰러지면서, 짧은 소리와 함께 작동을 멈췄다.
부서지고 어두워진 로봇들은 모두 "그것"의 일부분이었다.
고장 난 화면과 균열이 생긴 시야에서 익숙한 인간이 단말기 앞에서 시종일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부신 빨간색이 그녀의 등 뒤에서 땅으로 번져나갔고, 한때는 단정하게 빗어내던 금발도 목덜미 높이에서 가지런히 절단되어 있었다. 마치 정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부상자가 확인됐습니다. 의료 지원을 요청합니다.
현장 상황을 스캔한 다음 그것은 자신이 낸 소리를 들었다. 음성 데이터는 관리형 AI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시뮬레이션 인격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선로가 잘려서, 신청은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늦지 않았어.
다행이야. 너도 침식되지 않았어.
마지막 버튼을 누른 인간이 몸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피 묻은 인간의 얼굴이 선명해졌고, 그녀는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확인됐다. 그것은 인간의 손끝과 젖은 피였다.
그 아이가 지어준 이름이 "하카마" 야?
너의 논리 회로는 이미... 헉헉, 이 명사로 원래의 신분 표시를 대체했어.
넌 자체적으로 이 이름을 인정했어.
상처의 깊이와 출혈량으로 볼 때, 인간은 엄청난 고통 속에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하지만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카마는 인간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다. 차갑고 커다란 컴퓨터도, 붉은빛이 번쩍이는 감시 카메라도 아닌 인간 여성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프로그램 본체가 거대한 컴퓨터에서 생체공학 로봇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발의 인간형 로봇이 천천히 손을 들어 자기 몸을 관찰했다. 이건 예전엔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경험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새로운 전자두뇌 속에서 빠르게 움직였고, 손끝의 움직임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알아내고 있었다.
식별 번호는 이 기체의 신원을 표시하고 있었다. 생체공학 로봇 회사에서 생산한 프로토타입으로, 어린아이들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한 최신 여성 기체 가사도우미 로봇이었다.
연구소마저 바이러스가 퍼졌어. 창고에 등록된 모든 로봇은 이미 폐기 절차에 진입했고... 시간이 부족해서 너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어.
연구원은 흰색 가운에서 빛나는 저장 단말기를 꺼내서 인간형 대뇌 뒤로 뻗은 케이블에 연결했다.
관리 규정에 따라, 로봇 의식 실험과 관련된 모든 자료와 데이터가 파기될 것이고.
"하카마"는 그 어떤 로봇이나 인간의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게 될 거야.
"하카마"는 이름이자 선물이야... "친구"가 준 선물.
결국 이런 식으로... 널 이 세상에 탄생시켜서 미안해.
로봇 실험에 관한 모든 자료와 대규모로 폭발한 로봇 바이러스, 그리고 다양한 정보가 케이블을 통해 임계점에 가까운 속도로 로봇의 기억체에 전달됐다.
그녀는 문밖의 규칙적인 충돌 소리와 인간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감지했다. 무거운 대문은 외부 충격 때문에 이상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날카로운 소음은 마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
하카마의 의식은 정보의 홍수에 잠겼다. 아무런 명령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우선순위에 갑자기 특정 명사가 나타났다.
실험체 MPL-00 상태... 확인 신청.
우리는 5시간 전에 그녀의 위치를 잃어버렸어.
하지만 그녀가 침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탈출했다는 건 확실해.
그러니, 제발...
눈앞의 인간은 대량의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몸은 마른 나뭇잎처럼 차가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를 찾아... 그리고 지켜줘...
알겠습니다. "실험체 MPL-00 탐색 및 보호"를 최신 명령으로 등록했습니다.
이건... 내 부탁이야.
나나미를 찾은 뒤, 그녀를 지켜줘...
인간이 자신의 자녀를 삶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듯이, 우리 손으로 제작한 로봇도... 우리의 자랑이야...
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뻤어..
그러니...
하카마의 인식이 빠르게 재구성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의 메마른 입술은 계속해서 껌뻑거렸지만, 하카마는 그녀가 말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 명령의 명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명해 주세요... 말해주세요... 저에게 말해주세요...
인간의 바이탈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간신히 손을 들어 마지막 힘을 다해 하카마의 손끝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하카마에게 잔잔한 웃음을 남겼다. 하카마는 인간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하카마는 자신의 의문을 거듭 되새겼다. 하지만 희미한 등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인간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폭발과 진동이 언제 멈췄는지 방 안은 무시무시한 적막에 휩싸였다. 데이터 전송이 끝났다는 알림음이 울려서야 케이블에 갇힌 로봇은 비로소 기체의 모든 통제권을 되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며, 한 걸음 한 걸음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현관에 도착했을 때쯤 그녀는 새로운 기체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파악했다.
문밖에는 로봇이나 인간의 활동 흔적은 전혀 없었고 굳게 잠긴 문은 로봇의 힘으로 쉽게 열 수 있었다. 피와 그을음 냄새가 문 열림과 동시에 흘러들어왔고, 이어서 한 인간 남성이 방안으로 쓰러졌다.
하카마는 이 인간의 신분을 식별했다. 여성 연구원과 함께 등장하는 남자이며, 이 연구소 밖에서는 나나미의 아버지였다.
나나미는 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얼마나 좋은 가정이 있는지와 그녀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땅에 떨어진 연구원의 단말기 스크린에는 마지막 대피 항공기가 이륙했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에 탑승해 이곳을 떠났어야 했다.
인간의 주변에는 부서진 로봇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이 유해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뒤에 있는 문이 제어가 안 되는 로봇들에 의해 파괴되지 않게 지키고 있었다.
"나나미를 찾은 뒤, 그녀를 지켜줘."
인간의 목소리가 전자두뇌에서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울렸다.
이젠 더 이상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우선,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철수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