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아·만가·그중 여섯
월든 교수의 사무실
과학 이사회
통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넓고 깔끔한 방 안을 비추며, 진열장 속에 놓인 모형과 저서, 학술 상장들을 반짝이게 했다.
나무 책상 위에 놓인 찻잔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책상 뒤의 남자는 곁에 있는 기계 까마귀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과학 이사회 동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제 친구가 개량한 신품종 차입니다. 드셔보세요.
여성 구조체는 미소만 지을 뿐, 화제를 이어받지는 않았다.
이곳의 통신 차단 시스템이 보조기에 특화돼 있던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일대일 면담을 요청하셨잖아요. 그저 제 성의를 보여드리는 것뿐입니다.
사실 조금 의외였어요. 항상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함께 바쁘게 돌아다니시길래, 이번에도 같이 오실 줄 알았거든요.
지금 동료를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player name]와(과) 너무 가깝게 지내서 직무 유기라도 한다고 돌려 까는 거야?
전자라면, 교수의 마음은 "잘" 새겨둘게. 후자라면 마침 잘됐네. 요 며칠의 업무 성과를 보여주면, 의심은 싹 사라질 테니까.
스크린이 눈앞에 겹겹이 펼쳐졌다. 네티아가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내리자, 투영이 월든을 감싸며 코드와 도면, 로그가 빠르게 스크롤 되기 시작했다.
이건 넘버 CUB-LN-129의 여러 샘플에서 추출한 은닉 데이터야.
보조기 인공 적 색출 시스템을 이렇게까지 경량화하는 건 이사회에서 최소 세 번은 기각됐던 걸로 아는데, 당신은 여전히 일부 샘플기 버전을 몰래 바꿔놨더라.
반응 속도 데이터가 좀 더 잘 나온다면, 실전에서 오작동으로 사상자가 늘어날 위험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
다른 기록도 한번 보자. 레노아에게 실험을 끝내라고 강요한 기간이 그녀가 신청했던 주기보다 무려 3개월이나 짧았어. 데이터도 그럴듯하게 꾸며놨고, 마침 그해 인센티브 연구비 심사에 딱 맞춰놓기까지 했지.
다른 내용들도 내가 더 읊어줘야 할까, 월든 교수?
몰리간의 후속 업그레이드에 감사해. 사정을 몰랐던 엔지니어들 덕분에 고발 메시지가 활성화되는 시점이 지연됐거든. 그게 아니었으면, 당신이 편하게 지낼 날들이 몇 년은 더 줄었을 테니까.
투영의 차가운 빛이 월든 교수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거두었지만,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월든 교수는 몸을 살짝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마치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듯, 허공에 떠 있는 증거들을 하나씩 천천히 훑어보았다.
매우 인상적이군요. 당신도 그렇고, 레노아도 마찬가지예요. 그 아이는 늘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지만,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의 업무를 인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군요.
안타깝네요. 만약 진심으로 인정했다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레노아의 죽음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
저를 그렇게 무서운 사람으로 보지 마세요. 사실 저는 다른 기회를 제안했고, 다른 곳에서 연구를 이어가도록 권하기도 했어요.
재능 있는 연구자는 어디에 있든 귀중한 자원이죠. 저는 그런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검푸른 머리의 구조체는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인정이니, 가치니... 전부 껍데기뿐인 소리네. 지금 당장 자백서 초안이라도 쓸 게 아니라면, 상황에 맞는 얘기나 좀 하지?
점점 후회되네. 감사원 놈들보다 당신을 먼저 만난 게, 시간 낭비였던 것 같아.
어쩌면 이후의 면담은 전부 필요 없을지도 모르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문을 살짝 열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네티아 총감, 진실을 향한 당신의 집념은 존경합니다. 하지만 진실의 정의를 너무 좁게 두시는 건 아닌가 싶군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군요. 바람도, 온도도 딱 적당하고요. 물론 이건 지구를 잃은 인간이 서투르게 흉내 낸 인공적인 날씨일 뿐이지만, 심신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죠. 제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성과가 허상 위에 세워졌다고 보시는 건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 모든 업적은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 대외 성과들을 하나씩 쌓아 올린 결과물입니다.
당신도 저만큼이나 외부에서 과학 이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아실 거예요. 사람들은 성과를 누릴 때 그 과정 따윈 신경 쓰지 않잖아요.
남자는 스크린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 자료들을 제출해 저를 정직시키셔도 됩니다. 다만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늦어진 진행 상황과 얻지 못한 성과를 먼저 문제 삼을 겁니다. 그러면 지나치게 신중했다고 당신을 탓하겠죠. 그다음엔 해명 자료를 쓰고 불려 다니는 건 당신 차례가 될 테고요.
이 소동이 끝나면 우린 결국 다시 동료로 돌아갈 테죠. 그렇다면 시간과 평판을 감사원에 낭비하기보다 새로운 협력 방식을 모색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당신이 패를 모두 깐 이유도 결국 그걸 위한 게 아닌가요?
누구시죠?
지휘관이 연결을 끊고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마침 네티아가 의자에서 느긋하게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몰리간이 그녀의 어깨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빨리 왔네, 레이븐.
[player name]한테 시야를 공유해 주려고 입 다물고 있느라 정말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거기에 헛소리도 한 바가지나 들어야 했고. 이건 정신적 피해보상 감이야, 빨리 내놔!
월든의 표정이 순간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은 네티아와 몰리간, 그리고 지휘관 사이를 오가다가 결국 지휘관에게 멈췄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죠?
지금 교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데? 예전에 남의 부서에 얹혀 지내던 문외한이 어떻게 내 차단 시스템을 뚫었지? 대체 뭘 할 셈이지?
이 두 가지 질문은 레이븐이 데려온 사람들이 답해줄 거야.
지휘관이 사무실 안쪽으로 한 걸음 비켜서자, 베르테르 박사가 몇 명의 연구원들과 감사원 제복의 전문 요원들을 이끌고 줄지어 들어왔다.
마치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이들이 공기를 앗아 간 것처럼, 월든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총감이 혼자 해독했으면 이렇게 빨랐을 리가 없지. 우리가 도와줬거든.
이젠 인정이나 자원을 들먹이면서 우릴 속일 수 없어. 아무리 예산을 빼돌리고, 수많은 과제를 억눌렀다 해도 우리의 재능만큼은 손댈 수 없어.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믿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천재도 아니야.
사람들은 결과만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나? 난 과정도 중요하다고 봐. 네티아 총감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도 마찬가지고.
베르테르는 한 손으로 목걸이를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켰다.
레노아도 마찬가지야.
베르테르 옆에 있던 감사원 관계자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성의 없이 손뼉을 두어 번 쳤다. 그리고 월든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의 눈빛은 단숨에 차갑게 식었다.
내부 증거 확보 규모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여러 중대 혐의와 감독 기관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 그리고 뇌물 공여 시도와 관련해 감사원은 이미 특별 조사팀을 구성했습니다.
현시점부터 당신의 모든 직무는 정지됩니다. 즉시 저희와 함께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원 관계자는 지휘관과 네티아를 향해 몸을 돌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업무가 이처럼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의 신속한 연락과 정보 공유, 그리고 안전 총감님의 훌륭한 전략 덕분입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감사원 요원들이 월든을 둘러싸자, 그가 애써 유지하던 태연한 표정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당신들이 뭘 안다고 이러는 거예요?
네티아, 제가 과학 이사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해왔는지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배은망덕한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저를 심판하려는 겁니까?
독을 품은 듯한 월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네티아는 차갑게 몸을 반쯤 돌렸다.
네티아가 고개를 들자, 복도 밖의 햇빛이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붉은 눈동자가 빛을 받아 더욱 강렬하게 빛났고, 그 안에는 이전까지 감춰졌던 모든 신중함과 절제가 타오르며, 굴복하지 않는 강렬한 날카로움이 드러났다.
당신을 심판하는 건 내가 아니라, 진실이야. 월든 교수.
진실은 당신의 망상 따위로 왜곡되지 않아.
당신의 궤변은 한마디도 들을 필요가 없어. 진실은 이미 거기 있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당신을 그 진실 앞에 세우는 것뿐이야.
네티아는 얼굴을 돌려, 자부심과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모든 진실을 함께 마주해 줄 동행자가 있어.
지휘관은 같은 마음을 담아 눈빛으로 화답한 뒤, 네티아와 발걸음을 나란히 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네티아의 개인 휴게실
공중 정원
사건을 해결한 뒤의 성취감과 피로감이 함께 밀려왔다. 몸은 휴식을 갈망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기에, 네티아가 축하 자리를 제안했을 때 지휘관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하지만 네티아의 목적지가 북적이는 상업 구역이 아니라, 그녀의 개인 공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소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지휘관은 부드러운 쿠션과 차곡차곡 쌓인 베개, 그리고 벽 모퉁이의 화분에서 그녀가 성실하게 살아온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검푸른 머리의 구조체가 같은 디자인이지만 색깔만 다른 머그잔 두 개를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회색 까마귀가 그려진 잔을 지휘관에게 건넸다.
오늘의 특제 음료에는 알코올이나 카페인, 테오필린 같은 건 전혀 안 들어갔어. 신경도 좀 쉬게 하자고.
이 한 잔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 그리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 같은 곳으로 향하는 이들을 위해. 즐거운 협력이었어, 레이븐.
지휘관과 네티아는 가볍게 미소를 주고받으며 잔을 부딪쳤다. 잔이 부딪치는 순간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두 잔에 그려진 새의 부리가 잠시 스치듯 맞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네티아가 머그잔을 품에 안은 채 뒤로 몸을 기대자, 쿠션이 그녀를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바라보자, 귀밑머리 몇 가닥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원래 내 주말 계획엔... 이렇게까지 파란만장한 일정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래도 다행이야. 과정은 조금 달랐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은 다 이뤘으니까.
네티아는 말을 이어가며 손가락을 허공에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는 듯했다.
비가 오는 밤에 산책하고, 저녁에 술 한잔하고, 아침을 같이 먹고, 간식도 고르고, 집에 돌아와서 음료를 나눠 마시고...
뭐, 적어도 나에게 인내심만큼은 넘치니까.
깃털이 잔뜩 서 있는 걸 보니 자부심이 대단한가 본데? 근데 정리는 잘했어. 레이븐, 10점 추가.
각자 바쁘게 지내면서도 서로의 동선을 이어 교차점을 만들고, 그 순간을 충분히 즐기는 것. 이건 장기적인 과제야.
과제 자체도 그렇고, 내 연구 파트너도 아주 흥미로워서 다행이야.
사실 리스트에는 없지만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게 하나 더 있어.
소파에 푹 파묻힌 구조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네티아는 잔을 옆에 놓고 공중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몰리간이 다른 방에서 날아오더니 통통 뛰며 그녀의 무릎 위에 내려앉았다.
오오오, 네티아. 드디어 해보기로 결심한 거야?! 난 완전 찬성이지!
기계 까마귀의 깃털을 쓰다듬던 네티아의 손이 잠시 멈추더니, 이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새의 부리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처음 프로그래밍할 때 어느 부분을 이렇게 설정했더라... 됐다, 그냥.
네티아는 손을 놓고 손끝으로 까마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몰리간은 헛기침하고는 지휘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있잖아, 잠시 후 그녀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 있거든. 너한테 보여준다는 건, 앞으로도 쭉 너한테만 보여주겠다는 뜻이야. 알겠어?
이상하게도 지휘관은 기계 까마귀의 얼굴에서 걱정과 수줍음이 뒤섞인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몰리간은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몇 번 변신하더니 게임기로 돌아가 입을 다물었다.
카헤티 사건 이후에 많은 기억을 되찾았어. 마치 잘 정리된 도서관에 시기를 알 수 없는 새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듯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 그래서 그동안 몰리간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고 분류해 왔어.
몰리간은 내 지난 삶에서 변치 않는 상수였어. 그 안에 저장된 데이터는 내 기억을 비교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준점 같은 역할을 했지. 하지만 몰리간도 나처럼 여러 번 손상을 겪으면서 저장 기록의 일부는 흐릿해졌고, 또 일부는 불안정해졌어.
그런데 이번에 파일을 정리하면서, 레노아가 몰리간을 위해 만든 "치료 방안"을 발견했어.
네티아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얼굴에 옅은 홍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시선만큼은 피하지 않고 지휘관을 바라봤다.
네가 없었다면 난 이 방안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몰리간의 저장 기록이든 내 의식의 바다든... 앞으로 복구될 부분들을 너와 함께 지켜보고 싶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나와 의식을 연결하자.
네티아는 몸을 기울여 이마를 지휘관의 이마에 가볍게 맞대고는 눈을 감았다.
왼쪽! 네티아, 왼쪽에서 공격이 들어올 거야! 빨리 피해!
알아. 봐... 피했잖아?
HP가 좀 닳아도 괜찮아. 다음은 내 차례니까, 약초를 좀 더 캐 와서 회복 약을 만들어 올게.
좋아! 그럼 내 차례가 오면 마음껏 돌격할 수 있겠네?
잠깐만, 나한테도 좀 남겨줘!
금발이 찰랑이는 소녀가 활짝 웃으며 두 친구의 목을 끌어안고, 양쪽 볼에 얼굴을 장난스럽게 비볐다. 그러자 여름 하늘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막 게임기를 건네받은 은발 소녀가 "어휴"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랑 야킨카는 오후 1교시에 훈련 수업이 있어서... 끝나고 와서 다시 해야겠다.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려!
응, 약속할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주변 풍경이 마치 물 위에 떨어진 금빛 물감이 퍼져나가듯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오직 네티아와 그 보라색 게임기만이 실체로 남아 있었다.
지휘관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허공에서 떨어지던 게임기를 바닥에 닿기 직전에 받아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듯한 파란 머리 소녀가 고개를 들었고, 손끝이 게임기에 닿는 순간 세상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저녁 시간이네요. 식당에 가실래요? 아니면 제가 가져다줄까요?
괜찮아, 배가 안 고파서 말이야. 오늘 일찍 퇴근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베르테르 그 바보 같은 녀석이 한참 고민하다가 드디어 저녁을 먹자고 하더라고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몸 잘 챙겨요.
책상 앞에서 작업하던 여성이 화면 너머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코드에 시선을 집중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지휘관의 손에 달콤한 향이 나는 사과파이 한 봉지가 어느새 들려 있었다.
세상이 녹아내리기 전, 지휘관을 바라보는 그 수정처럼 붉은 눈동자 속에는 지휘관의 모습이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
무너진 잔해 위로 뜨겁게 달아오른 절단 자국이 선명했고, 침식체의 잔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검은 날개 같은 치맛자락이 참혹한 현장을 스쳐 지나갔고, 네티아가 지팡이를 든 채로 한 손으로 귀 옆을 가볍게 눌렀다.
목표 구역 정화 완료. 장비 회수를 부탁할게.
알았어! 네티아, 넌 괜찮아? 먼저 너한테 갈까?
대부대가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어.
통신이 끊기고 귀 옆에서 밝게 빛나던 불빛이 사라지자, 어둠이 다시 그녀를 감싸안았다. 네티아의 몸이 휘청거렸고, 지팡이의 끝이 땅에 깊게 박혔다.
크흑...
네티아는 마지막 힘까지 다 써버린 듯 몸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고, 이마를 손잡이에 기댔다.
번개가 스친 뒤 비가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견딜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린 듯 짙은 구름으로 얼굴을 감추고, 빗방울을 마치 눈물처럼 조용히 흘려보냈다.
처음엔 듬성듬성 내리던 비가 곧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은구슬 같은 빗방울이 검푸른 머리카락에 매달렸다.
하지만 네티아는 고개를 들지도, 일어서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빗줄기 속에서 무릎을 꿇은 채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순간 손에 검은 우산이 생겼고,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군화가 고인 물 위를 지나며 만들어낸 잔잔한 파문이 그녀를 깨운 듯했다. 붉은 눈동자가 가볍게 떨리며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고, 속눈썹 끝에는 축축하고 슬픈 안개가 맺혀 있었다.
이것은 지금의 네티아, 지휘관과 함께 수많은 일을 겪어온 그녀의 추억이었다. 지휘관은 그 추억 속에 머물며 그 시절 내리던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레이븐, 난 혼자 깨어나고 싶지 않아. 적막 속에서, 떠나간 이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지휘관은 손을 뻗어 네티아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가볍게 닦아냈다.
그리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무언가가 녹아 희미한 빛이 되었고, 그 빛은 조금씩 밝아졌다.
응, 거기 있구나. 지금 널 보고 있어.
손바닥이 맞닿으려는 찰나, 수억 개의 투명한 빗방울이 공중에서 멈춰 섰다. 그 빗방울들은 마치 땅 위에 펼쳐진 은하수처럼 찬란히 빛났다.
아니, 비가 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네티아는 지휘관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우산과 지팡이를 내던지며 하늘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빗방울들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일제히 방향을 틀며
수많은 은빛 실처럼 변해 밤하늘을 거슬러 솟구쳐 올랐다.
저 납빛 하늘을 뚫고, 너와 함께 날개를 펴고 여명을 찾아 날아오를 거야.
부드럽지만 강렬한 상승 기류가 둘을 감싸며, 가볍게 지면에서 떠오르게 했다. 하늘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눈물의 바다를 따라, 둘은 함께 높이 날아올랐다.
모든 것이 고요한 가운데, 두 그림자가 가장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솟아올랐다.
금빛과 붉은빛, 보랏빛과 분홍빛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광경 속에서
빛과 그림자 사이로 네티아가 문득 몸을 돌려 환하게 웃었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햇살이 창살 틈으로 구조체 숙소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이미 새의 형태로 돌아온 로봇 까마귀는 양쪽 날개의 동력 장치를 다섯 번째로 점검한 뒤, 찻상 위를 느릿하게 두어 걸음 오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서로 기댄 채로 잠들어 버리다니...
하긴, 이제 좀 쉴 때도 됐지. 어차피 저녁 식사까지 시간도 좀 있으니, 조금 더 자게 두자.
이대로 계속 보고 있다간 내 깃털이 핑크색으로 물들겠어. 상업 구역에 가서 뭐라도 사 올까? 뭘 먹을까...
까마귀가 날개를 펼치며 창문 밖으로 날아올랐다. 그 뒤편 소파 위에는 회색과 검은색 두 실루엣이 서로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날개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꿈을 공유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