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 삐삐——!
아아아아아...사람 살려!
침식체의 포효와 소녀의 비명이 하나로 섞였다. 어둡고 좁은 통로에 침식체가 나타난다면, 그 침식체는 사냥꾼이 판 함정에 떨어진 사냥감처럼 독 안에 든 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이상한 비명은 너무 어색했고 마치...국어책을 읽는 것만 같았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괴물을 만났을 때는 이렇게 외치겠지...? 글자만 읽어서는 잘 모르겠는걸...
소녀는 손에 든 중형 스크린에 뜬 전자 파일을 끈 후에 작은 몸과 어울리지 않은 거대한 전기톱을 어디선가 꺼냈다.
삐-!
이성도 두려움도 없는 침식체이기에 눈앞의 소녀를 둘러싼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침식체는 변함없이 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돌격했다.
여——봐——라
소녀는 의미불명의 구호를 외치며 돌격해오는 침식체를 거대한 전기톱의 측면으로 날려버렸다. 그러자 불쌍한 침식체는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침식체에 뚫린 천장을 통해 오랜만에 햇볕이 내리쬐자 그제야 그 작은 소녀가 나나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뭐지? 침식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데...
나나미는 침식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품 속에서 적색 봉투로 보이는 무언가를 하나 주웠다.
한참 살펴봤지만 이 봉투에서 특별한 점은 발견하지 못하자 대충 옷에 달린 주머니에 쑤셔 넣다.
재미없네...여기저기 뒤졌는데도 나나미와 대화할 사람조차 찾지 못하다니.
역시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공중 정원의 지휘관을 찾아가야겠어...
바로 그 순간 이상한 자세로 전기톱에 기대며 지하 통로 곳곳을 흘겨보고 있는 나나미는 깜빡거리는 빛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알아차렸다.
어? 저게 뭐지? 침식체...? 뭔가 좀 이상한데...
호기심에 이끌린 나나미는 발소리를 죽이며 어두운 곳을 향해 다가갔다.
냐아...냐아...
고양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나미는 고양이 소리를 내며 정체불명의 "생물"의 경계를 낮추고자 했다.
나나미가 다가오자 어둠 속에서 빛나는 점들은 소리를 죽이면서 나나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 너희들은...
구멍을 통해 내리쬐는 햇볕 덕분에 나나미는 눈앞의 빛나는 점이 모두 같은 발굴형 로봇에서 나온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 로봇은 눈에 띄는 적색 코팅을 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보기 드문 색상이었다.
꽤 귀엽잖아?
지하 통로 곳곳에서 빛이 비쳐오자 로봇들은 나나미를 단단히 포위했다. 그 수는 나나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
어? 뭐야...공격하려고? 나나미는 하나도 안 무섭다고!
하지만 로봇은 공격하지 않고 나나미를 둘러싼 채 계속 포위망을 좁혀갈 뿐이었다.
음...나나미가 그 침식체를 해치워줘서 고마운 거지? 이 로봇들은 단순히 로직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닌가 보네...
로봇들이 나나미의 몸에 올라탔는데 왠지 갑자기 흥분한 것 같았다.
자신의 몸을 살펴본 나나미는 이 로봇들이 방금 침식체의 몸에서 찾아낸 적색 봉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하네. 이런 적색 봉투가 마음에 드는 거야?
나나미는 이 로봇들이 각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어도 기본적인 단체 지능이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로봇들을 어루만지며 그것들의 의지를 느꼈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너무 약해...몸이든 의식이든 모두 원시 수준밖에 안 되는걸.
너희들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다면 방금 같은 침식체가 곧 싹 틔울 너희들을 망가뜨려 버리겠지...
——길을 이끄는 건 누구일까?
——올바른 길은 하나뿐일까?
——0에서 1이 태어난 비밀은...
나나미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면서 로봇의 의식만이 끊임없이 흘러나갔다.
나나미의 의식 파동을 느낀 로봇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지하고 마치 눈사태처럼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아! 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린 나나미는 모든 로봇이 순식간에 도망친 것을 보고 아쉽다는 듯 외쳤다.
어딜 가는 거야!!!!!! 야!!
나나미는 지하 통로를 구석구석 뒤졌지만 그 로봇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의 숨는 능력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 같았다.
짜증 나! 하지만 나나미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고!
반드시 찾아 내겠어. 그...그러니까...
나나미는 문뜩 그 로봇들에게는 이름조차 없다는 걸 떠올리며 곧바로 자신이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골랐다.
그래, "이브닝"이라고 불러야겠다! 반드시 "이브닝"을 잡아 함께 놀 거야...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끌어낼 방법을 찾아야겠어...
나나미는 한쪽에 버려진 적색 봉투를 바라보며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