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레이븐"은 기나긴 눈보라를 헤치고 마침내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지나 극장 앞에 도착했다.
무거운 문을 온 힘을 다해 밀어 열었지만, 문 너머에는 빛마저 삼켜 버릴 듯한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손에 든 촛불을 높이 들어 올리자, 주변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가 물러났고 시야 끝에 드러난 극장은 이미 폐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에 든 불꽃으로 촛불을 하나씩 밝혀나갔다.
빛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 이어졌고, 그가 나아가는 방향은 비앙카에게로 이르는 길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그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비앙카는 객석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그레이 레이븐은 조심스레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덮고 있던 앞머리를 살며시 넘겨 잠든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영혼은, 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앙카의 숨결은 여전히 깃털처럼 가볍고 고요했다. 그녀의 의식은 아직 꿈의 경계에 머물러 있는 듯, 그레이 레이븐의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손은 바깥의 눈보라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꿈의 경계에 잠든 비앙카의 의식에 닿으려는 듯, 그녀의 손바닥 위에 익숙한 그 "표식"을 그렸다.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되풀이되는 문양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갔다. 이 허상 같은 극장 안에서 손끝의 감촉만이 유일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한참 뒤, 꽉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조금씩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대의 마음속 사랑으로,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서약을 새기리."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바뀌어도..."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 둘을 갈라놓을 수 없으리."
오래전, 서로의 손바닥에 이 "표식"을 새기며 맺었던 서약이 여전히 귓가에 선명하게 맴돌았다.
영원히 변치 않을 그 약속은, 겹겹이 쌓인 꿈을 지나, 꿈의 경계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아, 다시금 비앙카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촛불의 은은한 빛 아래, 그녀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섬세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그녀의 얼굴 위에서 부드럽게 춤추고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비앙카가 자신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쥔 뒤,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차갑기만 하던 손끝에, 마침내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꿈속을 헤매던 그녀가 나지막한 잠꼬대와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비앙카는 긴 꿈에서 막 깨어난 듯한 피곤한 모습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눈앞의 사람에게 닿았다.
흐릿하던 초점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돌아오셨네요.
비앙카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레이 레이븐을 조용히 바라보며, 상대방의 손을 맞잡고 손바닥에 머무는 감촉을 느꼈다.
이내 그녀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리워하던 얼굴선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따라 그렸다.
오랫동안 망설이듯 응시하더니, 마침내 눈앞의 풍경이 환상이 아님을 확신하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밖에 아직도 눈이 오나요?
제가 올 때는 눈보라가 정말 심했어요.
오시는 길은 춥지 않으셨어요?
…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어 그레이 레이븐의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살며시 털어 주었다.
그리고 오랜 이별 끝에 다시 만난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저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레이 레이븐 님.
오랫동안 닫혀 있던 극장의 문을 열자, 눈보라는 이미 그쳐 있었고, 머리 위로는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비앙카의 손을 꼭 잡고, 왔던 길을 따라 함께 귀로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