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아침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모래판" 세계의 끝에 도착했다.
얼음과 눈보라로 얼어붙은 무거운 철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것은 모래판의 "고위 권한"이 설정한 것으로, 모래판 내의 모든 데이터를 가두어두는 높은 벽이었다.
밀어보려 했지만, 이전에 마주쳤던 장애물들처럼, 이 세계의 법칙은 어떤 간섭도 거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따뜻한 힘이 뒤에서 뻗어와 철문을 미는 손바닥에 닿았다.
이번이 마지막을 거야.
돌아보니 항상 곁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만나지 못했던 그 여성이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함께 걸어왔던 첫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 역시 마지막은 내 "과거의 모습"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이별이 아쉽긴 하지만... "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이 모습이어서 다행이었어.
타티아나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점점이 빛나는 입자가 그녀의 몸에서 새어 나오더니 따뜻한 힘이 되어 몸속에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타티아나와 함께 걸어온 교감으로, 지휘관은 이 행동이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도... 좀 더 네 곁에 있고 싶어.
타티아나가 웃었지만, 맑은 동공에는 어렴풋하게 물기가 반짝였다.
겨우 널 따라잡았는데, 곧바로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아쉽네.
하지만... 처음에 네가 날 구하기 위해 이곳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모래판" 밖에도 네가 꼭 해내야 할 일이 있잖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타티아나의 금빛 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타티아나는 옆에 있는 이의 손을 잡고, 마치 그 바람을 따라 깊은 곳으로 이끄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
바람 소리에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찢겨나갔고, 그녀의 모습도 하늘을 가득 메운 눈 속으로 점차 흩어져갔다.
하지만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힘은 미래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문 뒤로 쏟아져 나오는 빛 속에서 눈 부신 햇살과 푸르른 들판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봄의 첫 바람을 끌어안으려는 시인처럼, 지휘관을 힘차게 문 너머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어서 가. 그쪽이 네가 가야 할 길이야.
눈 부신 빛 속으로 걸어가자, 타티아나의 모습이 문 뒤의 어둠 속으로 점차 사라져갔다.
다른 "나"를 네게 맡길게. 투영자여.
인간은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얼음으로 단단히 봉인된 캡슐에서 흐릿한 의식을 되찾았다.
머릿속에는 몽롱한 상태에서 보았던 그 들판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현실 세계의 혹한이 몸을 바늘처럼 찔러왔다.
꿈속에서 보았던 이와 작별한 고한 상실감을 인간은 천천히 일어나 유리창에 쌓인 눈을 치우려 했다. 하지만, 캡슐의 기계 구조가 얼어붙어서 원활히 작동하지 않았다.
제동 스위치를 찾으려는 찰나, 또 다른 목소리에 인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마.
그 목소리는 모든 것이 끝났으니 서둘러 떠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불현듯 곁에서 들려오면서 손끝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드디어... 널 만나게 됐네.
꿈속에서 보았던 문 너머로 생명력을 상징하는 황금빛이 눈앞에 비치더니, 이내 환한 미소가 보였다.
모든 기억을 잃는 대가로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던 타티아나가 지금 옆에서 지휘관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디스크의 모든 걸 지워서 장벽을 허물기로 했는데도, 아직도 널 기억하고 있다니... 나도 놀랐어.
아마도, 이 모든 건 타티아나가 끝까지 지휘관을 "찾기"를 포기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현실에서 느끼는 따뜻한 체온이 지휘관 옆으로 다가왔다.
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다 "봤어". 정말... 아주 긴 여정이었더라. 고마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내 기억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그 모래판에서 일어난 일들이 얼마나 외부의 허구였는지 나 자신도 의심스러웠거든.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네 시선이 계속 날 따라다녔기 때문에, 내 존재를 "붙잡을" 수 있었어.
그리고 마침내... 현실에서 이렇게 널 만나게 됐어.
응.
타티아나는 활짝 핀 캐머마일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아래의 낡고 허름한 링크 시스템은 식물들이 점점 침식해 가는 봄날의 들판처럼 보였다.
내 투영체... 아니. "또 다른 타티아나"라고 부르자. 원래는 내 기억에서 "잘라낸" 의식에 불과했어.
또 다른 타티아나는 과거의 나고, 아직 미숙했던 그 시절을 상징하고 있지.
슐츠는 널 만난 후의 내 기억을 지우기만 하면, 모래판에서 우리의 의식이 만날 가능성을 완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
네가 어떻게 이 장벽을 뚫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해냈어.
넌 전자의 바닷속 "잡음"을 차단하고, 그 부름을 나에게까지 전하려 노력했어.
네 목소리 덕분에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어.
타티아나의 질문을 들은 인간은 "모래판"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추운 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기억나지만, 유독 어떻게 그 모래판에 들어가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모래판의 가장자리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던 기억 그리고 모래판 안에서 타티아나의 "투영"과 나눈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 또렷이 기억났다.
하지만 어떻게 "모래판"에 들어갔는지 그 세부 사항을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강제로 기억이 "잘려 나간" 것처럼 관련된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기억이 안 나? 걱정하지 마. 방금 모래판 장치 안에서 여러 시간 선을 재구성하는 긴 시뮬레이션 연산을 겪었으니까.
방대한 "정보"는 뇌에 과도한 부담을 주기 때문에, 모래판을 빠져나올 때 장치가 자동으로 그 부분의 데이터를 버린 것 같아.
하지만 내 의식의 바다는 모래판 "안팎"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온전히 새겨둘 수 있어.
타티아나가 살며시 인간의 이마에 손을 대자 시야가 순간 흐릿해졌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전해주는 체온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모든 이야기를 네게 들려줄게.
지금은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신소피아시
3개월 후
그랬었구나. 너희가 갑자기 "실종"됐던 그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니.
간단한 설명을 들은 로제타는 둘이 그 장치 속에서 겪은 모든 일을 빠르게 이해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여정에서 너희 둘은 과거의 나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신소피아시의 여러 가지 미래도 보았겠지.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겠어.
인간의 곁에 서 있던 로제타는 멀리 산 위의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럼,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지휘관, 네가 "목격한" 그 많은 미래 중에서 "가장 좋은" 가능성은 어떤 것이었어?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신소피아시의 선발대는 곧 그 이름 없는 실험실의 조사를 마쳤다.
슐츠가 "모래판" 안에서 밝힌 것처럼, 이곳은 "행렬" 계획의 게슈탈트 서브 단말기만 있을 뿐이었고,
퍼니싱이 폭발한 후 곧바로 폐기되었다.
연구실이 폐기된 후, 모래판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기계 외뿔고래" 연구를 추진했던 이름 없는 학자는
링크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데이터로 옮겨, 수많은 연산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 학자는 절망했다.
아무리 연산을 돌려봐도, 극지의 생태권은 수십 년 후 반드시 붕괴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대륙에 살고 있는 인간 역시 멸망할 운명이라는 게 "모래판" 시스템이 내놓은 답이었다.
이 답이 번복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학자는 모래판 안에서 자신의 의식 데이터를 삭제함으로써 자결을 선택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학자는 이성을 유지한 채 주변에 경고 신호를 보냈다.
몇 달 전, 신소피아시 신호탑에서 이 경고 메시지를 받은 타티아나는 혼자서 이곳을 조사하기로 했다.
그 후 타티아나는 산에서 눈사태를 만나게 됐고, 슐츠의 안내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정교하게 설치된 그의 함정에 빠져들게 됐다. 이것이 그 긴 "윤회 연산"이 탄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어.
링크 시스템 앞에 선 타티아나는 봄기운을 느끼고 하나둘 피어나는 캡슐 안의 캐머마일을 바라보았다.
모래판 시스템에 연결되기 전, 슐츠가 말한 그 대규모 눈사태를 똑똑히 봤어. 그래서 신소피아시가 그 갑작스러운 설해로 붕괴 직전이라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래서 "모래판" 시스템에서 전환점을 찾기 위해, 그 학자가 남긴 자료를 읽은 후 자발적으로 이 단말기에 연결하기로 했던 거야.
하지만 우리가 이 장치에서 빠져나온 뒤, 신소피아 사람들은 그런 눈사태는 없었다고 하더라.
의식의 바다 편차가 생성한 기억의 오류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하지만 이 모순을 설명할 수도 없어.
혹시...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가설이 떠올랐다.
타티아나는 이 대담한 추측을 이어가지 않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기적"일 거야.
지금은 이런 추측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똑똑...
둘이 대화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실험실 문이 열리면서 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젊은 연구원이 낡은 파일 뭉치를 안은 채 허둥지둥 들어왔다.
저희가 연구실에서 중요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 기록의 진위를 확인할 순 없지만, 직접 한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눈썹을 찌푸린 채 연구원이 건넨 파일을 받은 타티아나는 거기 적힌 글자를 보자 충격으로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player name]... 잠깐 와볼래?
타티아나가 누렇게 바랜 파일을 눈앞에 내밀자, 지휘관도 종이에 까만 잉크로 타이핑된 제목을 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