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나·희성 그중 여섯
그럼, 또 만나요. 지휘자님.
오늘 하루의 일정이 끝나고, 어느새 해어져야 할 깊은 밤이 되었다.
가로등 불빛이 어른거리는 가로수길 사이로 저녁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인공 천막 아래 뭇별이 수 놓인 밤하늘, 세레나의 치맛자락이 바람을 타고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그 모습은 갓 피어난 꽃봉오리 같기도, 잔잔한 호수의 물결 같기도 했다.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은 이 밤, 이별을 고하기엔 아쉬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세레나는 어릴 적부터 읽어온 연극 대본을 떠올렸다.
줄리엣은 아무리 로미오를 사랑해도, 숙녀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이별의 순간에도 품위 있는 인사로 작별을 고하고, 조용히 새벽을 기다렸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세레나는 불현듯 든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심장은 귓가에 들릴 듯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붉어진 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세레나는 조심스레 몸을 돌리고,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잠시만요.
다시 고개를 든 세레나는 깜짝 놀랐다.
상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작별 인사를 나눈 뒤에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대로 남아 있던 지휘관의 모습에, 세레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제 목소리를 따라와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어요.
세레나는 두근거림을 애써 감추려 했지만, 바짝 마른 입술에서는 뜬금없는 말들만 튀어나왔다.
지휘자님이 아니었다면, 전 기억을 잃은 채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했을 거예요.
세레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눈앞의 사람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휘자님… 조금만 더, 여기 함께 있어 주실 수 있나요?
요동치는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세레나는 방금전까지 마음을 옭아매던 망설임을 떨쳐내고, 앞에 선 상대의 소매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조금 전 지휘자님이 제게 다가오셨던 것처럼... 저도 지휘자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요.
약속해 주세요.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오늘처럼 제 곁에 있어 주겠다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어요. 이제부터라도 둘이 함께하는 일분일초를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요.
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세레나는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 평온해진 것을 느꼈다.
세레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계속 달고 다녔던 아이리스를 떼어냈다.
이 아이리스를 받아 주세요.
가로등 불빛 아래서 아이리스 꽃봉오리가 별빛처럼 은은하게 반짝였다.
큰 보답은 아니지만...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런 방식으로… 계속 지휘자님 곁에 머무르고 싶어요.
!
세레나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그 따뜻한 손길을 받아들이며 손길에 답했다.
그 손길은 세레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지나, 그녀의 얼굴에 따스한 온기를 전했다.
지휘자님을 믿어요.
세레나는 그 따스한 손을 잡고, 뺨을 가져다 댔다.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그 말을 영원히 제 마음속에 간직할게요.
그 약속만 있다면, 저는 더 이상 지휘자님이 없는 깊은 어둠에 빠지지 않겠죠.
기체 및 의식의 바다 안정성 테스트가 반복적으로 완료된 후, 세레나는 마침내 집행 부대와 함께 간단한 지상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두 발로 흙을 느껴본 세레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세레나는 이 푸른 행성을 다시 밟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상의 어느 한 폐허
PM 23:22
지상의 어느 한 폐허 PM 23:22
적조가 스며든 덩굴풀이 잔해를 타고 무성히 자라올랐다. 이곳은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철새조차 찾아들지 않는 곳이었다.
"바스락"
누렇게 시든 야초가 묵직한 금속 부츠에 밟히며 스러졌다. 부츠의 주인은 걸음을 멈추고, 오래된 폐극장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네.
붉은 머리 여성은 뭔가를 느끼려는 듯, 불어오는 바람에 손을 뻗었다.
그럼...
여기서 끝을 내야지.
붉은 머리의 여자는 지휘봉을 휘두르며, 바람의 흐름을 바꿔 시간의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지상 보육 구역
PM 23:30
지상 보육 구역 PM 23:30
세레나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보육 구역의 텐트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세레나는 만년필에 로열 블루 잉크를 찍어 편지를 써 내려갔다.
"사랑하는 [player name] 님에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은색 펜촉 멈췄다. 세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시간이...
어딘가에서, "시간"과 "정보"가 뒤섞인 듯한 불협화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공중 정원 그레이 레이븐 휴게실
PM 03:00
공중 정원 그레이 레이븐 휴게실 PM 03:00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은 마지막 업무를 마친 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책상 한쪽의 아이리스 꽃이 순간 투명해지더니 작은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온 세상이, 이 어둠 속에서 잉태되어 다시 태어나려 한다.
PM 8:30
악보 너비: 0
<새 지구서> 서명 완료로부터 ▁▅▃▃▅일 경과
PM 8:30
악보 너비: 1
<새 지구서> 서명 완료로부터 ▁▅▃▃▅일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