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꿈에서 의식이 서서히 깨어나며 마침내 몸으로 돌아왔다. 눈을 뜨자 새하얀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여기가 현실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꿈속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레이 레이븐 님!
비앙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텅 빈 순백의 방 안에서 쓸쓸한 메아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답도, 기척도 없었다. 여기는 그저 그녀의 꿈이 만들어 낸 감옥일 뿐, "그 사람"과 이어져 있던 감각마저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비앙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지금껏 없었던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부디, 저를 기다려 주세요.
곧 당신 곁으로 돌아갈게요.
방문을 열자, 문 너머에 전과 똑같은 새하얀 방이 나타나 그녀를 잠시 멈춰 서게 했다.
아니야, 이쪽 방향이 아니야.
비앙카가 또 다른 문을 열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건 여전히 똑같은 또 하나의 새하얀 방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어떤 문을 열든, 문 너머에는 똑같은 풍경만 끝없이 펼쳐져,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반복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이한 광경에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멈출 순 없어.
그레이 레이븐 님과의 약속을 절대로 어길 순 없어.
같은 행동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이젠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이 새하얀 미궁은 마치 그녀를 영원히 가두려는 듯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묵직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며 시야 속의 모든 것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어 갔다.
그럼에도 비앙카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안 돼, 이런 환각에 속으면 안 돼... 그레이 레이븐 님 곁으로 돌아가야 해.
제게 길을 알려 주세요. 어떤 형태로든 괜찮으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세요.
그래야 다시 당신 곁으로 갈 수 있어요.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듯, 눈처럼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갑자기 허공에 나타나 비앙카의 곁을 맴돌았다. 날개가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비앙카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나비의 날개에 닿는 순간,
그것은 힘없이 떨어져 생명이 사라진 하얀 종이로 변해 버렸다.
종이에 희미하게 남은 필체는 너무도 익숙했다.
그것은 한때 "그 사람"이 열정을 담아 써 내려간 글씨였다.
그 원고지들은 과거 그 사람의 방 안에 흩어져 있었고,
비앙카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구겨진 자국을 정성스럽게 펴 주었었다.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집으려 했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종이의 가장자리가 타들어 가며 순식간에 재로 흩어졌다.
어느새 나비들이 점점 늘어났다. 수많은 나비가 허공을 맴돌다 차례로 생명을 잃고 떨어졌다.
새하얀 종이들은 비앙카의 곁에 점점 쌓여 가며 마치 그녀를 이곳에 묻어 버리려는 듯했다. 형체 없는 검은 불길이 그 움직임을 따라 번지며 종이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안 돼! 그건 그레이 레이븐 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쓴...!
비앙카는 불길을 막으려 손을 뻗었고, 그제야 자신의 손가락이 거의 투명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손끝은 눈앞의 것들을 아무 저항 없이 통과할 뿐, 그 무엇도 붙잡을 수 없었다.
!!
그때, 익숙하면서도 기묘한 목소리가 순백의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치 신비로운 "팬텀"이 다시 이곳에 강림한 것 같았다.
넌 너무 지쳤잖아. 왜 잠들려고 하지 않는 거야… 비앙카?
그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비앙카의 머릿속이 서서히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넌 그냥 내 환각일 뿐이야.
…넌 존재하지 않아.
우린 원래부터 하나야. 나는 네 마음속 어둠, 네가 남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또 하나의 모습이야. 내가 이곳에서 사라지면 너 역시 함께 사라질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또 예전처럼 내 존재를 부정하려는 거야? 너 혼자서만 "그 사람"을 지키겠다고?
이유 없는 추궁은, 비앙카의 마음속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난 그 사람을 지킬 수 있어.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레이 레이븐 님은 내게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존재야.
하지만 그녀와 목소리가 거의 똑같은 "팬텀"은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게 네 대답이란 말이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넌 어디에 있었지? 그 사람이 너를 찾으러 꿈의 경계를 헤매고 있으면, 넌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너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인정해, 비앙카... 아무리 강한 척해도, 아무리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해도, 이 세상에는 네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넌 언제나 빛 속에 서서, 한낮의 햇살만 영원히 누리고 싶어 하지. 실패하고 약해지는 모습은 보이기 두려워 해, 특히... 그 사람에게 말이야.
하지만 넌 모르고 있어. 그 어둠이 이미 네 마음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다는 걸…
밤하늘의 보름달을 본 적 있어? 달빛이 가장 밝을 때야말로, 새로운 그림자가 태어나는 순간이거든.
그러니 받아들여. 오늘 이 모든 건, 네 집착이 불러온 결과야.
나는 네 집착에서 태어나, 네 꿈속에 잠들어 있어. 내 존재를 부정할수록, 나의 모든 것은 더욱 선명한 현실로 다가올 거야.
……
자, 이제 이 질문에 대한 진짜 답을 얘기해 봐, 비앙카... 또 다른 나여.
내 존재를 끝까지 부정할 거야?
난...
말이 입가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이 단순하면서도, 어딘가 자신의 마음과 어긋나는 질문에 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팬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팬텀"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고, 방 안에는 오직 그녀 혼자였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그림자, 비앙카는 그런 자신의 일부를 부정할 수 없었다.
비앙카는 점점 투명해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존재 자체가 서서히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전혀 다른 생각 하나가 서서히 머릿속에서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추방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레이 레이븐 님. 더 이상 저 때문에 위험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오랜 침묵 끝에, 비앙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의 문을 열었다. 이번에 문 너머로 펼쳐진 것은 끝없는 새하얀 방이 아닌, 드넓은 설원이었다.
문을 나선 그녀는, 이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비앙카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설원 위에 남은 그녀의 발자국을 모두 지워 버렸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의 흔적을 온전히 지워 버렸다.
기나긴 여정 끝에, 설원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마침내 그 사람과 처음 만났던 극장의 윤곽을 발견했다.
그것은 끝없는 설원 위에 고독하게 서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여기야.
익숙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벽에 걸린 수많은 촛대 위의 희미한 불빛만이 조용히 흔들리며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비앙카는 문을 닫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차단하고, 촛대에서 초 하나를 집어 들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추었다.
그녀는 객석에 앉아,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무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만인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아침이 되면, 당신은 꿈에서 깨어나 상쾌한 공기 속에서 아름다운 하루를 맞이하겠죠.
오전에는 햇살이 쏟아지는 책상 앞에 앉아, 마음속 이야기를 써 내려가실 테고요.
갑자기 극장 대문의 촛불이 꺼지더니, 화려했던 문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후에는 바쁜 일을 잠시 내려놓고 공원 벤치에 앉아, 발밑에서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비둘기들을 바라보시겠죠.
밤이 오면, 조용히 거리를 걸으실지도 모르겠네요. 비가 조금 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 밤의 정취를 즐기시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극장 복도의 촛불들이 하나둘 깜박이다 꺼졌고, 그녀가 걸어온 길도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빛은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촛불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깊은 밤이 되면, 당신은 편안히 잠들며 내일도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대하시겠죠…
그런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실 수만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그리고 저는... 지금처럼 이곳에 남아 있으면 돼요.
비앙카는 거의 다 타들어 간 초를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촛농이 손등 위로 떨어져 눈물 자국처럼 흔적을 남겼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촛불이 흔들리며 점점 희미해져 갔다.
꿈속에서 끝까지 붙들고 있던 그녀의 의식도 이 촛불처럼 조용히 꺼져 가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레이 레이븐 님.
이제는... 제가 잠들 시간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