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되어 가는 폐허에 비해, 그 속에 숨어 있는 민가들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층 건물 사이를 숨어 다니며, 그 작은 틈으로 바이러스로부터의 잠식을 피했다.
이곳은 스쳐 지나가는 것은 화염이나 칼이 아닌 시간뿐이었다.
장치의 스캔 결과, 근처에서 이상 활동 반응 5개를 확인했어요.
그 반응은 우리에요. 방금 다시 확인했는데, 아군 식별 기능 모듈이 완전히 손상된 것 같아요.
분명히 근처에는 침식체 무리가 지나간 흔적이 없어요. 하지만 어떻게...
어휴, 보육 구역이 어떻게 그 많은 침식체들의 표적이 됐는지 누가 알겠어요? 마지막 지하 방어선을 제외한 나머지 구역은 다 뜯기고 이 정도만 남았어요.
우리를 지원으로 파견한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지휘관님, 건물 꼭대기 층에 정찰 장치를 배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근처에 적이 없더라도, 저희와 너무 멀어지지 마세요.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지원하러 온 정비 부대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분간은 도와줄 부분이 없어서, 주변을 살필 수 있는 높은 곳을 찾기로 했다.
도로를 따라 아직 남아있는 건물 사이로 가던 중에 어느 한 집이 내 눈에 띄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이곳은 외각에서 볼 때 가장 잘 보존된 건물이었다.
내부 로비로 들어가니, 내가 예상했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수선하지 않게, 소란 없이 시간을 따라,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평화롭게 종착점에 들어선 듯, 뒤따라오는 먼지와 함께 이 세상에서 잊힌 것 같았다.
옛날의 풍부한 색채가 이제 벗겨지려고 하는 벽면에 붙어있었다.
옆방 문 손잡이에 쌓인 먼지 한 부분이 없어졌다.
문 손잡이가 돌려진 흔적을 보니 침식체는 아닌 것 같았다.
검지는 권총의 방아쇠에 걸쳐 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후... 후... 후...
……
싱그러운 식물의 향기가 났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보니 하늘이 보였다.
여기서 바라보니, 나무가 빛 속에서 유유히 흔들리고 있었다.
부서진 벽면, 기어오른 초목, 흩어진 종이, 낡은 노트.
밝은 햇살이 집안으로 쏟아져 반짝이는 머리카락에 스며들었다.
산들바람이 머리카락 끝자락을 춤추게 했고, 흩날리는 꽃잎과 닿았다.
은백색의 그림자가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대한 세계의 일부에 불과한 듯, 고요함 속에 아직 그리운 과거가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카롭고 거친 이 모순의 상황이 그녀의 존재로 인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상대방을 보니, 그녀가 영원히 잠들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확인을 위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고요한 가운데 숨결이 캔버스를 휘저은 듯 잔잔한 물결이 번져 나왔다.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어깨였다. 매끈한 얼굴도 기척에 의해 조금 일그러졌다.
옅은 금빛 눈동자가 살며시 시야에 들어왔다.
티끌 없는 호수 같은 눈을 바라보던 찰나.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팔이 단단하게 고정됐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손이 내 목에 닿았다.
작동을 멈춘 것이 아니라, 상대방은 휴면 때문에 이상 활동에 대한 스캔을 피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경험과 사뭇 달랐다. 휴식 시 이렇게까지 경계를 해제하는 구조체는 없었을뿐더러, 시스템을 종료시킨 듯 주위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상대방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밥 먼든이 살아있다고 해도 총을 쏨과 동시에 상대를 제압한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
정교한 얼굴은 설정해 놓은 전시품처럼 아무런 동요도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거리에서는 아무리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전투태세에 돌입한 구조체의 시각 시스템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를 바로 죽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힘겹게 완장을 가리키면서 자신은 공중 정원에서 왔으며, 부품을 뜯어내려는 스캐빈저가 아니라고 표현했다.
……
소녀는 손을 떼고 앞으로 기울어진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간의 모든 것이 햇살 속에 녹아 버린 듯했다. 남은 건 한 번도 적대적이지 않았던 소녀가 낯선 사람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뿐이었다.
옷차림으로 봤을 때, 근처 보육 구역에 소속된 구조체인 듯했다.
당신이 보기엔 제가 인간처럼 "수면"을 하고 있었나요?
소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종이 한 장을 주웠다.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더 있는데...
자세한 단계별 설명이 부족해서...
소녀는 어떤 실험에 대한 경험을 결론짓는 듯 중얼거렸다.
인간의 "수면"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소녀는 열심히 종이에 정리하고는 책상 위에서 잠시 멈췄다.
사람이 구조체로 개조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특별한 부적응 현상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전에 생명의 별 스태프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부적응 현상은 신체나 하드웨어에 의한 것이 아닌 개조된 구조체가 육체를 잃고,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뒤집혔을 때, 인지적 균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었다.
개조된 구조체는 심리적으로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어, 자신의 일부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집증이 나오기도 했다. 과거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도 적응하지 못한 하나의 구현일 뿐이었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눈앞의 사람도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일기"라고 불리는 활동 데이터에요.
하지만 정보가 필터링 됐었는지 기록이 불완전합니다. 디테일이 불충분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었죠. 그냥 하나의 개요로만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재현 작업이 매우 어려워요. 추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아요.
일기장이 장부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자세할 수 있겠어.
근데 구조체가 되기 전의 행동을 체험하려고 한다면, 기록을 모방하는 것보다 훨씬 직관적인 형식이 눈앞에 있지 않나?
일기요?
구조체의 전자 부품에 저장된 데이터와 달리, 인간의 기억은 제어되지 않고 점차 퇴색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기록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천적 결함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다시요? 네.
계산해보니 이 제안의 성공률이 더 높은 것 같아요.
일기에 적힌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기보다는 간직할 만한 추억을 골라 직접 기록해 보는 것이 더 좋다.
그 과정에서 결론을 내리고, 생각하게 된다. 일기의 의미는 기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녀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아마도 일기를 쓰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보육 구역 구조체가 혼자 밖에서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꼭...
지휘관님, 지금 어디 계세요?
통신기에서 루시아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멈추게 했다.
황급히 방을 나갔다.
배치 작업이 종료되었고, 새로 편성된 척후 소대가 침식되지 않은 로봇으로 의심되는 이상한 존재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지상 임시 지휘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요. 조사하러 가야 해요.
합류 지점을 확인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은백색 모습의 구조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노트와 종이도 같이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자, 방안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예전의 만남이 환상이라는 듯, 이 집이 과거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녀가 보육 구역을 책임지는 구조체인 만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