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기념일 이벤트 스토리 / 장막 뒤의 그림자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

오직 진심만이

>

비앙카와 함께 탄 차가 도심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차창 너머로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쉼 없이 스쳐 지나갔다.

신작 제작 발표회까지 이제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여주인공인 비앙카는 발표회에서 처음으로 모든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옆자리에 앉은 비앙카는 말없이 창밖의 야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의 시선을 느꼈는지, 비앙카가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앙카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비앙카

당신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영광인걸요.

비앙카는 부드럽게 웃다가,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비앙카

저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셨지만, "그레이 레이븐" 역할을 맡을 배우는 아직 정하시지 않은 것 같네요.

물론 제 마음속엔 이미 바라는 답이 있지만, 그래도 당신의 대답을 직접 듣고 싶어요.

비앙카는 예상대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한 그레이 레이븐은 일단 답을 피하기로 했다.

비앙카는 그레이 레이븐의 표정 뒤에 감춰진 "거짓말"을 꿰뚫어 본 듯했지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넘어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상대방의 손을 맞잡았다.

비앙카

좋아요, 기다릴게요.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제작 발표회 현장은 인파로 붐볐다. 비앙카와 나란히 앉은 그레이 레이븐은 모든 이들의 관심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기자들은 무대 위 두 주인공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각도에서 담으려는 듯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한 기자가 먼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기자

이번 신작은 사랑을 주제로 하셨는데, 비앙카 씨와 "연인" 역할을 맡게 될 배우는 정하셨나요?

아시다시피, 작가님께서는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필명을 사용해 오셨잖아요. 이는 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이자, 온갖 좋은 품성의 상징으로서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죠.

그동안 "그레이 레이븐" 역할은 여러 각색 작품에서 가상 이미지로만 표현됐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실제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오프라인 극작으로 각색되었는데요.

그렇다면, 작가님께서 직접 만들어 낸 "그레이 레이븐"을 연기하게 될 행운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기자의 질문이 장내를 울리자, 현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모두가 궁금해하면서도 쉽게 묻지 못했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그녀가 정확히 던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더욱 거세게 터져 나왔다. 모든 시선이 그레이 레이븐에게로 쏠렸고, 사람들은 숨을 죽인 그의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비앙카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

<i><size=50>"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세요."</size></i>

비앙카의 눈빛은, 마치 차 안에서 미처 듣지 못한 답을 기다리듯, 자신을 향해 되묻고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수많은 기자들의 시선에도, 오직 비앙카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i><size=50>"그레이 레이븐"은 바로 접니다.</size></i>

<i><size=50>제가 직접 제 작품 속 "그레이 레이븐" 역할을 맡을 예정입니다.</size></i>

그 대답을 들은 비앙카의 얼굴에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비앙카

"당신의 눈부신 빛 아래에서, 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온기를 느껴요."

"그리고 저는 오랜 추위에 떨고 있는 백합처럼, 당신의 손길 아래서 다시금 빛을 발하죠."

그것은 그레이 레이븐이 쓴 시의 한 구절이었다. 그 시구를 지금,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있자니 마음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마음속 생각도 그녀와 완전히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호수에 잔잔한 물결이 일듯, 주변을 가득 메운 열띤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이 공간에 오직 그레이 레이븐과 비앙카만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레이 레이븐은 자연스럽게 시의 뒷부분을 이어갔다.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맞잡은 손에는 방금보다 더 깊은 힘이 실렸다.

수많은 플래시가 그레이 레이븐과 비앙카를 비추며, 이 영원한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밤은 이미 깊었고, 발표회장은 여전히 인파로 가득했다. 만찬과 무도회는 계속해서 즐거운 분위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던 기자들마저, 이젠 긴장을 풀고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주인공답게 모든 이의 기대에 품위 있게 화답했다. 우아한 춤이 몇 곡 이어지고 난 뒤, 문득 댄스 파트너였던 비앙카가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며 시선을 몇 번이고 돌린 끝에, 마침내 저 멀리에 있는 비앙카의 가녀린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연회장 가장 먼 구석에 서서 수많은 사람 너머로 그레이 레이븐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비앙카가 웃었다. 그러나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레이 레이븐이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자

그레이 레이븐 님, 괜찮으시다면 사인 한 장 부탁드립니다!

혹시 단독으로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열광의 물결이 다시 한번 그레이 레이븐을 에워싸며 비앙카와의 거리를 무심하게 갈라놓았다. 환호와 열기로 가득 찬 인파 저편에서, 비앙카는 마치 달빛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비앙카는 화려한 실내로 들어오지 않고, 연회장 가장 먼 발코니에 홀로 서서 서늘한 밤공기를 맞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전해져오는 애틋한 시선을 느끼며, 그녀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다.

비앙카

오늘 밤, 진정한 주인공은... 당연히 그레이 레이븐 님이시죠.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해요.

비앙카는 고개를 들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달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구름이 밤바람에 흘러와 달을 가리자, 그녀의 몸을 감싸던 은은한 달빛도 희미해졌다.

밤새 다른 이들 앞에서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던 탓일까. 비앙카는 문득 피로를 느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어둠 속에 띄워 보냈다.

밤하늘의 구름은 점점 짙어졌고, 공기에는 비를 예고하는 습한 냄새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수상한 목소리

비앙카...

너는 이런 자리에서조차, 진정한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구나...

비앙카

……!!!

허공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 비앙카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눈을 떴다. 그러나 주변은 여전히 흥성거리는 연회장뿐이었고, 이상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비앙카

환청인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게 들렸나…

이 순간에도, 저 사람을 온전히 독차지할 생각을 못 하는구나.

그럴 거면, 나한테 넘겨.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주인공"의 곁에 서 주지...

비앙카

너였어...!

비앙카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악몽 속 깊이 묻어둔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레이 레이븐"과 함께 탔던 배 아래에 숨어 있던 바로 그 그림자였다.

그와 동시에, 기이한 그림자가 연회장 유리창을 타고 탁한 진흙처럼 서서히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던 사람들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환희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그 그림자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생명체를 예리하게 감지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위압감이 소리 없이 주변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비앙카는 경계하며 고개를 돌렸고,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기이한 형체와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순간적인 혼란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비앙카의 몸은 이미 본능에 이끌리듯 그레이 레이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앙카

그레이 레이븐 님, 조심하세요!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주변에서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유리창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비앙카는 생각할 틈도 없이, 그레이 레이븐을 힘껏 끌어안은 채,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그 순간 거센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뺨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비앙카는 땅에 부딪히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품에 있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주위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비앙카는 품속의 사람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자신의 몸으로라도 이 갑작스러운 재앙을 막으려 했다.

시끄러운 소리

무슨 일이야, 창문이... 창문이 왜 갑자기 다 깨졌어?!

빨리 구급차를 불러! 얼른 직원들 데려와!

로비 안은 비명과 혼란스러운 외침으로 뒤덮였다. 충격에서 벗어난 이들은 황급히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비앙카의 보호 아래서 무사했던 "그레이 레이븐"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비앙카

저는 괜찮아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그레이 레이븐의 부름에 비앙카는 가쁜 숨을 고르더니, 괜찮다는 듯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그레이 레이븐이 무사한지만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비앙카는 손가락으로 그레이 레이븐의 몸 이곳저곳을 조급하고 세심하게 훑었다.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안절부절못했지만, 정작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는 눈치채지 못했다.

비앙카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레이 레이븐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비앙카의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손수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며 피비린내를 풍겼다.

비앙카

그레이 레이븐 님, 저는 괜찮으니 혹시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는지 다시 한번 잘 살펴보세요.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금은 무엇보다 비앙카의 상처를 임시라도 처치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레이 레이븐은 비앙카를 부축해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빠져나와 한적한 곁방으로 향했다.

소파에 조심스럽게 반쯤 눕히고 자신의 팔에 기대게 한 뒤, 깨끗한 물과 손수건으로 최대한 상처를 닦아냈다.

비앙카

으윽…

그제야 상처의 통증이 느껴졌는지, 비앙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레이 레이븐의 팔을 붙잡았다.

아무도 없는 이 방은 소란스러운 연회장과는 달리 한층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서늘한 기운은 상처를 입은 비앙카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레이 레이븐은 마치 작품 속 "그레이 레이븐"이 날개를 펼치듯 외투를 벌려, 비앙카를 조용히 감싸안았다.

비앙카

네…

피로가 심했던 탓인지, 비앙카는 더 이상 평소의 예의 바르고 단정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가볍게 대답만 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레이 레이븐"의 넓고 따뜻한 "날개"의 보호 아래, 비앙카의 거친 호흡이 점차 부드럽고 고르게 안정되어 갔다.

창밖에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앙카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고, 그녀는 혼자만 아는 꿈속으로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비록 피는 멎었지만, 새하얀 뺨 위에 난 상처는 여전히 깊은 자국을 남겨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짧은 순간,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용기로 그를 감싸안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피가 멈추지 않던 그 아찔한 순간에도, 비앙카의 시선은 여전히 그레이 레이븐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그녀의 손을 잡고 거리를 좁혀, 자신의 체온으로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랐다.

비앙카는 잠결에도 그 온기를 느낀 듯, 무의식적으로 그레이 레이븐의 손을 더 꼭 붙잡았다.

비앙카

계속 이렇게...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비앙카의 잠꼬대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맴돌았다.

비앙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레이 레이븐의 말이 꿈속까지 닿았는지,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가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마주하고 있는진 알 수 없지만, 그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레이 레이븐은 다른 한 손을 뻗어, 귓가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천사처럼 잠든 그녀를, 차마 깨울 수 없었다.

창밖의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밤을 더욱 짙고 흐릿한 장막으로 덮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 비가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비앙카의 잠꼬대가 빗소리를 뚫고 귓가에 맴돌았다.

???

더는 무의미한 그림자를 쫓지 마라, 이곳을 떠도는 나그네여.

이곳은 이미 텅 비었다. 네가 지나온 찬란했던 날들의 잔영조차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

그레이 레이븐의 대사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맞은편에 있던 단장이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극단장

눈빛도 살아있고, 감정도 풍부하고, 연기가 아주 좋았어요. 역시 원작자가 직접 나서니 다르네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직 [player name] 님처럼 재능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의 성과를 내다니, 정말 놀랍네요. 만약 나중에 전업할 생각이 있으면, 저희 극단을 고려해 보는 건 어떠세요? 당신이라면 저희 극단 수석 배우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예요.

극단장

좋아요, 그럼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죠. "그레이 레이븐"과 "팬텀"의 첫 만남입니다.

단장은 "팬텀"의 가면을 쓰고 능숙하게 역할에 몰입했고, 그레이 레이븐 역시 숨을 고르며 극 중 인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깊은 밤에, 멋대로 내 영역에 발을 들인 자는 누구인가? 그대는 내가 기나긴 밤 동안 기다려온 이가 아니로군.

잠깐만요. 여기선 그런 느낌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연습하죠. 너무 긴장하면 오히려 감정 잡기가 더 어려워요.

단장은 "팬텀"의 가면을 벗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극단장

솔직히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비앙카의 상태예요. 이번 연극에 너무 깊이 몰입하고 있어요.

무대 위에 선 비앙카를 볼 때마다, 그건 연기라기보다 자신의 영혼과 열정을 배역에 완전히 녹여내는 과정처럼 느껴져요.

가끔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렇게 깊이 몰입하다가, 무의식중에 정신 상태에까지 영향을 주진 않을지... 사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본인은 계속 아니라고 하지만, 저는 항상 그녀가 연기하는 배역이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고 있다고 느껴져요... 마치 그녀의 또 다른 "인격"처럼요.

극단장

…제가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아 실례했네요.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세요.

시간도 늦었고, 극장 시설을 다시 한번 점검하러 가봐야겠어요. 지난번 샹들리에 추락 사고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극장을 나서니 밖은 이미 어둠에 잠겼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그레이 레이븐은 극장 처마 밑에서 빗줄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밤비를 바라보자, 문득 그날의 제작 발표회가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비앙카는 그레이 레이븐의 품에 기대어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날의 사고 이후, 비앙카는 상처 치료를 위해 휴가를 냈고 며칠째 극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최근 "특별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혼자 연기 연습을 할 때, 허공을 보며 연기를 펼치고 있으면, 자꾸만 비앙카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특히 애틋하게 마음을 털어놓던 그녀의 모습이...

빗줄기를 따라 떠돌던 생각은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이끌려 순식간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

그렇게 멍하니 비 맞고 서 있으면 감기 걸려요.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비앙카가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빗속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은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다.

비앙카

한동안은 그치지 않을 것 같네요. 제가 집까지 바래다드릴게요, 그레이 레이븐 님.

그런 표정을 짓지 마세요.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비 내리는 밤거리는 적막하고 행인이 거의 없어 마치 이 길이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작은 우산 아래 둘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바짝 붙었다.

빗물에 반사된 불빛이 비앙카의 옆얼굴을 비췄다. 비앙카는 상대방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며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비앙카

사실 우산을 하나 더 가져왔어야 했는데, 이렇게 같은 우산 아래에서 더 가까이 있고 싶었어요.

비앙카가 자신의 쪽으로 조금 더 다가오자, 옷 너머로도 온기가 느껴졌다.

가까이서 보니, 지난번 사고로 생긴 상처가 더욱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비앙카는 그레이 레이븐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오히려 아물어가는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었다.

비앙카

그렇게 계속 바라보시면,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레이 레이븐 님만 무사하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이 상처는 제게, 우리 둘만의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어떤 위로의 말도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그레이 레이븐은 그저 조용히 우산을 비앙카 쪽으로 기울였고, 그녀 또한 살며시 상대방의 팔짱을 꼈다.

그레이 레이븐은 자신의 집이 보일 때까지 말없이 비앙카와 함께 걸었다. 평소엔 제법 긴 거리였지만, 오늘 밤만큼은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지만, 이 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던 찰나,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비앙카의 눈빛에서 따뜻한 교감이 느껴졌다.

비앙카

하지만 저는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날 밤 연회장에서 저를 지켜주셨으니, 오늘 밤은 제가 지켜드릴게요.

비앙카는 의도적으로 "팬텀"에 대한 이야기를 피했지만, 그 존재가 먹구름처럼 둘 사이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팬텀"이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다시 악행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희미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며칠간 계속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며 "특별 훈련"에 매진한 탓에, 방은 오랫동안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바닥에는 미완성 원고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최근 벌어진 "팬텀" 사건에서 영감받아, 더 좋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해 대본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듬은 흔적들이었다.

비앙카

쉬고 계세요. 나머지는 제게 맡기시면 돼요.

처음 와본 곳임에도, 비앙카는 마치 모든 물건의 위치를 훤히 아는 듯 능숙하고 가볍게 방 안을 오가며 순식간에 정리를 마쳤다.

비앙카는 모든 원고를 꼼꼼히 정리한 뒤 창문을 열었다. 비는 이미 그쳐있었고, 시원한 밤바람이 방 안으로 불어와 묵은 공기를 걷어냈다.

비앙카

전에도 여러 번 와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음...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가끔은 제가 현실에 있는지, 꿈속에 있는지 헷갈려요. 겪는 일들이 데자뷔처럼 느껴지고, 마치 꿈에서 본 것만 같아요.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져서,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나는 과연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현실에 있는 걸까…

비앙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다음 말을 이어갈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그레이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비앙카

분명 처음 만난 것인데도, 자꾸 꿈에서 그레이 레이븐 님을 본 것만 같아요. 지금도 혹시 또 다른 꿈속으로 들어온 건 아닌지 헷갈려요.

하지만 무엇이 됐든, 지금의 저는 정말로 당신 곁에 있네요.

비앙카의 말은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감정을 건드렸고, 그레이 레이븐은 같은 마음으로 화답했다.

비앙카의 얼굴을 보자, 문득 "약속"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작품 속 "그레이 레이븐"이 연인과 약속하던 장면처럼, 그레이 레이븐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간결하면서도 헷갈리지 않을 "표식"을 그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비앙카는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둘 사이의 교감이 이전보다 더욱 깊어진 것을 느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비앙카

"그대의 마음속 사랑으로,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서약을 새기리."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바뀌어도..."

그레이 레이븐이 비앙카의 대사를 이어받아 마음을 전하자, 그녀도 상대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이 순간의 고요함을 만끽했다.

서로에게 조용히 기댄 채 시간의 흐름도 잊어갈 무렵, 시계의 정시 알림 소리에 문득 자정이 넘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레이 레이븐의 머릿속에 스친 첫 번째 생각은 "오늘의 원고를 아직 시작도 못 했다"였다.

그레이 레이븐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진한 커피로 밤샘 작업을 준비하려 부엌으로 향하던 찰나, 비앙카가 손등을 살며시 눌러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비앙카

대본보다 더 중요한 건 건강이에요. 제발, 더는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세요.

비앙카

그래도 오늘 밤만큼은 푹 쉬세요. 작품에서도 피로는 전사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하셨잖아요.

말하는 사이, 비앙카가 이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허브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은은한 향기가 수증기와 함께 방 안을 가득 채우며, 지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침실의 두꺼운 커튼을 치고, 찻잔을 그레이 레이븐의 입술 가까이 가져다주었다.

비앙카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꾸세요. 제가 곁에서 계속 지키고 있을게요.

비앙카

며칠 동안 생활 패턴을 잘 조정해 뒀으니 걱정 마세요. 낮에 충분히 쉬었어요. 자, 이제 눈 감고 푹 쉬세요.

비앙카의 말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이내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가 온몸을 감싸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을 스치며 간지러운 촉감을 남겼고,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 위로 조용히 얹어졌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지켜주고자" 하는 듯한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손바닥 위로 미세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비앙카가 그 위에 둘만의 약속인 "표식"을 조용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그레이 레이븐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고 비앙카의 손길을 느꼈다. 한참 뒤, 그녀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멈췄다.

비앙카의 잠든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그레이 레이븐을 깨울까 봐 침대 옆 의자에 조용히 앉은 채, 한쪽 팔에 머리를 기대고,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상대방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분명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결국 먼저 잠들어 버린 그녀였다.

그레이 레이븐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조심스럽게 빼낸 뒤,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레이 레이븐은 비앙카를 안아 침대 안쪽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몸이 매트리스에 닿자, 그녀는 마치 금방이라도 깰 것처럼 몸을 불안하게 떨었다.

비앙카

그레이 레이븐 님... 제 곁에서... 떠나지 말아 주세요...

밖의... 전장은... 위험해요...

비앙카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며 그레이 레이븐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혼란스러운 꿈속에서 전쟁터를 헤매고 있는 듯했다.

비앙카

제가... 계속... 지켜드릴게요...

지휘관님...

비앙카가 입 밖으로 이런 호칭을 내뱉은 건 처음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에서 수없이 등장했던, "그레이 레이븐"의 신분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그녀를 이토록 사로잡은 걸까? 아니면 그녀가 말했던, 수없이 반복된다는 그 꿈에 또다시 빠져든 걸까?

꿈속의 그녀는 포화와 폐허를 헤치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굳건히 나아가고 있을까?

비앙카

드디어 찾았네요, 지휘관님...

비앙카는 잠꼬대를 이어가며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 레이븐의 품 안이 편안한 안식처라도 되는 것처럼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레이 레이븐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품 안의 비앙카를 침대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준 뒤, 그녀 곁에 조용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다시 비앙카에게로 손을 뻗어, 비 내리던 그날 밤처럼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비앙카도 그 감촉을 느꼈는지, 깨어나지 않은 채로 그레이 레이븐 쪽으로 조금 더 밀착해 왔다.

비앙카의 얼굴은 그레이 레이븐을 향해 있었다. 방 안은 어둠에 잠겼지만, 그녀의 옆얼굴에 남은 아물어가는 상처는 여전히 희미하게 보였다. 그 상처를 보자, 그레이 레이븐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지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레이 레이븐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탄식했다. 그 순간의 비앙카는 자신이 쓴 이야기 속, 지휘관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며 몸을 던지던 동료와 같았다.

부드러운 담요 아래, 바로 곁에서 비앙카의 체온이 전해지자 깊은 졸음이 몰려왔다.

보이지 않는 잠의 요정이 방 안에 조용히 내려와, 둘을 밤의 장막 아래로 감싸안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