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비워내야 피리처럼 묘한 음색을 낼 수 있고, 자신을 비워내야 갈대 붓처럼 기적을 써낼 수 있다."
……[player name]……
저…… 여기 있어요.
전 지금 그대가 보고싶어요.
……
처음은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것처럼 거대하면서 흐릿한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황금색의 손가락이 먼 곳을 가리키자 그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빛과 그림자는 형태를 바꾸며 조금씩 익숙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수십 개의 무대 조명은 공연이 끝나면서 서서히 꺼져갔다.
주위의 모든 것이 모습을 들어냈고 웅장한 돔 안에 벨벳 천으로 덮인 좌석은 모두 만석이었다. 나 또한 수많은 관객 중 한 명이었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무대 위 유일하게 남은 불빛 아래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 서 있었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열렬한 박수갈채가 계속됐다.
젊은 오페라 가수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재빠르게 관중석을 훑어보다가 시선을 앞 좌석의 어딘가에 고정시켰다. 그녀는 공연 내내 그곳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단정한 복장을 한 관객 중, 제격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관객석에서 일어나 무대 중앙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친절한 그의 시선이 흩날리는 황금색 반짝이와 눈부신 무대 조명을 넘어 그녀와 마주쳤다.
그는 잠시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위로의 신호를 전했다. 오페라 시작 후, 그녀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공포와 떨림은 점점 사라졌다.
마음속 불안과 떨림을 잠시 억누른 세레나는 숨을 들이쉬고 시선을 아래로 한 체 인사를 했다.
조명이 어두워졌고 관중석의 관객들도 모습을 감췄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백스테이지로 황급히 달려갔다.
예술 협회 멤버들과 기자들이 각종 생체공학 부케를 들고 몰려들자 관중석에서 무대 뒤까지 박수가 퍼졌고, 공연 성공에 대한 칭찬과 축하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밝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보라색 아이리스 빛깔이 깃든 두 눈은 꽃잎과 사람들 사이를 넘어 백스테이지의 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문 뒤로 그녀가 기다렸던 누군가 있는 듯했다.
마침내 축하 인파가 흩어지자,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하지만 텅 빈 홀은 고요했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실망이 밤안개처럼 피어올랐고, 그녀는 예의를 차릴 틈도 없이 소품 정리를 하는 직원을 불러 세웠다.
저기……혹시……
방금 누가 여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요?
네? 인터뷰 예약한 기자들은 모두 돌아갔을 텐데…… 아!
물류 담당 직원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박수를 쳤다.
잠시만요.
그녀는 분장실 안쪽에 있는 작은방으로 들어가더니 꽃이 담긴 박스를 들고나왔다.
조금 특이한 물건이다 보니 다른 축하 선물과 같이 두지 않았어요.
직원의 말이 맞았다. 무대 뒤의 여느 꽃다발이나 선물과는 달랐다.
이건……
세레나의 두 눈에 비친 건 이 세상 유일한 아이리스였다.
그녀는 공중 정원에서 귀한 자원을 관상용 화초 재배에 낭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장식용 생화"는 대부분 쉽게 보존 가능한 생체공학 꽃이었다.
하지만 앞에 놓인 파릇파릇한 꽃봉오리는 곧 만개할 보라색 꽃망울을 수놓았고, 부드러운 꽃잎에는 영롱한 물방울까지 남아 있었다.
생기 가득한 꽃은 그녀에게 한순간의 황홀함을 선사했다. 아득한 푸른 별에만 자연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줄 알았다.
꿈만 같고 현실에서는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것들이었다.
……
세레나님께서 무대에서 한창 감사 인사를 할 때 보내온 건데, 군대 지휘관 중에도 팬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직원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지휘관님께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어요. 긴급 임무가 있어 오래 남을 수 없다면서 대신 이 선물을 전하라고 하더군요.
작업자가 꽃다발을 건네주자 세레나는 조심히 받아 끌어안았다.
꽃다발의 줄기가 잘리지 않았다. 심지어 끝부분에는 간단한 영양 공급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다. 세레나가 다시 심기만 하면 어떤 곳에서도 피울 수 있다.
한순간의 축하를 위해 꽃가지를 잘라낼 필요 없이 그녀와 함께 흐르는 시간을 겪을 수 있다.
이런 꽃들이 시 속의 초원과 언덕을 가득 메운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너무 아름다워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 같아요. 생체공학 꽃도 똑같이 아름답지만 생화가 주는 인상은 완전히 달라요.
정말 귀한 선물이네요
세레나는 품속의 꽃다발을 더 끌어안았다.
은은한 꽃향기가 고요함 속에 부드럽게 감돌고 있었고 마치 소리 없는 격려와 같았다.
혹시 그 지휘관님이 세레나님의……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호기심에 뱉은 질문은 중단됐다. 잘 모르는 숙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건 큰 실례가 틀림없었다.
괜찮아요.
소녀는 살살 고개를 저으며 따뜻한 눈웃음을 지었다.
오페라 연습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녀가 처음으로 여유로운 웃음을 보였다. 아마 그녀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꽃잎 사이에 카드 한 장이 숨겨져 있었다. 카드에는 그녀에게 익숙한 글씨체가 있었다.
"이리스에게"
아래 글씨체를 보면 다소 급박해 보였고, 시간에 쫓기며 남긴 메모 같았다.
“난 이미 밝게 빛나는 너를 봤어."
"창작 속에서 자신을 찾아라. 좌절과 공포가 있을지라도 자신을 믿고 자신만의 정답을 찾거라."
"이런 말도 들어봤을 거야. 높은 곳에서 뿌려진 빛일수록 그 뿌리는 어두운 땅속으로 깊게 뻗어나간다."
"조급해하지 마.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
급하게 남긴 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체에는 힘이 넘쳤다.
뒤에서 규칙적이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군인 발걸음인 것 같았다.
세레나는 문득 긴장이 앞섰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어떤 일반 구조체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표준 구조체 복장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가시지 않은 분노와 어두움이 드리웠다.
세레나는 단번에 그 구조체 병사를 알아봤다. 그녀의 공연 티켓을 선물받았던 병사였다. 하지만 그는 기타 오페라 관객과 확연히 다른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받은 그녀는 전부터 마음이 계속 불안했던 이유를 비로소 파악하기 시작했다.
젊은 오페라 가수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가 또다시 앞으로 다가섰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누가 그러던데요, 그쪽이 우리 구조체의 생각과 관점도 들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구조체 병사의 가슴 근육은 심하게 기복을 이루었다. 마치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그 오페라 말인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본 물건 중에 가장 우스꽝스러운 물건입니다.
그쪽은 오페라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죠. 그럼 저도 꼭 해야 할 말이 있네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할 때, 윗사람들은 이렇게 창백하고 가소로운 상상으로 희생된 동료들을 각색하다니...... 심지어 자신의 무식함을 자랑하듯 과시하고 있네요!
공중 정원의 주민들은 우리의 희생을 우습게 보고 있군요.
만약 제 태도가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 당장 떠나도 무방합니다.
날카로운 비난, 도발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세레나는 구조체의 말투에서 강렬한 아픔과 실망을 느꼈다.
그는 오페라가 끝난 뒤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아 그녀에게 자신의 분노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높은 곳에서 뿌려진 빛일수록 그 뿌리는 어두운 땅속으로 깊게 뻗어나간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그녀의 잘못을 지적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받아야 할 비판과 질책은 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심판이었다.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상대방의 시선에 마주했다.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힘을 주며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을 억눌렀다.
아니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저에게 다 말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