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연합 항로의 눈은 영원히 녹지 않는다고들 한다. 이곳의 땅은 너무 차갑고 척박해서, 사람이 살아가기 어려운 정도였다.
차가운 바람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듯, 쓸쓸한 울음소리를 끝없이 내뱉고 있었다.
혹독한 환경, 턱없이 부족한 식량, 희박한 햇살... 이런 땅에서 피어난 문학마저 슬픔을 노래했다.
하지만 그 슬픔과는 달리, 영원히 얼어붙은 땅 위에 새겨진 글귀들은 언제나 영혼을 담고 있었고, 그 영혼만큼은 늘 뜨거웠다.
각 항구를 오가는 것은 북극해를 정복한 고속 쇄빙선뿐만이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의 피와 술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얼어붙은 땅은 지구에 남은 마지막 인간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주둔지의 모닥불은 유난히 작아 보였지만, 사람들의 어둠을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다가올 겨울과 불확실한 미래가 여전히 앞에 놓여 있었지만, 지금 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이들에게는 잠시나마 그런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방랑가수가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기타를 꺼냈다. 이제는 새로운 기타 줄을 구할 곳도 없었기에, 그녀는 마치 갓난아기를 다루듯 기타를 소중히 다뤘다.
기타를 손에 든 방랑가수가 목소리를 가다듬자, 타오르는 장작 불꽃과 함께 그녀의 노랫소리가 주둔지 곳곳에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226|153|170}우리는 황금빛 시절의 먼지 속을 걸어가네{226|153|170}
이스마엘은 자연스럽게 노랫소리에 이끌렸다.
이스마엘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모닥불 곁에 앉아 후드를 벗고는, 조용히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226|153|170}잿더미의 메아리 속에서{226|153|170}
{226|153|170}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찾아냈네{226|153|170}
새로운 시작을 찾아냈다라...
이스마엘은 문득 모닥불 속에서 어린아이의 <phonetic=자신의 모습을>모습</phonetic>을 보았다.
순간, 불꽃이 춤을 멈췄다.
주변의 모든 것이 마치 책 속의 한 장면처럼 멈춰버렸다.
이스마엘이 손을 들어 무언가를 살짝 넘기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불꽃도, 노랫소리도, 저 멀리 펼쳐진 별하늘까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한 권의 책이 되어, 페이지가 넘어가듯...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어쩌면 "신"의 위대한 과업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그런 영역 말이다.
어쩌면 책장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그저 이스마엘이라는 존재가 더는 닿을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꿈에서 깨어난 듯, 이스마엘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방랑가수의 노랫소리가 아닌, 기억 속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라헤일이 늘 그렇듯 미소를 띤 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저녁 시간도 지났는데 이렇게 숨어서 책 보고 있었어?
아의랑 애들이 널 찾고 있더구나.
아...
이스마엘이 홀로그램 화면을 띄워보니 친구들의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메시지는 계속 쌓여가고 있었고, 프로필 아이콘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을 정도였다.
이스마엘은 홀로그램 화면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 영상을 찍어 보냈다.
이스마엘이 친구들을 겨우 달래고 돌아섰을 때, 스승은 이미 그 책을 손에 집어 들고 있었다.
종이책을 좋아하다니, 나를 닮았구나.
이스마엘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제자는 스승을 닮아간다고요.
라헤일이 책장을 가볍게 넘기며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 부등식은 시스템으로 유입되는 열량과..."
"이후 학자들은 기존 이론에 새로운 가설을 도입하여..."
"따라서 이 원리가 다음과 같이 증명되며..."
혼자 있을 때도 이런 딱딱한 책을 보고 있다니? 게다가 이 내용은 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잖아?
그냥 심심풀이로 보는 거예요.
네가 그렇지. 너무 진지한 게 문제야. 좀 더 활기차게 지냈으면 좋겠어.
네 나이 때 할 만한 것도 해야지.
모델 번호가...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
라헤일이 이스마엘의 책을 가볍게 두 번 터치하자, 인쇄된 글자들이 순식간에 물결치듯 움직이며 변화했다. 책 속 글자들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마법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라헤일이 책을 덮자, 표지의 제목은 <별의 전설>로 바뀌어 있었다.
라헤일은 책을 이스마엘에게 건넸다.
가끔은 이런 소설도 읽어봐.
네, 꼭 다 읽어볼게요.
라헤일이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아이고, 너란 애는...
난 이만 가볼게.
떠나려는 스승님을 보며 이스마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님을 불렀다.
스승님.
라헤일이 돌아서자, 걱정이 가득한 표정의 제자가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그 실험... 정말 참여하실 건가요? 요즘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라헤일은 자기 딸과도 같은 제자에게 다가가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건 영광스러운 소임이자 내가 바라던 일이기도 해.
라헤일이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참, 저녁이나 같이 먹으러 갈까? 어느 행성에 새로운 맛집이 생겼다더군. 제일 맛있는 세트 메뉴가 2인분이라던데, 우리 둘이 가기에 딱 좋겠구나.
이스마엘은 변함없는 스승님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같이 가요.
미소가 머무는 그 순간,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마치 책장을 넘기듯, 그 기억은 서서히 흩어져 갔다.
대류층을 비행하는 동안 들리는 백색 소음에, 수송기 안의 모두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옆자리에 있던 루시아는 이미 긴장하며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조종실입니다. 현재 기류가 불안정한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잠시 흔들림이 있겠으나 곧 안정될 예정입니다.
그 흔들림에 지휘관도 잠에서 깨어났다.
지휘관님, 깨어나셨군요.
좀 더 쉬실래요?
지휘관이 몸을 가볍게 풀어보았다. 예전에 입은 상처는 거의 다 나았지만, 히포크라테스 교수는 여전히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당부했었다.
사실 저도 지휘관님께서 이렇게 일찍 복귀해서 임무에 참여하시는 걸 찬성하진 않아요.
백야 사건 이후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비교적 수월한 임무들만 맡아왔고, 이번에도 그런 임무 중 하나였다.
리브는 의식의 바다에서 오는 은통 때문에 생명의 별에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당분간 임무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지휘관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은 임무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바로 그때, 낯선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분홍 머리를 한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지휘관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스마엘은 마치 지휘관의 질문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군,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난 감사원의 이스마엘이야.
"네"가 나를 처음 보는 건 맞아.
"네"가 나를 처음 보는 건 맞아.
이스마엘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지휘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특이하긴 하지만 따뜻한 느낌이 드는 선배"... 이스마엘에 대한 지휘관의 첫인상이었다.
지휘관은 문득 스친 이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맞아.
임무 브리핑에서 감사원 소속 인원이 잠시 동행한다는 얘기가 있었던 게 떠올랐다.
좋지.
임무 정보에 따르면, 이번 목적지는 과거에 세계 정부가 건설했지만, 퍼니싱 사태 이후로 방치된 지하 시설이었다.
이후 지상의 주민들이 이 지하 시설을 발견해 보육 구역 같은 거점으로 개조했고, 현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4일 전, 이 거점의 리더 호도가 공중 정원에 직접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호도는 최근 몇 주 동안 거점 주변의 퍼니싱 농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합 생물 출현 빈도도 증가하고 있다."
양측이 받은 정보는 거의 일치했다.
"거점 인원 4,364명." "임무 목표: 인원 이송 지원."
다른 보육 구역으로 옮긴다는 거네?
호도 리더가 이곳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판단했대요. 만약 퍼니싱 농도가 더 높아져서 외출조차 불가능해지면, 모두가 지하 거점에 갇혀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네요.
임무 브리핑은 이미 단말기로 다 전달됐는데... [player name], 단순히 정보 확인하자고 이런 얘기를 꺼낸 건 아니지?
분홍 머리의 여성이 의미심장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뭘 물어보고 싶은 거야?
이스마엘의 참여는 그저 형식적인 수준이었다. 임무 자료에는 마치 편의상 동행하는 정도로만 언급되어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감사원 동행 인원의 안전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라는 문구였다.
감사원은 원래 비밀스러운 행보로 유명했고, 실제로 지상에 내려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지상의 각 세력 진영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일상 업무를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이 세계 정부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지상으로 내려온 건... 황금시대에서 이어져 온 어떤 문제 때문인 걸까?
같은 공중 정원 소속이긴 하지만, 이번 임무의 지휘관으로서 그녀의 진짜 목적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분홍 머리의 여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암실"에 대해 들어봤나?
이스마엘은 의외로 솔직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과거의 비밀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암실"은 세계 정부가 설립된 후에 비밀리에 지은 시설들인데, 그리 많진 않았고, 각각의 용도도 조금씩 달랐지.
쉽게 말하면, 비밀 연구소 같은 존재야.
아니.
당시 과학 이사회는 겉으로만 세계 정부 산하였지, 실제로는 제멋대로였거든.
서로 협력하면서도 견제하는 관계였어.
세계 정부는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연구 기관이 필요했으니까.
지금 보면 그렇게 획기적인 연구 성과는 아닐 수도 있지만, 감사원은 이런 연구 자료들을 조사하고 회수할 의무가 있어.
그래. 호도가 공중 정원에 연락하는 바람에 "암실"이 발견됐고, 감사원이 나설 수밖에 없었지.
이스마엘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늘 그래왔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왜 걱정하는지는 이해해. 감사원이라고 해서...
이스마엘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다른 말로 바꾸었다.
난 별다른 의도 없어. 이번 임무에선 네 지휘를 따를게.
내 행적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철수하기 전에 내 "임무"를 끝낼 거고, 너희 작전에 방해되는 일은 없을 거야.
이스마엘의 입가에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지휘관은 이스마엘의 미소에서 뭔가 "흥미롭다"는 듯한 감정을 읽어냈다.
조종실입니다. 10분 후 목표 지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지휘관님, 리와의 통신이 회복되었어요.
목표 지점이 지하라 통신이 잘 안됐었는데, 이제야 리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단말기로 통신을 시도했지만, 웬일인지 신호가 자꾸 끊기고 화면 속 리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 퍼니싱... 발견되었... 이합 생물...
잠시... 버텨... 철수할...
그 뒤로 리의 총성이 들리더니 통신이 끊어져 버렸다.
지휘관님! 통신이 방해를 받아 끊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