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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얽힘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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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르고, 눈앞의 북에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 있는 악보를 연주해 내기 위해 손목이 반자동으로 움직였다.

현의 진동과 그 진동에 따라 울려 퍼지는 맑은소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때맞춰 귓가에 밝은 멜로디와 함께 낮은 화음이 들려왔다.

긴장감에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는 듯했지만, 몸은 이미 리듬에 적응해 있었다.

악보에 적힌 기호는 의식적으로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멜로디가 이끄는 대로 손목을 매끄럽게 움직일 뿐이었다.

마지막 음을 힘차게 내려치며, 이 연주에 마침표를 찍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간간이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저희의 최신 싱글을 들어주신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특별히 드러머로 참여해 주신 공중 정원의 지휘관 [player name] 님께 감사드립니다.

로봇 관객

앙코르! 앙코르!

안타깝지만, 오늘 공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도 "선더 스파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관객석을 향해 자기 로봇 팔을 흔들며 인사한 밴드 리더 로봇은 지휘관, 밴드 멤버와 함께 무대 뒤로 향했다.

켈리가 없어서 오늘 공연은 망하는 줄 알았는데, 지휘관님께서 도와주셔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바쁜 임무와 복잡한 사건에서 해방된 지휘관에게 지휘 센터는 짧은 휴가를 배정해 줬다.

컨스텔레이션의 재건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자, 세리카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이 도시에서 휴가를 보내며 기분을 전환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루시아와 다른 대원들은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지휘관이 심리적으로 후유증을 않지는 않을까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여러 번 괜찮다고 말했지만, 대원들은 함께 있을 때면 지휘관의 행동에 과하게 신경 쓰곤 했다.

이에 지휘관은 너무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이번 휴가는 따로 행동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면 모두가 사건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에게 동의를 얻어 낸 지휘관이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때, 자기를 "키스크"라고 말한 로봇이 갑자기 나타나 자기 밴드의 임시 드러머가 돼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 멤버인 드러머가 어젯밤 특제 전해액을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기억체에 혼란이 생겼고, 공연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 골목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예술 협회 사람들과 오랫동안 접해왔기 때문에 기본적인 음악 이론과 악기 지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노래의 연주는 너무 어렵진 않았기 때문에, 무대에 간신히 오를 수 있는 수준으로 벼락치기가 가능할 것 같았다.

시간을 내주신 지휘관님께 보답으로 "와히의 가게"에서 특제 오일주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컨스텔레이션이 아이리스 월블러 소대에 발견된 후, 지휘관은 과학 이사회에서 "각성 로봇"이라고 칭하는 로봇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컨스텔레이션의 각성 로봇들의 집단 중에서 남아있는 건 극소수일 뿐인 것 같았다. 그들의 언행은 일반 로봇과 확연히 달랐지만, 인간에 비하면 훨씬 단순했다.

"세르반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각성 로봇의 영향을 받았는지, 컨스텔레이션에 남은 각성 로봇들은 모두 "예술"에 열정적이었다.

오늘날 컨스텔레이션의 각성 로봇과 도시 내 인간들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었다. 이런 관계를 형성하기까지 아이라와 시카 그리고 예술 협회 멤버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또한 이 도시에는 각성 로봇들만 아는 비밀 구역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구역은 각성 로봇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인간들만이 출입할 자격이 있었다.

키스크가 말한 "와히의 가게"와 방금 밴드가 공연한 무대도 그중 하나였다.

지휘관도 그런 비밀스러운 곳이 궁금하긴 했지만, "오일주"가 인간의 위에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키스크의 초대를 완곡히 거절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꼭 오셔서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선더 스파크"외에도 다른 공연들이 많이 준비돼 있습니다. "낙원 축제"는 분명 즐거울 테니 놓치지 마십시오!

거리에서 키스크와 작별 인사를 나누던 중, 지휘관은 키스크의 입에서 낯선 단어를 듣게 됐다.

지휘관은 "낙원 축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귓가에 울려 퍼지는 다른 소리에 주의가 이끌렸다.

카~ 레~ 니~ 나~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봐.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절대 입지 않겠다고!

이 코팅 디자인 다시 한번 봐봐. 보고 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봤으니까 입기 싫다는 거잖아!

지휘관은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둘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카레니나는 초조한 듯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그 뒤를 바싹 따라붙은 아이라의 얼굴에는 답답함이 섞인 웃음이 보였다.

지휘관? 쳇... 너도 와서 도와줘!

지휘관을 본 카레니나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카레니나는 뭔가를 결심한 듯 도망치는 대신 지휘관 뒤에 숨는 걸 선택했다.

카레니나. 그만 도망치라고 했잖아.

오. 지휘관? 안녕.

예술 협회에서 새로 디자인한 코팅을 카레니나에게 입혀보려고 했을 뿐인데, 무엇 때문인지 카레니나가 입기 싫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입어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디자이너에게 피드백을 줘서 수정할 거 아니야.

잠깐...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는 거야?

뭐가 문젠데?

디자인! 디자인이 문제라고! 이 코팅은 내 스타일과 전혀 맞지 않잖아!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코팅을 디자인한 거야?

음? 이상하네. 이 코팅은 네가 직접 신청한 거잖아? 주문서에 받는 사람이 카레니나로 기재돼 있었던데?

아니야! 난 이런 코팅 필요 없어! 분명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야!

카레니나가 입으면 알게 될 거야.

말했잖아. 나한테 맞지 않을 거라고...

지휘관!? 너까지!

그렇지. 맞지? 입어보지 않으면 어울리는지 알 수 없잖아?

음... 시험 삼아 입어보는 거라면... 하지만...

지휘관과 아이라의 이중 공격에 카레니나의 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았어. 예술 협회가 인력과 자원을 들여 만든걸, 입어보지도 않고 내팽개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그럼, 지휘관. 기다려 봐.

아이라가 카레니나를 가까운 건물 안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코팅을 바꾼 카레니나가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아이라한테 밀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짜잔! 지휘관, 어때? 이 코팅 디자인은 예술 협회 내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어.

카레니나가 입으니까 정말 완벽한 것 같아!

놀... 놀리는 거지!?

난... 이런...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

코팅이 힘까지 빼앗아 간 듯, 카레니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 딱딱했던 성격마저 조금 녹아내린 것 같았다.

음... 확실해? 아이라랑 짠 거 아니야?

지... 휘... 관... 평가는 자세히 감상한 후 신중히 내려야 하지 않을까?

커스텀하고 수선한 드레스에 반짝이는 장식을 곁들이니 평소 카레니나와 정말 다른 인상을 줬다.

카레니나는 예전에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어본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기에, 카레니나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맞아! 예술 협회가 코팅을 제작할 때의 지침 중 하나가 바로 자기가 알지 못했던 매력을 사람들에게 발견하게끔 만드는 거야!

하지만 결국 본인이 마음에 들어야 해. 카레니나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난... 음...

아이라에게 코팅을 바꿔 달라고 단호하게 요구할 줄 알았던 카레니나가 무엇 때문인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어. 아이라. 여기 있었네. 음?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과 대장도 함께 있었네?

핑크색 머리의 구조체가 셋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정비 부대의 부대장 테디베어였다.

테, 테디베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지금의 모습을 지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카레니나는 테디베어의 등장에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예술 협회와 인계 업무를 하러 왔어. 별거 아니니 넌 휴가나 즐겨.

어? 이 코팅 벌써 도착한 거야? 완성하려면 적어도 이틀이나 사흘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테! 디! 베! 어! 역시 네가 한 짓이었구나!

카레니나는 화가 난 듯 테디베어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테디베어가 뒤로 물러서며 피했다.

왜? 맘에 안 들어? 그럴 리가 없는데, 평소보다는 세 배는 더 눈에 띌걸? 예상외로 꽤 괜찮은 몸매를 가지고 있잖아.

모두가 요구한 대로 몇 번이고 코팅을 수정한 보람이 있네. 그래도 유감이야. 미리 알았다면 좀 더 별로인 디자인을 네게 주고, 이건 내가 입었을 텐데.

"모두"라고?

어. 평소에 신규 코팅을 가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부대에서 상의한 결과 다 같이 코팅 한 벌을 선물하기로 했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평소에 우리를 꽤 잘 챙겨줬으니까. 답례로 주는 거야.

처음엔 좀 더 캐주얼한 스타일로 만들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대장은 개인적으로 록 음악을 좋아해요"라고 말했고, 이래저래 논의하다가 결국 이렇게 바뀌게 된 거야.

그리고 황금시대의 자료도 많이 참고했어. 그때 젊은 여자애들은 노래 부를 때 이런 스타일로 입었다고 하더라고.

참고 자료에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예술 협회에서 수집한 비디오 자료 수량은 제한적이지만, 그 퀄리티와 신빙성에는 전혀 문제없거든!

이 자료들은 모두 레오니가 수집한 걸로 기억해. 황금시대에 이런 복장을 특별히 뭐라고 불렀는데... "아이돌"이었던가?

어쨌든 실제로 입어보니까 꽤 잘 맞지? 이 옷 입고 "낙원 축제"에서 공연하는 건 어때?

넌 적당히...

아... 지휘관은 몰랐어?

처음엔 각성 로봇들이 자체적으로 시작한 행사였어. 대략 갤러리 전시, 콘서트, 퍼레이드 같은 형식이었어.

각성 로봇들이 컨스텔레이션에서 축제를 연다는 걸 안 예술 협회는 규모를 키워 인간과 구조체도 참여하는 게 어떨지 생각했었어.

그리고 때마침 정비 부대가 컨스텔레이션을 중심으로 정화 구역에 유선 네트워크를 설치하고 있었어. 공사가 끝나면, 이곳의 공연을 신규 보육 구역에 실시간으로 중계할 수 있을 거야. 일종의 신호 테스트라 할 수 있지.

그래서 정비 부대가 편성표에서 피날레 순서를 획득했어.

하지만 무대에 서기로 했던 두 대원이 근무 시간에 몰래 연습하다가 감찰에 걸려 감금 처벌당했어.

한번 봐 볼게... 음. 2인조 밴드 공연이었던 거 같아. 그 두 대원도 명목상 예술 협회의 멤버야. 가끔 살롱에서 공연도 했었어.

나도 알고 있어. 정비 부대 대원들이 그들 공연에 초대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우리 대원들 빼고 관객이 거의 없었어.

그러니까 네가 대신 나서는 게 어때? 평소 먼지투성이였던 정비 부대 대장이 중요한 순간에 무대를 뒤집어 놓으면 분명히 재밌을 거 같은데.

누구 맘대로? 난 싫어.

그리고 누가 평소 먼지투성이라고 그래?

방금 전 "선더 스파크" 밴드와의 임시 합동 공연이 오래된 추억을 자극한 탓인지, 카레니나를 바라본 지휘관은 마음속에 조각난 생각들을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뭐, 뭐라고!?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카레니나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 다른 쪽 거리에서 작은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의 주인공들은 각각 아딜레와 구룡 인원들이었다. 정황상 우연히 만나 도시 중심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선두에 선 인원들이 카레니나 일행을 보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다들 오랜만이야.

아마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여러분이 얼마 전에 구룡에 다녀오셨다면 몇 번 마주친 적은 있겠지만요.

구룡과 아딜레? 귀한 손님인데.

아딜레도 초대를 받았는데, 자밀라가 날 보냈어. 좋은 사업 기회가 있는지도 알아볼 겸 들렀지.

소피아가 자기 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내 테디베어와 아이라에게 건넸다.

단단한 종이로 된 봉투 안에는 얇은 엽서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낙원 축제에 대한 간단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계 공용 장난감 회사"라는 서명이 적혀있었다.

초대장? 로봇들이 만든 건가? 그리고 이 서명... 황금시대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기업이 있었던 거 같은데, 퍼니싱 폭발 이후 사라졌을 거야.

응... 그들이 밴드를 하려는 로봇을 위한 에이전시를 만들었던 거 같은데, 이것도 비슷한 건가 봐.

구룡도 비슷한 편지를 받았어요. 그때 조풍 님께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나네요.

좋은 거 아니야?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축제도 더 재밌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아딜레가 다음 비즈니스 협력 계획을 짤 수 있도록 "낙원 축제"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알고 싶어.

"펑"!

아이라와 테디베어한테서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말하려는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이 지휘관의 말을 끊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컨스텔레이션 중앙에 있는 하늘 높이 솟은 풍차 탑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탑 꼭대기에 거대한 축포를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연이은 축포 소리와 함께 수많은 채색의 리본과 종잇조각들이 풍차의 회전에 맞춰 도시 구석구석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도시 안에 있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종잇조각을 잡았다.

그건 소피아와 함영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낙원 축제"의 초대장이었다.

작고 귀여운 카드의 폰트는 들고 있는 이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읽고 싶게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컨스텔레이션의 낙원 축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좀 지나친 거 같은데...

대단해! 이런 방법으로 도시 전체에 초대장을 보낼 생각을 한다니... 뒷정리가 좀 번거롭겠지만 말이야.

지휘관도 "곧 개막될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 들 때쯤, 손목에서 서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쉿. 묻지 말고 따라와.

카레니나는 지휘관을 붙잡고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미안. 나랑 지휘관이 좀 바빠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테디베어. 정말 출연할 사람이 없다면, 내 이름을 올려도 좋아!

카레니나는 테디베어에게 우물쭈물하며 말을 걸었다. 이를 악물고 말을 마친 카레니나에게 지휘관은 현장에서 반강제로 끌려 나갔다.

휴...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겠지?

반 블록 정도를 달린 카레니나는 어느 어두운 골목 입구에서 멈춰 섰다.

따라오면 알게 될 거야.

카레니나는 지휘관을 잡고 복잡한 골목길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모퉁이를 돌고 난 후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지휘관과 달리 카레니나는 이곳의 구조를 이미 손바닥처럼 꿰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카레니나의 음성 인식으로 잠금이 풀린 문을 통과한 뒤, 지휘관은 카레니나를 따라 지하에 있는 좁은 공간에 도착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방 안의 조명이 반응하며 환하게 켜졌다.

얼핏 보기엔 물자를 저장해 둔 창고 같지만, 인테리어와 구체적으로 보관된 물품들을 보니, 이곳은 개인의 취향으로 개조한 비밀 기지인 것 같았다.

방 정중앙에 여러 개의 전자 스크린이 이어져 있는 것을 경계선으로, 왼쪽 보관대에는 각종 로봇 부품, 렌치, 드라이버, 용접기 같은 도구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반면 다른 쪽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벽에는 각종 악기와 황금시대의 밴드 포스터들이 걸려 있었다.

여긴 내 비밀 기지야. 조금 전에 밴드에 관해 얘기했잖아? 그래서 여기 구경시켜 주려고 데려온 거야.

예전에 여기서 주둔할 때, 우연히 한 무리의 각성 로봇들을 도와준 적이 있어. 그래서 그들이 사례로 이곳의 사용권을 내게 줬어.

그 후로, 지상에서 모은 것이나 개인 숙소로 가져가기 애매한 물건들을 여기에 두게 됐지.

그런데 이렇게 많이 쌓이게 될 줄은 몰랐어. 참. 여기는 너 말고 아무도 모르니까, 비밀로 해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입술을 살짝 깨문 카레니나는 반은 협박, 반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지휘관을 바라봤다.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미소 지은 카레니나가 비밀 기지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이 소장품들은 꽤 귀한 것들이야. 가장 찾고 싶은 건 못 찾았지만, 이것들만으로도 예술 협회 멤버들의 질투를 사기엔 충분할걸.

카레니나는 벽에서 레트로 스타일의 기타 하나를 집어 들고 지휘관 옆에 앉았다. 피크가 기타 줄을 살짝 스쳐 지나가자 맑은 음들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소리 괜찮지? 전에 키스크라는 로봇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알려준 원리를 바탕으로 내가 조금씩 조정한 거야.

지휘관도 알아? 나도 그들 밴드 공연을 본 적이 있어. 이렇게 말하면 우리 대원들한테 미안하지만, 정비 부대 그 두 명보다 훨씬 낫더라고.

예전에 그들이 날 임시 멤버로 초대한 적이 있어. 그 밴드 내 멤버들이 자주 이유 없이 연락이 안 된다고 말이야.

응. 평소에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아니. 거절했어. 정비 부대 대장으로서 그런 거에 신경 쓰다 보면 일상 임무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까.

게다가 난 악기를 잘 다루지도 못해. 이런 골동품을 수집하는 건 내 소소한 취미일 뿐이야.

음...

으흠...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대원들이 어렵게 얻어낸 자리를 낭비할 순 없으니까.

요즘 정비 부대는 정화 구역 건설 때문에 바빠. 이번 휴가도 테디베어와 대원들이 상부에 신청한 거야. 지금 생각해 보니, 일부러 그렇게 배정한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럴지도. 참나. 하나같이 이리저리 돌려 말하고 꾸물거리는걸, 누구한테 배운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카레니나는 대원들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대해 가볍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얼굴엔 알아채기 힘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휘관. 한 번만 더 물어볼게. 정말로 이 코팅이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

카레니나는 지휘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확신에 차지 않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

흥. 그러면 다행이고.

고개를 숙인 카레니나가 새로우면서도 낯선 자기 모습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드문 기회니까, 평소엔 하지 않던 일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네.

좋았어. 결정했어. 참가할게. 망신당하면 다음에는 정비 부대의 모든 대원에게 참가하라고 할 거야.

지휘관도 와서 도와줘야 해.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왜 지휘관을 여기 데려왔겠어?

지휘관이 잘 어울린다고 말했잖아? 말만 그렇게 한 거 아니지?

편곡, 작사 그리고 필요하다면 안무 제작까지 지금부터 준비해도 빠듯해.

괜찮아! 나도 아마추어니까,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하지만 재미로 하는 공연이라 해도 그냥 가볍게 넘길 순 없지. 참가하기로 한 이상, 절대로 대충 할 수 없다고.

마지막에 시상 부분이 있다면, 1등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해!

결정을 내린 카레니나는 온몸에 의욕이 넘쳤다. 어떻게 보면 카레니나의 이런 성격은 무엇을 하든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낙원 축제 개막까지 일주일 남았고, 공연은 낙원 축제의 마지막 날에 열릴 거야.

시간이 많지도 적지도 않아. 일단, 최선을 다해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