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눈앞의 상황이 안정되자 비앙카의 눈에 비친 곳은 습지대였다.
초록색 풀과 진흙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른 잎에 섞인 새싹도 진흙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보면 작은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는 초록색 풀 위에 뭔가 하얀 것이 감돌고 있었다.
쿠으윽——
학이다. 살아있는 학이다. 수십 마리의 생체학이 늪에 모여 있었다.
쿠욱——
쿠우욱——
줄줄이 무리 속에서 학들이 소리쳤다. 단말기의 음성 파일과는 달리 그 울음소리가 더욱 날카롭게 들렸지만 이내 약해졌다.
피곤하다. 비앙카는 관련 지식 없이도 그들의 울음소리에서 엄청난 초조함과 피로, 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한 불편함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계속 울다보면 체력이 소모되어 결국 아무도 돌봐줄 수 없는 이 전쟁의 시대에 소멸될 것이다.
쿠욱——쿠으윽——
문득 학 무리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학과는 달리 날카로움이 없었지만 어느 한 마리보다 우렁찼다.
동시에 기계적인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앙카는 학 무리에서 날개를 휘젓는 것을 보았다. 희미한 햇빛 아래서 날개는 은빛 색조를 반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생체공학 로봇이었다. 로봇의 울음소리가 모든 학의 소리보다 높았다.
이윽고 새의 울음소리는 점점 느려지고 조용해지다가 결국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해졌다. 이 울음소리는 비앙카가 공중 정원에서 들은 자장가를 떠올리게 했다. 기계 학도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몸에 기대고 자장가를 들었다.
처음엔 그 자장가와 함께 더 큰 울음소리도 있었다. 큰 울음소리를 내는 학 몇 마리는 괜히 화가 난 듯 기계 학 곁에 모여 긴 부리로 쪼아댔다.
그러나 자장가가 이어지면서 학 무리 중에서 한두 마리의 학이 기계 학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서툴게 다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몸에 기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학에게 최적의 휴식 자세인 것 같았다.
학 몇 마리가 이러한 행동을 보이자 다른 학들도 이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결국 비앙카는 데이터베이스 상에서 가장 흔한 휴식 중인 학들을 봤다.
들썩이던 학들도 기계 학의 울음소리와 함께 안정되었다.
...수석 기술관님은 티니의 원형이 황금시대의 생체공학 로봇이라고 말씀하셨어.
이게 그때 동료들과의 기록인가?
황금시대, 과도하게 개발된 지구에서 동물들은 자연 보호 구역에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환경, 규칙적인 식량 공급... 인류가 함부로 가하는 “은혜”로 인해 동물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을 잊게 만들었다.
면역 시대, 천성을 잃은 동물들이 황야를 떠돌아다닌다. 파괴된 환경에 직면한 그들은 연약한 아기와 같다.
——그러나, 이 아기들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살아남았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최근에 비앙카도 지구에서 학을 목격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오늘날까지 살아온 그 뒤에는 생체공학 로봇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이 생체공학 로봇은 생체 동물에 배치되어 자연보호구역의 환경을 유지하고 생물 동물의 건강을 감시하는데 사용됐다.
동물들이 보호 구역을 벗어나 황야에 버려져 살았을 때, 이 생체공학들은 동물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생체공학 로봇의 지도하에 생체 학들은 천천히 날개짓을 배웠고, 걸으면서 발 밑의 강바닥에서 조개류의 숨 쉬는 구멍을 찾아내는 법을 배웠다.
이동, 먹이 찾기, 적 피하기... 생체공학 로봇은 동물들이 잃어버린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을 일깨워 생물이 원래 가진 감지 능력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다.
이들은 무리 중에서 돌연변이의 존재도, 명령을 내린 주인을 잃어도,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게 된 지금, 자신의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 행위 자체가 상징되어 주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당신도 나처럼...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돌연변이로 취급되고, 자기의 방식으로 모두를 이끌려고 하고 있네요.
끝까지 동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어. 동료들의 소리를 들으면 고향에 돌아갔다고 생각힐 수 있으니까...
고생 많았어, 티니...
비앙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멀리에 있는 생체공학 로봇 학은 고개를 들어 비앙카 쪽을 향해 가볍게 소리를 냈다가 다시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몸을 지탱하던 강철 다리가 부러지고 몸은 흩어져 땅에 무너져 내렸다. 멀리에서도 비앙카는 그것의 몸이 녹슬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광경은 서서히 데이터 흐름의 형식으로 되돌아갔다. 초록색 풀은 희미해지고 백합과 푸른 하늘도 사라져 갔다.
투영이 사라진 후 티니는 묵묵히 생체공학 로봇이 부서진 곳에 서 있었다.
비앙카는 그의 몸에 천천히 손을 내밀어 보았다.
이번에는 연결 신청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 새를 어루만지듯 몸뚱이만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비앙카 씨... 들리십니까...
통신 채널에서 갑자기 울리는 사람 목소리에 비앙카는 바로 경계했다.
무슨 일인가요?
대량의 침식체가 당신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다른 소대에 연락해 막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아직도 엄청난 신호들이 비앙카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이런 규모의 적은 절대 한 구조체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
죄, 죄송합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빨리 발견했더라면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괜찮아요. 그건 신경쓰지 마세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정화 부대 멤버들과는 근본이 다릅니다. 비... 비록 실례지만...
저는 비앙카, 당신이 이대로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분명 더 많은 나쁜 놈들이 죽어야 할 텐데, 왜 이렇게 착하고 강한 비앙카씨가 이런 상황에 직면해야 하나요!
……
이것이 당신의 소망인가요?
네?
임무에는 엄밀성이 필요합니다. 방금 구조체인 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죠.
그런데 지금 현장에 구조체 저 하나뿐이 아니에요.
어어어?
건물들의 끝에 보이는 거대한 침식체의 홍수가 지평선을 가로질렀다. 침식체는 인간의 사고 모델을 가진 비앙카를 감지했고 그녀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비앙카는 제자리에 서서 조준한 후 활을 당겨 침식체 무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티니는 우아하게 날개를 치켜들고 하늘로 날아올라 날개를 펄럭이며 큰 소리로 울었다. 그 순간 비앙카는 이 교회에 번개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진리 기체와의 합동 공격으로 교회 안에 쏟아지는 "뇌우"를 만든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당신이 왜 다른 구조체와 연결을 거절하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소외되고 거부당하면 점차 다른 개체와 멀리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과 대화를 피하게 된다...
당신도 학 무리 속에서 소외 당한 돌연변이며, 당신의 행동은 누구의 이해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생각은 제가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저도 그랬었으니까요...
비앙카가 눈을 감자 의식의 바다에 떠오르는 것은, 제사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보였던 구조체의 불안한 눈, 그리고 오늘 임무 중 연락원의 통신에서 들리는 겁먹은 목소리였다.
또한 그들과 상대할 때의 가식적인 말투와 임무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결코 진심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우리가 지키고 싶은 "지금"을 지키고 있어요.
"지나온" 모든 것에 수고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저와 함께 동료들의 "미래"를 지켜줄 수 있나요?
비앙카는 티니를 향해 가벼운 목소리로 호소했다. 우렁찬 소리는 아니었으나 티니의 높은 울음소리가 멈췄다.
……
티니의 머리 부품이 서서히 비앙카 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녀의 눈앞에 몇 초간 멈춰 섰다. 마치 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비앙카는 티니의 목에 손을 뻗고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연결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작은 연결 요청을 계속 보내 상대방의 인터페이스 응답을 불러내려고 했다.
"우리와 날개를 나란히 하고 함께 나아가리라."
비앙카는 기도하는 어조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 세상 멀리 닿을 수 없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인내심 있게 귀를 기울여 줄 존재를 향해 불렀다.
잠시 후, 손바닥에 찌릿한 의사 감각이 전해졌다.
그 감각과 함께 날개에서도 쏟아지는 에너지를 느꼈다.
강렬하면서도 평온했다. 마치 그 속에 천둥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비앙카의 두 손은 날개를 따라 내려왔다가 그녀의 익숙한 무기를 쥐었다.
——"신은 그 자리에 서서 조용한 영역을 넓혔다. 거룩한 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면, 적대하던 자와 칼과 검으로 그를 대하던 자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이제 구조체와 로봇은 함께 그 성광을 함께 받들어 침식체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축적 완료.
긴 활이 천천히 당겨지자 비앙카의 눈 앞에 뇌광이 눈부시게 번쩍였다. 아래 각도에서 보면 비앙카의 팔 한쪽 끝에서 성광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앙카는 화살이 이렇게 가벼웠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지원 유닛의 연결에 통해 에너지를 축적한 번개는 일반 나무 화살처럼 가볍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축적한 화살은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침식체 떼들이 성당의 무너진 문을 부수고 순식간에 비앙카 앞으로 몰려왔다.
주님... 저들을 편히 잠들게 하소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손가락을 뗐다. 동시에 옆에서 소리가 터져 나온다.
광풍을 타고 벼락이 활에서 떨어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솟는 천둥처럼 적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