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기념일 이벤트 스토리 / 백일몽 속의 순회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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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의 그림자

비앙카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대로 옆에 바짝 붙은 상태로, 비앙카가 크고 자란 예배당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정찰해 봤지만, 예배당 내에는 침식도가 낮고 아무런 활동 신호도 잡히지 않아요. 다만...

고개를 숙인 비앙카는 강렬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근원 추적 장치를 들었다.

근원 추적 장치에 비치던 흐릿한 허상이 점차 또렷해지더니, 레이난과 세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후에 일행은 함께 복도 뒤에 있는 대문에 손을 올렸다.

아델린 언니... 그리고 또 다른 전 가요?

예언자님. 이곳이 신계의 아이가 신의 기적을 내린 곳이에요. 절 따라오세요.

제단으로 돌아가면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러면 앞으로 걱정할 필요 없겠어요.

허, 제단... 종교의 수법은 참 훌륭하네. 몇 구의 조각상과 이야기만 있으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쉽게 속으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희생양이 되는 거지. 실험의 재료가 되는 건 그나마 재활용 가치를 다했다는 거야.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들이 말한 신의 기적이 도대체 뭔지 한번 보러 가자고.

무거운 문을 밀자, 예상과 다른 예배당이 방문객의 눈에 들어왔다.

이게... 제단?

기도할 때 사용했던 긴 의자엔 화분들이 가득했다. 먼지 낀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푸른 잎사귀에 드리워 색다른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작은 성상이 놓여 있던 곳은 선반으로 대체됐고, 바닥에는 흙이 가득한 대야와 나무 상자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그중에는 꽃, 채소와 곡식이 자라고 있었으며, 종류도 다양해서 대여섯 명이 생활하기엔 충분했다.

비앙카에게 유일하게 익숙한 느낌을 안겨준 물건이라곤 본당의 무너진 성상과 예배당 안의 낡은 난방 시스템뿐이었다.

맞아요. 이곳은 신의 축복이 내려진 곳이에요. 그래서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죠. 이곳엔 아무런 위험도 없으니 안심하세요.

…………

성녀님은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한 모양이네요.

고개를 들어 비앙카를 봤다. 그녀는 허상을 조사하면서 주변에 잠복한 침식체가 있지는 않은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지휘관을 곁눈질했다.

1초라도 눈을 뗐다간 그 악몽이 현실로 변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지, 지휘관님?!

비앙카는 몇 초간 생각하더니 무기를 거두고 지휘관의 손을 잡았지만, 경계를 완전히 늦추진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계속 조사해요.

지팡이검으로 근원 추적 장치를 가볍게 두드리자, 허상이 빛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제단이야? 그냥 온실이잖아! 적조를 가리키면서 제단이라고 했으면 네 연기만큼은 내가 인정해 줄게.

왜...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어떻게 설원에서 식물이 자랄 수 있죠?

너희들의 신은 난방 시스템이었던 거야?

그럴 리가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난방 시스템과 동력 난로는 작동하지 않았고, 에너지도 없었어요.

다행히 그때 신의 계시를 받은 신계의 아이가 저희를 이끌고, 에너지가 많은 곳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그래서 난로 시스템을 복원시킨 뒤, 이런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었죠.

인도? 애초에 신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 모든 건 너희들이 직접 했다는 걸 생각해 본 적 없어?

신을 모독하지 마세요.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저희처럼 힘없는 인간이 이렇게나 많은 식물을 어떻게 키울 수 있었겠어요.

하? 뭔지 알겠어. 너희들은 자신을 믿어 본 적이 없구나. 그럼 신계의 아이를 찾지 그래? 신계의 아이라고 불리는 그레이스는 아직 살아 있잖아?

신계의 아이 한 명이 이끌 수 있는 신자는 한정돼 있어요. 그레이스 님께서 신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으신 건 맞지만, 더 많은 신자를 돌보는 건 무리입니다.

그레이스가 망각자 진영에 의탁한 후로 신도들이 넘쳐났다는 말이군.

공중 정원에서 너희들을 다른 난민 거점에 배정해 준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그곳에 남아 있지 않고, 힘들게 제단으로 돌아온 거야?

그 거점엔 제 자리가 없어요…

달이와 전 거점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어요.

네. 신의 계시를 받기 전엔 저도 폭도 중 한 명이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죠. 물론 그들도 마찬가지였고요.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거점은 보육 구역과 달리 항상 혼란스러웠어요. 그곳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했죠.

어른도 제 한 몸 지키기 힘든 환경에서 부모한테 버림받은 달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죠.

그때, 신계의 아이가 저희를 구해주셨어요.

맞아요. 적음신계에 들어간 후, 신계의 아이와 적조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셨죠. 그 뒤, 저희는 두려워하지 않게 됐고, 그로 인해서 더 이상 싸우지도 않게 됐죠.

저희가 설원의 현세와 적조 속 전생 중 어느 것을 선택하든 신의 계시로 저희를 이끌어 주시겠다고, 그분께서 항상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흰 설원을 선택했어요.

보세요. 이 제단이 바로 신의 계시가 존재했다는 증거예요.

신계의 아이가 난로 시스템을 고치는 법과 채소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 줘서 이곳에 남았단 말이군.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지?

그들은 적조 속 전생으로 갔어요.

그래서 너희만 남게 됐다는 거네... 그럼, 신계의 아이는? 그도 죽었어?

아, 그러니까 너희들 말로 표현하면 "적조 속 전생"으로 갔어?

아니요. 신계의 아이는 적조 속 전생으로 가지 않았어요. 저희를 보호하기 위해 중상을 입으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적조로 가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그럼 어디로 갔어?

잠시 침묵한 가이는 예배당 깊숙한 곳에 있는 난방 시스템 화로를 가리켰다.

신계의 아이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으니 적조에서 그 고통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며, 안으로 뛰어들었어요.

…………

저흰 그분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계속 이곳을 지키며 다른 신계의 아이의 소식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신의 시련을 통과하면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을 따라 이곳을 떠나기 전에, 저희는 거점에 있던 친구에게 제단을 맡겼어요. 저희가 없는 동안 제단의 채소를 수확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요.

그리고 저희를 데려간 사람은 많은 시도 끝에 저희가 시련에 통과하지 못했다고 말했죠.

하. 그래서 쓸모가 없어진 너희들이 나한테 온 거군.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예언자님이라 할지라도 저희처럼 시련에 통과하지 못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시련에 통과하지 못했다고요?

네. 저희를 보내 준 사람이 "예언자는 신의 계시를 예언할 수 있지만, 너희들처럼 시련에 통과하지 못한 자다"라고 말했어요.

예언자님은 이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분에게 진실을 말해주자, 저희와 말다툼하셨죠.

날 너희들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

가이 할아버지와 예언자님은 한참 동안 말다툼을 벌이셨는데, 예언자님을 겨우 설득할 수 있나 싶었던 순간, 갑자기 울기 시작하더라고요.

비앙카는 고개를 숙여 레이난의 명패를 어루만졌다.

단지 그를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 지경이 된 걸까...

저희도 같은 마음인걸요. 저희도 신계의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었을 뿐이에요.

…………

레이난은 자신이 경멸하게 여겼던 신자들을 보며, 문득 그들의 목적과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고, 울음소리가 섞일 때까지 웃었다.

그러게... 우린 다를 게 없어. 똑같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다른 이의 힘에 의지하려고 했지.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있었으니…

난 그냥 사소한 잘못인 줄 알았는데, 이러한 잘못과 인식의 편차가 어느새 날 매장할 수 있을 정도로 쌓여버렸어.

레이난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신상에 물었다.

비앙카 대장. 대장은 이 신자들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그럼, 날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을까?

이어서 레이난은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 난 이미 그 선을 넘어버려서 대장이 용서해 주지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비웃어...

아직 기회가 있어요. 예언자님. 우리가 힘을 합치면, 신의 계시를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레이난이 고개를 돌려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품 안에 있던 단말기가 갑자기 진동했다.

???

상황이 바뀌었다. 비앙카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가 보낸 인원들도 모조리 당했어. 네가 잃어버린 단말기가 그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됐거든.

뭐?

???

네가 저지른 실수는 네가 책임져.

난 계획대로 비앙카를 그 예배당으로 유인할 거다. 난민 신자들에게 비앙카를 찾아가라고 해. 그들 몸에 있는 전자 펄스 고리의 카운트다운은 원격으로 가동해 놨어.

신자들의 목숨으로 비앙카를 죽이려는 거야??

???

쓸모없는 물건을 아낄 필요가 있나? 우린 그저 재활용하는 것뿐이야. 이 임무가 완료되면 승격자를 만나게 해줄게.

지난번, 지지난번 그리고 그전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날 속이고 있는 거지? 그들을 속이는 것처럼 나도 속이고 있는 거잖아.

???

진정 좀 하지? 난 중간에서 연락하는 역할이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나한테 화낸다 한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하... 네 말이 맞아. 너희도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나도 그렇고 그들도 그렇고, 우린 다 똑같아. 결국엔 버림받겠지.

???

쳇, 난 너처럼 쓸모없지 않아.

그래, 오늘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통신을 끊은 예언자님이 단말기를 버린 뒤, 절 불러서 제 몸에 있는 "시련의 고리"를 해제하겠다고 했어요.

그제야 전 "시련의 고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죠. 하지만 예언자님이 그 고리를 떼어내는 순간 머리 위에서 "펑" 소리가 났어요…

예언자님은 무척 괴로워했어요. 온몸에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저희에게 당부했죠.

레이난

시간이 없어. 어서 도망가... 그리고 그 설원처럼 하얀 성녀를 찾아봐. 지금 오고 있을 텐데…

나 같은 가짜 예언자와 달리, 그녀는 너희들을 반드시 구해줄 거야.

레이난

어서 도망쳐! 내가 완전히 침식체로 되기 전에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빨리!

그리고 당신을 만나게 된 거예요... 가이가 그나마 건강한 편이고 제일 빨리 달렸지만...

아델린 언니... 가이 할아버지 돌아올 수 있겠죠?

아델린은 달이를 안고 고개를 저었다.

성녀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난민 거점에 가기 싫다면 당신들을 받을 수 있는 건 망각자 진영에 가입한 그레이스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분은 더 이상의 신도를 받을 수 없어요.

이 일에 대한 결정은 의회에 맡기도록 하죠.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때까지 여러분들은 증인으로서 저희와 함께 공중 정원의 직속 보육 구역까지 가는 게 어떠세요?

거기 가면 안전해지는 건가요?

고마워요. 지휘관님. 제가 최대한 빨리 조사를 끝마치고 정화 부대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요.

네.

비앙카는 감사의 미소를 지었고, 이내 고개를 숙여 손에 있던 명패를 꽉 쥐더니 무거운 마음으로 무너진 성상을 향해 걸어갔다.

성녀님이 슬퍼하시는 건가요?

비앙카는 넋이 나간 듯 주변의 식물을 바라봤다.

정찰은 끝났고 여긴 안전해요. 눈으로 뒤덮인 그 예배당과 달라요... 지휘관님께서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

정화 부대가 죄인을 처리하는 방식을 의심한 적은 없습니다만... 항상 그러한 죄행이 발생하기 전에 "처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우린 모든 사람에게 "합리적인 도움"을 주기는 어렵잖아요.

지휘관님께선 매우 이성적이군요. 지휘관으로서 훌륭한 소질이고, 대다수 사람에게 없는 소질이기도 하죠.

타인에게 감정을 버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건 비현실적이고 잔혹한 일이에요. 형벌로만 협박한다면 궁지에 몰린 이들은 위험한 길을 선택하게 되죠.

제가 찾고자 하는 건 죄인을 어떻게 처벌하는 것이 아닌,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레이난은 이미 대가를 치렀어요.

그 말을 들은 비앙카는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지휘관님의 말씀이 맞아요. 저도 때론 감정에 눈이 멀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어요. 지휘관님이 계셨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죠.

제가 말했던 그 꿈을 기억하시나요?

비앙카는 바닥에 있는 꽃을 밟지 않도록 조심히 하면서 성상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비앙카

그 꿈의 끝이... 바로 이곳이었어요.

지휘관님께선 홀로 이 예배당으로 오셨고, 이곳에서 방황하는 저를 발견했는데... 흰 눈에 묻혀서 잠시 활동을 멈춘 침식체를 미처 눈치채지 못하셨어요.

꿈속의 모든 것이 희미했지만, 지휘관님의 표정만은... 잊을 수가 없었어요.

기억 속의 미래로 이어지는 광경이 지금, 이 순간과 겹치면서 멈춰있던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앙카

그렇게 전 지휘관님을 해쳤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대원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땐...

비앙카는 눈을 감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비앙카

이곳에서 수녀가 됐을 때, 신부님께서는 "마음의 나약함을 이해하거라, 악마와 신은 모두 그것 때문에 불멸한단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잘잘못이나 법률이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떠나서 인간은 감정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랑과 증오, 피해와 보호가 생기는 거죠.

언젠가 예배당이 눈으로 뒤덮일 때, 전 다시 배신당하고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지도 몰라요.

지휘관은 손을 들어 핑크색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지휘관님.

미래를... 바꾼다라...

…………

맞아요. 예배당도 변하고 있어요.

비앙카는 가볍게 한숨 쉬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지휘관님. 이 장미를 제 머리 장식에 달아주시겠어요? 오늘의 일과 지휘관님이 해주셨던 말씀... 그리고 설원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요.

비앙카

고마워요... 어때요? 예쁜가요?

비앙카

이 코팅의 주제는 "설원"으로 향하는 꿈이 아닌, 예술 협회 멤버분들이 말씀했던 것처럼 웨딩드레스 느낌이 더 나네요.

설원에서도 이렇게 많은 식물을 재배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그리고 "설원"을 주제로 디자인한 코팅에 꽃을 장식할 수 있기를 바란 적도 없었죠.

지휘관님께서 저한테 오기 전까지, 전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는데… "꿈"의 결말이 지휘관님으로 인해 바뀌었어요.

비앙카는 미소를 지으며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식물들을 바라봤다.

비앙카

맞아요. "환상에 가까운 신념"이 있어야 자신을 믿을 수 있었다 해도 그들은 결국 해냈으니까요.

비앙카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비앙카

가장 단단한 연결고리는 쇠사슬이나 잔혹한 처벌이 아니라 "안전하고 따뜻한 집"이에요. 승격자들도 이걸 잘 알기 때문에 가식적인 손을 내밀어 배신을 유도한 거겠죠.

그들 마음의 나약함을 탓해서는 안 돼요. 지휘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배신과 이별에 익숙해야 하는 자는 없어요.

객관적으로 이별과 고통이 어느 정도가 됐든, 모두 상처를 남기니까요.

충분히 안전한 집만이 사람을 붙잡을 수 있어요. 우린 타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서로 격려하며 고통이 남긴 상처를 치유해 나가야 해요.

그래서 전 바꾸고 싶어요.

비앙카

네. 그 밖에도 바꾸고 싶은 부분이 많아요. 일단은 자세한 계획을 작성하고 의회에 제출해서 심사 받을 생각이에요.

방금 전, 근원 추적 장치가 보여준 기억 속에서 다른 배신자의 목소리를 포착했고, "크틸라"가 승격자한테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게 됐어요.

겨울 계획과 승격자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예상했었어요.

그들의 약점을 잡았을 때마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철저한 조사를 피했죠. 때론 희생양을 만들어냈고, 때론 "공으로 죄를 면하는 성과"로 대응했어요.

비앙카

네. 전 교활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어요.

그런 부분에선 지휘관님도 마찬가지예요.

비앙카

모두가 영웅 소대라고 말하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특권을 많이 누리고 있어요. 때론 다소 규칙을 어기는 행위를 해도 당장 처벌을 받지는 않았죠.

그 때문에 지휘관님께선 승격자와의 접촉이 많으셨어요. 가급적 그들의 사건엔 연루되지 말아 주세요.

비앙카

물론 지휘관님을 믿어요. 다만 지휘관님께 화살을 겨누는 그날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비앙카

……?

어떤 부분이 그렇다는 거죠? 취조실에 가서 자세히 얘기해 보실래요?

비앙카

정말로 농담인가요?

비앙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앙카

지휘관님. 이런 걸로 절 놀리지 마세요.

비앙카

네. 지휘관님을 믿을게요.

제가 계속 잔소리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정화 부대의 대장이라는 직위에 있으면, 언젠가...

비앙카

네. 그래서 지금을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

비앙카는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 손에 쥔 단말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루시아가 예배당 근처까지 왔다는 연락이었다.

네.

비앙카는 지휘관의 손을 살짝 잡고 성상 앞에서 일어섰다.

예배당을 떠나기 전 비앙카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멈춘 시계를 바라보며, 과거 그 시계 아래 서 있던 신부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백합꽃이 어디서 피고 싶다고 대답할 리가 없잖아요. 절 위로한답시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때 눈물이 떨어진 곳은 폐허가 됐고, 그곳에서 눈처럼 하얀 꽃이 피어났다.

신에게 기도하던 소녀는 어엿한 성인이 됐다. 그녀는 종말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든 이처럼 무기를 손에 쥐고, 모든 걸 묵인한 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걷고 있었다.

그녀(우리)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그녀(우리)는 계속 기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