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감촉이 감각의 끝자락을 부드럽게 건드리자, 꽃과 풀의 향기가 흐릿한 의식을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를 지나 물 위로 떨어지면서 그곳에 잠든 소녀를 감쌌다.
……
음...
라미아는 눈을 뜨며 흐릿한 의식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낯설지만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라미아는 물살에 기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깨어나셨어요?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이 연못가에 무릎 꿇고 라미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멍한 상태의 라미아의 얼굴을 다정히 어루만져주었다.
의식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의식은 이미 끝났습니다. 진행하던 중 잠이 들어버리셨습니다.
어? 아. 내가... 내가 어쩌다가...
그게...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잠이 들어버렸으면... 예전에 그 벌 같은 거 받게 되는 거야?
이... 이번에 갇히는 시간을 좀 짧게 해주면 안 돼? 거긴 정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란 말이야.
여사제는 가볍게 웃으며, 라미아를 연못에서 끌어냈다.
걱정 마세요. 의식은 잘 끝났습니다. 이번엔 아주 잘하셨어요.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는데도?
네. 라미아님께서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훌륭하게 해내셨기 때문에 잠든 것도 괜찮습니다.
자, 몸 닦으세요. 감기 걸리시겠어요.
여사제는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호위병 한 무리가 과일과 채소로 가득 찬 수레를 끌고 연못가에 나타났다.
사제님, 명하신 물품들을 모두 대령했습니다.
이제 호위병들이 라미아님을 집으로 모셔다 드릴 겁니다. 그리고 이 도시 사람들은 라미아님의 헌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기... 기억하다니 너무 부담스럽잖아!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말은 그렇다고 하지만, 라미아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호위병 뒤에 있는 수레를 힐끔힐끔 계속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여사제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숲속에서 과일과 채소로 가득 찬 다른 수레가 또 나타났다.
라미아님께서 이번에 완벽하게 해내셨기에 신전에서 특별 보상을 준비했습니다. 받아주세요.
라미아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제사가 필요할 때 신전에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열심히 할게.
라미아는 수레에 앉아 구불구불한 돌길 위를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부드러운 바닷바람과 조용히 울리는 갈매기 소리가 그녀를 편안하게 감싸 주었다. 라미아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이 평온함을 만끽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평화가 너무도 오랜만이었는지 라미아는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녀의 생각 또한 가벼워졌다.
라미아는 지금의 이 느낌이 좋았다. 밝고 경쾌한 꿈을 싫어하는 이가 있을까? 깊고 어두운 바다가 익숙한 물고기일지라도 가끔은 물 위로 나와 햇살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물고기가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흔들림이 라미아의 생각을 끊어버렸고, 그녀의 시야에 긴 해안선과 뾰족하게 솟아오른 건물들이 있는 어촌이 들어왔다.
오, 라미아가 돌아왔구나. 신전 쪽 일은 잘됐니?
응, 잘 됐어, 이것 봐. 이번에도 사제님께서 좋은 것들을 많이 보내줬어.
수레에서 뛰어내린 라미아는 가장 신선한 음식을 골라 노인에게 건넸다.
맛볼래? 도시의 장터에 가도 이렇게 싱싱한 과일은 드물 텐데, 그리고 이것도 있어, 다 훈제 고기야.
참 좋구먼... 라미아, 너도 나중에 사제들처럼 신전에 살 수 있을까?
라미아는 살짝 마음이 끌렸지만, 자신이 없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신전은 나 같은 어부의 딸을 달갑게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단지 의식에 잠깐 내가 필요한 거겠지.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지금은 이렇게 예쁜 옷까지 받았는데, 거기서 자리 잡을 수 있으면 더 좋지 않겠어?
자리를 잡는다고?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라미아는 수레에 있는 과일과 채소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고,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설렘을 억누르려 했다.
꼭 안 되다는 건 아니지, 이 의식은 도시 전체의 안위가 달린 일이잖아. 라미아, 넌 어린 나이에 의식에 여러 번 참여했으니, 기회가 올지도 몰라.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사제가 된다는 건 아직 너무 먼 이야기야. 그런데... 내가 정말 사제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다 내 말을 따르는 거야?
당연하지. 그때가 되면, 집집마다 매일 뭘 먹고 뭘 해야하는지, 그리고 언제 바다로 출항하고 또 언제 축제를 할지... 이 모든 일을 네가 결정할 수 있게 돼.
그.. 그래? 아주 괜찮은데!
그나저나, 그렇게 된다면 이웃 간에 다툼이 일어나도 네가 중재를 해야 할껄, 예를 들면 뭐... 좀도둑이나 집안 문제 같은 것도 네가 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해야 할걸.
라미아는 매일 자신이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 장면을 상상하자 갑자기 오싹해졌다.
헉... 방금... 방금 내가 했던 말을 잊어줘, 차라리 사제님이 삼 일 일하고 이틀 쉬는 지금의 생활을 계속 지켜주기를 바란다고...
라미아는 신전 쪽으로 경건하게 손을 모아 절한 뒤, 곧바로 수레를 노인에게 넘겼다.
수레에 있는 것들을 나눠줘. 난 해당과 애들하고 놀러 갈 거야.
하하, 그래. 가봐. 해당이랑 애들은 지금쯤 바다로 나가고 있을 거야.
노인은 수레로 다가가면서 살짝 올렸던 입꼬리를 천천히 내렸고, 표정은 다시 평온해졌다.
즐겁게 놀아야지, 즐겁게 노는 게 좋아, 아이들은 즐겁게 놀다 보면, 집에 가고 싶지 않거든.
집에 가고 싶지 않다니?
라미아는 무언가 느껴져서 뒤돌아봤지만, 노인은 수레 뒤로 돌아가서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음... 됐어.
바람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파도도 계속됐다. 오가는 소리가 마치 음악 같았다.
라미아는 파도를 밟으며 모래사장 위에 반쯤 잠긴 발자국을 따라 나아갔다. 그러다 바다로 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작은 그림자가 라미아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해당아~!
라미아가 웃으며 다가갔다. 그리고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라미아 앞에 멈춰서서 들고 있던 양동이를 들어 보였다.
양동이는 다양한 해산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양동이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느릿느릿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걸 본 라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이렇게나 많이?! 이 정도면 며칠 동안은 바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햇볕이나 쬐면서 쉬어도 되겠는데!
헤헤, 부럽죠? 같이 가요. 이번 파도에 밀려온 게 엄청 많아요. 그냥 줍기만 했는데도 한가득이에요.
그래! 조금 더 주워서, 음식이 충분하면 끼니를 자주 거르는 그 친구가 제때 먹을 수 있을 거야.
최악의 경우에도 말려서 간식으로 만들어 두면 언제든 먹을 수 있겠어.
에? 음... 라미아 언니가 말하는 끼니를 자주 거르는 그 친구가... 누구예요? 마을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밥때가 되면 다들 굶주린 귀신처럼 먹잖아요. 특히 잔치할 때는 조금만 늦어도 찌꺼기도 못 먹는 상황이에요.
응? 그게 누구더라... 그... 누구지?
라미아는 자신도 혼란스러워했다. 그녀는 항상 바쁜 업무 때문에 식사도 제때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어촌에 그런 업무라는 단어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쿵쾅!
거대한 소리가 라미아의 생각을 끊었다. 눈부신 천둥과 함께 검은 구름이 갑자기 몰려오자, 파도조차 잠시 침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바람 속에서 습기가 퍼지기 시작했고, 비릿한 냄새가 해류를 따라 육지로 몰려왔다.
우와. 번개 쳤어요! 라미아 언니. 우리 어서 돌아가요.
이럴 때 해안가에 있으면 바다신에게 잡아먹힌다고 할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어요.
해당은 라미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라미아가 몸을 돌리던 순간, 눈가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해당. 잠깐만!
라미아 언니? 곧 폭풍이 올 거예요. 해산물은 생각 말고 어서 돌아가요. 폭풍 지나간 뒤에 다시 나가면 돼요. 그때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 저기 누가 있는 것 같지 않아?
해당은 라미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그러자, 파도가 오가는 사이로 누군가가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망설일 틈도 없이, 라미아는 해당의 도움을 받아 폭풍우가 오기 전에 그 사람을 업고는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왔다.
비바람이 약속이나 한 듯 몰아쳤고, 자연의 위력에 건물이 흔들리는 작은 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라미아는 물에 빠진 사람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해당은 집 안의 문과 창문이 잘 닫혀 있는지 확인했다.
드디어 끝났네, 힘들어 죽겠어, 돌아오지 못할 뻔했네. 날씨가 참 변덕스러워.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던데요, 최근 몇 년간 바다신이 점점 난폭해지고 있다고요,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어요.
바다신은... 이렇게 큰 파도를 일으키다니... 신은 힘들지도 않은 건가?
이런 건 사제장님께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 맞다, 혹시 라미아 언니도 나중에 사제장님처럼 손만 흔들면 폭풍을 멈출 수 있게 되는 건가요?
라미아는 해당의 순진한 생각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제장이라고 해도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폭풍을 쉽게 잠재울 수 없어. 의식을 치러 바다신을 기쁘게 해줘야 하거든.
사제장님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라미아 언니는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해당의 말에 라미아는 잠시 멍해졌다. 사실 그녀는 잠들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 말과 함께 조각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음... 제발... 하지 마세요... 음... 꾸르륵... 어...
하... 하... 하... 사제장님... 제발 살려주세요... 하지 마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으아...
음... 이렇게 하면... 정말 신의 곁으로 갈 수 있나요? 잘 됐네요...
희미한 외침과 일렁이는 물결의 알 수 없는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조각난 붉은색이 섞여 있었다.
라미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머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장면들은 더욱 흐릿해졌다.
라미아 언니?
음... 신전은 언제나 축제 현장처럼 꾸며져 있었고, 예쁜 꽃과 맛있는 음식들도 준비돼 있었지.
그리고 사제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고, 호위병들은 여러 가지 규칙을 따르면서 행동하게 돼. 아무튼... 의식의 과정은 엄청 복잡해.
(워낙 복잡해서 난 중간에 졸려서 잠들었거든.)
그렇군요. 전 어른들이 말했던 것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제님들도 그런 정도는 아닌가 보네요.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어떤 재앙은 잠재우기는커녕 인간이 피하거나 저항할 수도 없다는 걸 알아둬.
저항할 수 없다니요. 라미아 언니, 무슨 재앙을 말하는 거예요?
무슨 재앙? 그게... 무슨 재앙이었더라?
해당의 반문에 라미아는 굳어버렸고,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혼란에 빠졌다.
오늘 의식을 주관하느라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왜 자꾸 이상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걸까?
오래 고민할 겨를도 없이, 라미아의 귀에 흥분한 해당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라미아 언니! 깨어났어!
쉰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라미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여 눈앞의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라미아는 그 사람의 눈에서 정신을 차린 듯하면서도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괜... 괜찮아? 내 목소리 들려?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라미아는 방금 상황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이 질문은 단순히 물어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 미묘한 위화감은 다른 감각에 의해 가려져 버렸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라미아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지면서 왠지 모르게 친근함과 신뢰가 생겨버렸다.
난 라미아라고 해,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에 이 아이와 함께 해변에서 널 데려왔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기억나는 게 있어?
눈앞의 사람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것을 본 라미아는 급히 손을 뻗어 막았다.
괜찮아. 무리할 필요 없어. 물에 빠졌다가 깨어나면 원래 머리가 혼란스럽거든.
그 사람은 피곤한 얼굴로 코를 문지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라미아는 동정의 눈빛을 보내며, 이마를 닦아주었다.
기억 못해도 괜찮아. 물에 빠졌다가 깨어나면 원래 머리가 혼란스럽거든.
일단 쉬어. 내가 따뜻한 물 한 잔 가져다줄게.
라미아는 자신이 일어나는 순간, 상대방의 표정이 순식간에 평온해지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큰 폭풍우를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순 없잖아.
라미아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앗! 괜찮아? 혹시 물이 뜨거워서 덴 거야? 천천히 마셔. 뜨거운 물은 그렇게 빨리 마시면 안 돼.
응? 방금 무슨 말 했어?
물컵을 든 상대가 말을 멈췄다. 마치 말을 고르는 것만 같았다.
칭찬 맞지? 그런데 지인이랑 좀 달라야 좋은 건가?
라미아는 살짝 빈정대는 말투로 낮게 중얼거렸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나도 널 보면서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어, 장터에서 본 적이 있나?
물론이지. 보여줄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여긴 외딴곳이 아니니까.
근데 오늘은 너무 늦었고, 밖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어. 그리고 넌 지금 막 깨어났잖아. 내일 좀 괜찮아지면 널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소개해 줄게.
상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라미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미아의 약속이 준 안정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도 모르는 확신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
그 상황을 본 라미아는 조용히 담요와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고, 해당을 손짓으로 불렀다.
눕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테이블 위 불꽃을 살며시 불어서 껐다. 그러자 마음속 알 수 없는 떨림도 어둠 속으로 함께 가라앉았다.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