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사랑을 위해 죽을 생각이 없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걸 감정의 극치라 할 수 있겠는가?
꿈에서 생긴 감정이 어찌 진짜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
여러분, 방금 감상하신 <환혼기>가 마음에 드셨나요?
오늘은 질릴 만큼 보신 전쟁 이야기 대신에 칠석이라는 특별한 날을 맞이해 새로운 공연을 여러분께 보여드릴 예정이에요.
로봇 꼭두각시가 사방에 있는 지금, 제대로 된 무희를 이 시대에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오늘 저희가 데려온 무희들은 아름다운 자태와 날렵한 몸짓을 자랑하죠.
……
꽃잎이 베개에 떨어지고~ 피곤한 밤이 달콤하게 잠드니~ 봄의 경치는 멈추지 않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불빛 아래의 연약한 그림자~ 매미의 울음소리가 빗소리 같구나~
……
무희의 옷소매가 휘날렸고, 꽃과 나비들이 그녀들 주위에서 춤추듯 날아다녔다. 이때,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무희 손가락 끝의 얇은 천을 말아 올렸다. 그 바람은 기쁨에 젖은 관객을 스치고, 화려하게 장식된 기둥을 넘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 구룡의 아름다운 야경과 번화한 항구를 내려다봤다.
영상은 여기서 정지됐다.
C-973920 데이터의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영상의 크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컸다. 그래서 단말기의 전자 스크린 영상은 배속으로 재생한 것이었음에도, 화려한 옛 구룡의 번영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서진 벽돌과 기와만이 산간 극장의 옛 영광을 말해주고 있었다.
단말기를 조작하던 구조체는 분석한 자료를 빠르게 훑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열어볼 수 있는 자료는 대략 다 훑어보긴 했지만...
대부분 황금시대에 있던 구룡의 희곡과 관광지 홍보물에 관한 것들이고, "요람"에 관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공중 정원에서 받았던 알 수 없는 신호의 발원지에 대해서도 찾아냈습니다.
이어 구조체가 임무 영상 속 쓰러져있는 로봇을 가리켰다.
퍼니싱이 발발했을 때, 이곳의 인간 관리자는 작업 로봇을 폐기할 새도 없이 황급히 하산했던 거 같습니다.
그 구원 요청은 여기 고장 난 로봇들이 오류로 잘못 보낸 신호들이었는데,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얼마 전, 공중 정원에서는 해독하기 어려운 신호 주파수 구간을 대량으로 포착했다. 그 신호 출처는 구룡의 서남쪽 산속에 있는 관광지였다.
야항선에서도 그곳을 조사하러 갈 예정이었지만, 야항선의 업무가 많은 상황이어서 공중 정원에 협력 요청을 보냈다.
그래서 이 임무는 자연스럽게 야항선과 왕래가 잦은 지휘관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관광지 주변을 샅샅이 확인해 봐도 침식된 로봇 외엔 별다른 이상 현상이 없었다.
잃어버린 희곡 자료를 이렇게나 많이 회수했으니, 수우파 놈들이 엄청나게 기뻐하겠군.
야항선 무대에서 복귀 공연을 열기 위해, 그들이 무용단을 만들고 있다던데.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악수회였나?
기존 임무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라서 휴가 온 것 같아. 침식체도 별로 나타나지 않아서 소라 각시가 우릴 위해 위험 요소를 다 치워 준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라니까
소라가 아니라 우렁이야.
저희는 일단 보급품을 체크해 놓겠습니다. 수송기가 도착하기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으니, 지휘관님께서는 이곳에서 잠시 쉬고 계세요.
지구의 많은 곳을 다녀본 지휘관이지만, 이렇게 경치가 좋은 숲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원이 물자를 체크하는 동안엔 할 일이 없기도 했다.
푸른 돌로 만들어진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자, 어느새 산림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자료에 따르면, 이곳은 명소에 있는 오래된 고찰로 황금시대 말기에 방문객들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쇠퇴했다고 한다.
낡은 문으로 들어가자, 무너진 낮은 벽 뒤로 고목 한 그루가 보였다. 고목 가지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꽃이 필 계절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꽃잎이 눈앞에서 흩날렸다.
지휘관은 유유히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우아하게 춤추는 그림자를 보게 됐다.
야항선에서 아름다운 무희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지만, 눈앞의 춤은 지금까지 봤었던 그 어떠한 춤과도 달랐다.
지휘관은 황금시대의 구룡보다 더 오래전의 꿈에 빠지기라도 한 듯,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멍하니 바라봤다.
꽃잎 사이에서 춤을 추는 저 그림자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꽃잎 속에서 춤추던 여성이 지휘관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지휘관은 부채 아래 가려진 눈과 자기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휘관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어요.
등 뒤에서 들려온 시끄러운 목소리가 침묵을 깨며, 지휘관을 고요한 풍경에서 끄집어냈다.
왜 그러시죠?
구조체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지휘관이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저쪽은 왜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뒤돌아본 순간, 눈앞의 환영 같던 소녀는 온데간데없었고, 그곳에서 떨어지던 꽃잎도, 펄럭이던 옷소매도 보이지 않았다. 허름한 마당과 고목만이 남아 있었다.
전에 본 건 모두 허망한 물거품이자, 물속의 달이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그런가요? 제가 왔을 땐 지휘관님만 계셨어요.
가상 현실 같은 걸 거야.
뒤늦게 온 조풍파의 누군가가 대화를 듣고는 길가에 돌로 위장한 기계 장치를 손에 들었다.
황금시대 말기부터 이 관광지는 제대로 관리된 적이 없었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가상 현실의 영상과 리얼 시뮬레이션 같은 걸 많이 만들었었고, 상인회에서 무희 꼭두각시를 엄청나게 사들이기도 했었지.
그걸 산에 많이 배치해 놓았었는데, 정식으로 사용되기도 전에 아쉽게도 퍼니싱이 발발했어.
네가 본 건 장치에 고장이 일어나면서 투영된 영상일 거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정확하진 않지만, 그냥 환상을 봤다고 생각해. 투영된 영상 속 모든 건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남은 게 없어.
지휘관님, 모든 시설을 확인했으니 하산하시죠.
지휘관은 다시 고개를 돌려 고찰을 봤다. 그 오래된 고찰은 천년이 지나도 이곳에 남아, 시간이 모든 티끌을 날려버릴 때까지 꿋꿋이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그때, 산 중턱에서 힘 있는 북소리가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저녁을 알리는 북소리야.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들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북을 치고 싶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인간은 이곳을 지키지 않았지만, 구룡의 로봇은 설정된 명령에 따라 이곳을 지켰어. 그래서 매일 아침엔 종을 저녁엔 북을 울리는 걸 잊지 않았지.
지금은 그 로봇들이 멈춰버려서, 우리가 철수하면 더 이상 종소리 들을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이 북소리가 끝나면, 이곳에 존재했던 환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거야.
원래 이렇게 감성적인가요?
모두가 떠난 뒤, 비취색을 띤 그림자가 고찰의 기둥에서 걸어 나왔다.
……
그들은 갔어요.
죄송합니다. 제 기체가 오래돼서, 회로에 너무 많은 오류가 생겼습니다. 게다가 이상 신호도 숨기지 못해서 많은 이들을 불러 모으게 됐습니다.
보낸 구조 신호에 동포가 응답할 줄은 몰랐습니다. 모처럼 초대해 주셨는데, 전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오래된 발성 기관에서 시뮬레이션 된 소리가 고장으로 인한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괜찮아요. 선현님께서는 이해해 주실 거예요.
다시 한번 옛 친구의 춤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걸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 자료들은 제 답... 답례입니다.
낡은 로봇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후, 현관에 기대어 아무도 없는 마당을 바라봤다.
로봇인 전 운 좋게도 깨끗한 의식의 바다를 갖게 됐고, 다른 이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삶은 이토록 짧고 아쉬움만 더해지는 것일까?
죽더라도 같은 곳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낡은 로봇이 탄식 속에서 작동을 멈췄다.
……
그 여성도 사라져가는 향의 연기처럼 탄식과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