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갯속의 서곡
>몸을 감싸는 안개와 서늘한 한기가 뼛속 깊이 스며들어, 숨을 쉴 때마다 칼날 같은 냉기가 폐를 파고들었다.
비앙카가 든 노가 조용히 수면을 갈랐고, 그녀와 그레이 레이븐을 태운 작은 배는 끝없는 지하 강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자욱한 안개는 시야를 뒤덮어, 뱃머리의 희미한 등불마저 한 뼘 남짓한 거리밖에 비추지 못했다. 그 너머로는 짙은 안개가 마치 무언가를 엿보는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그레이 레이븐 님, 이제 곧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불쾌한 곳이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안심하세요. 제가 반드시 무사히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비앙카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앉아 있는 회색 옷의 그림자를 부드러운 말로 안심시켰고, 상대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안갯속에서도 옷에 새겨진 회색 깃털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마치 이정표처럼 비앙카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어느새 보이지 않는 힘이 노를 휘감아 더는 저을 수 없게 되었다. 배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 섰다.
마치 물 아래의 기이한 그림자가 조용히 깨어나, 외로운 배 밑에서 비앙카와 그레이 레이븐을 엿보는 듯했다.
물속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레이 레이븐 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비앙카는 그레이 레이븐의 도움을 마다하고, 등불을 들어 물속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에 의해 일렁이던 수면은 어느새 거울처럼 잔잔해져 비앙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물속에 비친 얼굴은... 지금의 비앙카와는 달리 기이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놀란 비앙카는 얼굴을 굳혔다. 물속의 "비앙카"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그 눈 속의 한기는 주변 안개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건 물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이미 늦었어. 그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생각은 마.
네 곁에 있는 그 사람을 나한테 넘겨.
물속의 기이한 형체가 자신과 똑같은 "비앙카"의 얼굴을 하고 있자, 극심한 혼란과 정체 모를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 "그레이 레이븐"을 지키려 했지만,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밀려오는 공포가 비앙카의 심장을 강하게 조였다.
그레이 레이븐 님, 어디 계세요?!
제발, 대답해 주세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었고, 비앙카의 목소리는 짙은 안개 속으로 삼켜질 뿐이었다.
안개가 점점 더 짙어졌다. 형체 없는 안개가 마치 생명을 얻은 듯 촉수로 변해 비앙카의 목을 휘감으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하지만 비앙카를 두렵게 한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 이 짙은 안개 속에서 "그레이 레이븐"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더욱 깊은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그 사람을... 데려가지 마...
산소 부족으로 눈앞의 하얀 안개는 점점 어둠으로 변해갔고, 마치 두꺼운 암막 커튼처럼 비앙카의 이성과 의식을 조금씩 집어삼켰다.
마침내 모든 것이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비앙카... 무대 뒤에서 잠들어 버리면 어떡하니? 감기 들겠다.
일어나 봐... 비앙카!
연이은 부름이 짙은 어둠 속을 헤집으며, 잠들어 있던 비앙카의 의식을 서서히 끌어냈다.
귓가에 계속 울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비앙카는 겨우 눈을 떴다.
윽...
희미한 두통이 밀려왔다. 한참 만에 겨우 시야의 초점이 맞춰지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중년 여인이 몸을 숙여 비앙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혼란스럽던 의식이 점차 또렷해지면서, 비앙카는 자신이 극장 무대 뒤 소품 더미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 너머로 무대의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극단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비앙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각난 기억이 현실과 이어지면서, 악몽 속에서 비앙카를 괴롭히던 기이한 안개가 서서히 걷혀 갔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비앙카는 연습 도중에 무대 뒤 한적한 곳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 저편에선 다른 단원들이 한창 연습 중이었다.
손에 있던 책은 식은땀에 젖어 한쪽 모서리가 축축해져 있었다. 방금 그 악몽 속에서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단장은 비앙카의 손에서 책을 조심스럽게 빼낸 후, 표지에 적힌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작가명을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어디에 계세요"라고 하면서... 계속 잠꼬대를 하더라. 꼭 넋이 나간 것 같았어.
요즘 신작 선정 회의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더니, 역할에 너무 몰입해서 악몽까지 꾼 모양이네.
"그레이 레이븐"...
비앙카는 급히 일어나, 잠든 사이 구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장에게 예를 갖췄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어젯밤에 잠을 설쳤더니,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단장은 비앙카의 "약속"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조심스레 비앙카를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
네가 "그레이 레이븐" 작가의 작품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건 나도 알아.
네 실력이라면 다시 여주인공으로 뽑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걱정이 돼... 지금 너무 몰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대본과 역할에 대한 네 열정은 나도 잘 안다만, 지금 그 "열정"이 오히려 널 갉아먹고 있어.
다른 배우들은 그저 역할을 연기할 뿐인데, 넌 언제나 자신이 그 "역할 자체"라고 믿고 있잖아. 계속 그러다간 너무 깊이 빠져서, 정말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
단장의 말은 보이지 않는 실이 되어 비앙카의 생각을 조용히 붙잡아, 얼마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날은 비앙카가 처음으로 여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섰던 날이었다.
극이 전개되면서 비앙카가 연기하는 "어둠의 여공작"이 등장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모든 관객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이야기 속 "어둠의 여공작"은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무고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하게 되었고, 결국 "용사"의 검 앞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공작"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마친 후, 비앙카의 머릿속에 기이한 감각이 밀려 들어왔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이성을 베어내듯, 기억의 공백이 얼음 위 균열처럼 서서히 번져나갔다.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찰나의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던 공연은 어느새 멈춰버렸고, 비앙카는 극의 흐름을 깨는 불협화음처럼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
무대 아래에서 관객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용사" 역을 맡은 동료는 무대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언제 등장해야 할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공연은 이미 너무 오래 중단된 상태였다. 이제는 임기응변으로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야만 했다.
비앙카는 태연하게 "내게 맡겨"라는 눈빛을 보낸 뒤, 재빨리 역할에 몰입했다.
나도 한때는 인간과 같은 생명을 가졌었지. 비록 그 삶이 찰나처럼 짧고 연약했을지라도... 웃고, 울고, 사랑할 줄 알았었어.
하지만 이제, 어둠 속에 사는 내게 남은 건... 이 고독하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생명뿐이야.
스포트라이트가 비앙카를 비추었다. 폐허가 된 "성 대전"에 홀로 선 그녀는, 마치 진짜로 절망과 슬픔에 빠진 "어둠의 여공작"처럼 보였다.
"여공작"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운명과 고독을 토로했다. 그 순간 비앙카는 연기를 넘어, 비극적인 운명의 "여공작"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매혹적인 실이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듯 퍼져나가, 모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흥, 한때 달콤했던 연인도 이제는 나와 대적하는 "용사"가 되었지. 그들은 결국 내 손에 목숨을 잃었고, 이 소중한 검 한 자루만 남겼어.
눈앞에 선해... 한때 내게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했던 그이가, 이제는 삼도천 저편에서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여공작"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검을 치켜들 듯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는 마지막 체념과 함께 깊은 그리움이 어른거렸다.
보이지 않는 "검"이 갑자기 "여공작"의 가슴을 꿰뚫었고,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던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무대 위에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고, 조명 아래로 깊은 여운이 감돌았다.
곧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고, 그 소리는 무대의 막이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비앙카는 객석에서 회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자신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쓰러진 채 미동도 없었고, 동료들은 기쁨에 찬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왔다.
선배, 정말 대단해요! 방금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무대에 올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완전 애가 타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렇게 순발력 있게 대처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멋져요!
비앙카가 몸을 일으키자, "용사" 역을 맡았던 애리안이 흥분한 얼굴로 달려와 그녀를 껴안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평소처럼 동료의 열정에 화답하지 않고, 마치 방금 전 연극의 여운에 잠긴 듯 멍하니 있었다.
내가 찾던 삼도천은 어디에 있는가...
저기, 선배. 공연은 이미 끝났어요... 괜찮아요?
동료가 걱정스럽게 비앙카의 팔을 흔들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앙카는 긴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 그래, 이미 끝났구나.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야.
정말 죄송합니다. 모두에게 폐를 끼쳤네요.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요! 방금 정말로 "어둠의 여공작"이 선배한테 빙의한 줄 알았어요!
난 괜찮아. 그냥 잠시 딴생각을 한 것뿐이야.
비앙카는 애리안의 어깨를 다독여 안심시킨 뒤, 무대 뒤쪽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단장과 마주쳤다. 방금 전의 상황을 모두 지켜본 모양이었다.
단장님, 방금 공연 사고는 모두 제 잘못입니다.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비앙카는 단장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비앙카, 널 책망하려는 게 아니야. 사실 넌, 모두의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해냈어.
다만 방금 네 모습이, 역할에 너무 몰입한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다가 자칫...
비앙카가 겨우 제정신을 차렸을 때, 단장은 여전히 곁에 앉아 어머니처럼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단장의 걱정 어린 눈빛은 그날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단장님, 사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행동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내일 신작 선정 회의에서 반드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비앙카. 그럼 오늘은 이만 일찍 들어가서 쉬렴.
단장의 얼굴에 한층 더 짙은 근심이 드리워졌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그레이 레이븐"의 서명이 담긴 책을 비앙카에게 돌려주며, 걱정 어린 마음을 담아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비앙카는 정중히 인사한 뒤 조용히 돌아섰다. 단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네가 역할에 너무 깊이 빠져서, 자칫... 역할에게 "지배"당할까 봐 걱정이 되는구나.
벗기 힘든 또 다른 가면을 쓴 것처럼 말이다.
한참 뒤, 단장은 시선을 거두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부질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지금 비앙카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이해와 시간일 수도 있다.
딸깍.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자, 비앙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그레이 레이븐"의 작품이 들려 있다는 걸 깨닫고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 조용히 눈앞의 책들을 바라보았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에는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세심히 읽어 내려간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모든 책등에는 하나같이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신비주의 작가 "그레이 레이븐"은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불굴의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이 있었고,
비앙카는 전쟁이나 재앙을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레이 레이븐"이 쓴 이야기에서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낸 듯한 익숙함과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제 꿈속에 나타난 건... 그레이 레이븐 님이신가요?
계속 그레이 레이븐 님을 찾아 헤매 온 것 같아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느껴지는데도, 정작 많은 것들이 잘 떠오르지 않네요.
하지만 내일이면, 드디어 그레이 레이븐 님을 직접 뵐 수 있겠네요.
정말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왔어요.
비앙카는 책등에 새겨진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이름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비앙카는 서둘러 극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신작 선정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대 뒤에 도착하기도 전에, 회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비앙카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는 어설픈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정하게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나를 기다려온 나의 연인이여, 천 리 밖에 있어도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대의 다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소.
기나긴 기다림에 그대의 몸은 수척해졌으나, 그대의 뜨거운 마음은 여전히 황금처럼 눈부시구려.
나의 연인이여, 지금 이 순간, 마침내 그대 곁으로 돌아왔... 으음... 다음 대사가 뭐였더라? 까먹었네...
눈앞의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결국 연기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채, 가면 뒤에서 웃음을 흘렸다. 가면이 벗겨지고 애리안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아, 분위기를 망쳤네요. 왜 대사를 까먹어서…
선배가 그렇게 기다리던 "그레이 레이븐" 님으로 꾸미고 온 건데, 왜 호응이 없어요?
비앙카는 그저 손을 뻗어, 열연하느라 헝클어진 애리안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살짝 웃었다.
네 장난인 줄 알았어. 그래도 연기는 괜찮더라.
조금 뒤 있을 신작 선정 회의에서도 지금처럼만 해.
선배, 너무 걱정 마세요. 오늘의 회의를 위해 선배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요! 문제없을 거예요!
애리안은 방금 "그레이 레이븐"으로 분장했던 옷을 정리하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선배? 오늘 드디어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그레이 레이븐" 님을 만나게 되는데, 어젯밤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잔 거 아니에요?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좀 과한 것 같은데. 그리고 난...
뜻만 비슷하면 됐죠. 선배가 "그레이 레이븐" 님 광팬인 거, 우리 극단에서도 다 아는 사실인데요, 뭐.
나오는 작품마다 빠짐없이 사들이고, 연습 중간에도 늘 그분의 책만 보고 계셨잖아요. 마치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연인처럼 말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마...
비앙카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소 무례한 농담이었지만, 묘하게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다.
비앙카는 짓궂은 장난에 조용히 미소로 화답하고는 애리안의 손을 잡고 함께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이미 신작 선정 회의에 참석할 배우들이 하나둘 모여 있었다.
단장은 기대에 찬 얼굴들을 마주 보며, 손에 든 선정작 봉투를 가지런히 모아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신작 선정 회의"에 관한 내용은 전에 이미 공지했듯이, 다들 오랫동안 기다리셨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여러분의 꿈을 실현할 기회의 날입니다.
공정성을 위해, 오늘 참석한 모든 작가님은 익명으로 주제를 제출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하시면 됩니다.
만약 작가님의 선택을 받게 된다면, 그분의 차기작에 출연할 "행운의 주인공"이 되실 겁니다.
자, 이제 앞으로 나오셔서 이곳에서 주제를 골라 주세요. 꿈을 향한 순조로운 첫걸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배우들은 마치 새들처럼 단장 주위로 모여들어, 기대에 찬 얼굴로 봉투를 하나씩 열어보며 옆 동료와 어떤 주제를 선택할지 의견을 나눴다.
몇 차례의 선택이 오간 뒤, 배우들은 저마다 봉투를 움켜쥐고 서둘러 분장실로 향했다.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 뒤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북적이던 방에는 이제 비앙카 혼자만 남았다.
그리고 주인을 찾지 못한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모두 한 번쯤 열어보긴 했지만, 안에는 백지 한 장뿐이었기에 결국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봉투였다.
주제 중에 백지가 섞여 있었네. 아마 직원의 실수일 거야…
그러나 비앙카는 종이에 희미하게 새겨진 깃털 문양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그것을 가슴에 품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뇨, 제게는 이것도 하나의 특별한 "주제"로 보입니다. 그리고 출제자의 의도도 알 것 같고요.
"단막극"이 하나둘씩 막을 내릴 때마다, 객석의 작가들은 박수를 보내며 자신들의 주제를 멋지게 소화해 낸 배우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극장 안의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열기는 자연스레 극장 밖으로 옮겨졌다. 밖에서는 배우와 작가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회색 옷을 입은 작가 한 명만은 여전히 객석에 홀로 앉아, 자신의 여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비앙카는 다시 한번 종이에 새겨진 깃털 문양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품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막이 다시 오르고,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환히 밝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주인공이 천천히 빛 속으로 걸어 나왔다.
눈부신 조명 탓에 객석에 앉은 인물의 얼굴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옷에 새겨진 회색 깃털 문양만은 이상하리만큼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레이 레이븐의 작품 곳곳에 등장했던, 극소수의 열성팬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문양이었다.
드디어 만나 뵙게 되었군요, 그레이 레이븐 님.
무대 아래의 인물은 중앙에 선 그녀의 모습을 응시했다. 어떤 익숙한 기억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없죠.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작가님은 언제나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오셨죠. 작품의 서명부터 이야기 속 주인공까지,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상징은 이미 작가님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적도 없고, 오늘 역시 자기소개를 하지 않으셨죠.
하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이런 자리에서까지 신비주의를 유지하고 싶으시다면 "그레이 레이븐"의 표식은 감추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작가님의 그 텅 빈 편지지도, 지금 입고 계신 옷의 문양도, 제게는 전부 "자기소개"로 느껴지거든요. 어쩌면, 이것 역시 작가님이 준비하신 "테스트"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네요.
무대 아래의 작가가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비앙카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에는 방금 전의 순수함 대신 신비로운 매혹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의 모습으로, 다시 당신 곁으로 돌아갈게요.
그녀의 속삭임과 함께 "어둠의 여공작"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 운명과 고독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다.
마치 또 다른 운명에서 온 슬픔의 그림자가 이 고요하고도 화려한 어둠 속에 조용히 내려앉은 듯했다.
그녀는 무대 아래로 내려와 객석의 "그레이 레이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 깊은 눈빛에는 삼도천에서 기다리는 연인을 향한 "여공작"의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나의 연인이여, 정말 그대는 수백, 수천 년 동안 삼도천에서 나를 기다려왔던 것인가?
그레이 레이븐의 시선이 비앙카의 얼굴에 머물렀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눈빛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봐, 대작가, [player name]! 다들 밖에서 단체 사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한 청년이 문을 연 채로 고개를 내밀며 극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크흠... 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 보네. 그냥 밖에서 기다릴까? 아니면 둘이서 먼저...
좋아, 3초 기다렸는데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밖에서 기다리라는" 뜻인 것 같군.
음, 지금 표정이 또 바뀌었어. 오른쪽 눈썹이 0.2cm 올라가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속으로 "얘는 왜 이렇게 귀찮게 해"라고 생각하고 있군.
그레이 레이븐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베르드는 비앙카에게로 시선을 옮겨 날카로운 품평을 이어갔다.
아가씨, 연기가 아주 훌륭해. 둘의 몸짓과 호흡을 보니, "연인" 역할에 딱 어울리는 조합이군…
그레이 레이븐은 멋쩍게 헛기침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앙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상대방이 내민 손에 응하지 않았다. 무대를 등지고 선 그녀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쩌면 햇살보다는 그림자가 제게 더 어울릴 것 같네요.
비앙카는 알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왠지 모를 기이함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비앙카에게서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언뜻 스친 듯했다. 그녀를 붙잡고 묻기도 전에, 베르드가 다시 끼어들어 생각을 방해했다.
정말 좋은 선택이야. 확실히 네 새 작품의 여주인공으로는 100% 적합해!
추리, 당연히 내 추리지. 내가 쓴 모든 탐정 소설을 걸고 맹세하건대, 네 눈빛이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어. 그녀가 바로 네 운명의 여주인공이라는 걸 말이야.
다만,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두운 극장 천장에서 금속이 뒤틀리는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본능적으로 대화를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하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묵직하고 날카로운 위압감이 위에서부터 한순간에 쏟아져 내렸다. 보이지 않는 괴물이 덮쳐오는 듯한 압박감이 숨을 조여왔다.
좁은 좌석 때문에 피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 위압감은 점점 실체를 드러내더니, 거센 바람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덮쳐왔다.
베르드의 몸은 힘없이 날아가 뒤편 좌석에 세게 부딪혔고, 그레이 레이븐은 그 반동을 이용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충격을 피했다.
쾅!
거대한 굉음이 텅 빈 극장 안을 뒤흔들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와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 몸 가까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 습격의 "범인"은 놀랍게도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였다. 엄청난 충격에 아래쪽 좌석들은 박살이 났고, 수많은 수정 조각과 뒤틀린 금속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 부서진 좌석들처럼 되었을 것이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직원들은 눈앞의 참혹한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럴 수가! 정말 죄송합니다! 두 분, 많이 놀라셨죠!
어서 여길 벗어나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극장을 나와 거리를 무작정 돌아다녔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샹들리에 사건"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샹들리에가 떨어질 때, 극장의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들려온 유령 같은 웃음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레이 레이븐은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낮에 있었던 소란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고요한 정적만이 극장을 채우고 있었다. 추락했던 대형 샹들리에는 긴급 수리를 마치고 다시 제자리에 걸려 있었고, 바닥에 흩어진 몇 개의 작은 수정 조각들만이 얼마 전의 사건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오늘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아 텅 빈 극장을 둘러보았다. 환청인지, 희미한 웃음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그레이 레이븐은 미완성 대본을 꺼내 들고, 조용히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겪은 사고가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글씨가 종이의 절반을 채우기도 전에 등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 레이븐은 글을 쓰는 자세를 유지하며 돌아보지 않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밤에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이네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오늘 본 그 모습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극장 계단을 내려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더는 그런 것들에 얽매여 스스로를 고독의 감옥에 가두지 마세요.
"팬텀" 같은 걸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정말 기다려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의 유일한 "여주인공"... 저예요.
비앙카는 대답 대신,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그의 입술에 얹었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 아름다운 밤에 몸을 온전히 맡겨 보세요.
어둠에 둘러싸인 비앙카의 얼굴에, 낮에는 보지 못했던 확신과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앙카는 부드러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손길로, 그레이 레이븐의 손에 들려 있는 미완성 대본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살며시 얹었다.
비앙카는 그레이 레이븐의 손을 이끌고 무대로 올라가,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바짝 붙였다.
그건 제 작은 욕심이었어요. 우리 둘만의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고요한 밤이 찾아왔네요.
눈앞의 상대가 춤을 추려는 자신에게 응하지 않자, 비앙카의 목소리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왜 그러세요? 저와 단둘이 있는 게 싫으신가요?
텅 빈 극장은 어둡고 고요했다. 비앙카의 숨결이 바로 옆에서 느껴질 만큼 가까웠지만, 정작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낮에 비앙카와 함께 있었을 때, 느닷없이 발생한 그 기이한 사고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러세요, "적극적인" 제 모습이 어색하신가요?
당신의 글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잖아요. 저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당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처럼요.
비앙카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다른 말은 하지 마세요. 이제 당신이 해야 할 건... 그저 당신의 "여주인공"과 함께 춤추는 것뿐이에요.
이 "팬텀"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가요... 오늘 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오직 우리 둘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