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 선 지휘관은 모습이 바뀐 강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원래 맑던 강물은 많은 흙과 모래가 뒤섞이면서 흙탕물이 되었다.
거침없이 흐르는 강물은 강가의 모든 걸 파괴하고 있었고, 굵은 나무 몇 그루만 물결 속에서 흔들리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어느샌가 평온함은 사라지고, 천둥과 같은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자연이 재난이라는 무서운 얼굴을 드러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했음에도 그 위력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가의 식물 샘플을 수집하던 중, 21호가 갑자기 상류에서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고 경고했다.
21호의 경고가 없었다면 산홍수에 휘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산홍수로 인해 하산하는 길도 막혀 버렸다.
다시 한번 단말기에 있는 지도를 확인해 보니, 강을 우회하여 정차했던 곳에 가려면, 왔을 때보다 최소한 다섯 배 시간이 소모될 거 같았다.
원래 계획은 오늘 밤에 보육 구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가방의 대부분 공간을 유리 용기를 담는 데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텐트나 침대를 준비하지 못했다.
21호는 여기서 자면 돼.
21호는 땅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휘관도 21호처럼 땅바닥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긴 하지만, 산홍수가 비를 동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임시 오두막을 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왜 두 개가 필요해?
구조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지휘관은 자신이 오두막 안에서 자고, 몸집이 작은 21호는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서 자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비가 오면 밤새 비 맞게 될 21호의 모습까지 상상하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됐다.
?
21호는 한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21호가 뭘 도와줄까?
말이 끝나기 21호의 작은 모습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이윽고 주위 나무들이 순식간에 봉변당하게 됐고, 길이가 다른 나뭇가지들로 변해 지휘관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작은 산처럼 쌓여있는 나뭇가지와 앙상한 모습의 나무들을 보며 지휘관은 황급히 21호를 말렸다.
가볍게 땅으로 착지한 21호는 손에 묻은 나무 부스러기를 털고 무기를 집어넣었다.
이다음엔 어떻게 해?
지휘관을 바라보는 21호의 눈동자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위를 치운 뒤, 비수로 짧은 나뭇가지 하나를 뾰족하게 깎았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로 땅에 몇 개의 깊은 구멍을 냈다.
그다음 길고 유연한 나뭇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골라내, 한쪽 끝은 방금 만든 구멍에 꽂고, 다른 한쪽은 다른 구멍에 꽂은 가지와 연결해서 원형 아치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아치의 바깥쪽에 짧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가득 덮어 주고, 바닥엔 마른 낙엽을 깔아주자, 임시 오두막이 완성됐다.
1시간 이상 고생해서 만들어 낸 작품을 보자, 성취감이 솟구쳤다.
21호도 해보고 싶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21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에 드물게 흥이 느껴졌다.
새로운 사냥감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과 비슷했다.
21호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 뒤.
음... [player name]의 것과 조금 달라.
눈앞의 임시 오두막은 비스듬히 잘린 거위알처럼 삐뚤삐뚤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 때문에 촉수가 달린 녹색 성게처럼 보이기도 했다.
21호는 눈앞에 나란히 있는 두 오두막을 바라보며, 비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싫어. 21호는 자기 걸 갖고 싶어.
21호는 바로 삐뚤삐뚤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이제 21호의 영지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지휘관은 비수 뒤쪽의 부싯돌로 모닥불을 피운 뒤, 임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탁탁 타오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면서 밤이 이런 고요함 속에서 영원할 것만 같았다.
[player name]...
나뭇잎 사이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player name]은(는) 21호가 모르는 것과 할 줄 모르는 걸 많이 알고 있어.
그게 모두 필요한 거야?
그럼, 필요 없는 거야?
잠시 침묵하던 21호는 다음 질문을 했다.
21호는 이해가 안 돼.
미래의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 했지.
결과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걸 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어.
[player name]은(는)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어. 그게 후회로 바뀔 수도 있어?
……
21호는 오랜 시간 동안 침묵에 빠졌다. 그녀가 잠들었다고 생각할 무렵,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21호의 오두막과 가까운 벽 쪽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게 보였다. 그 구멍으로 작은 흰 손이 들어왔다가, 전방에 장애물이 없는지 확인한 뒤, 다시 빠져나갔다.
눈꽃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지휘관의 눈을 마주친 눈동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리려고 했다가 다시 각오한 듯 지휘관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연결됐어.
영지. 21호와 [player name]의 영지가 연결됐어.
21호가 [player name]의 영지에 침입한 적이 있어.
21호는 [player name]이(가) 21호의 영지에 들어왔으면 좋겠지만, [player name]은(는)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어.
[player name]이(가) 21호의 영지에 들어오기 싫은 건 아닌가 생각했어.
21호는 [player name]을(를) 21호의 영지에 끌어들일 용기는 없어.
그러다가 [player name]이(가) 영지에 들어오길 바라는 게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어.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대답을 듣는 것보다 시도도 해보지 않는 게 더 후회될 것 같다고 방금 깨달았어.
"필요한 것만 하고, 불필요한 건 하지 않는다." 이건 21호에게 있어 필요한 일이야.
21호의 눈꽃 같은 눈동자에 비친 불꽃이 얼어붙었던 눈과 얼음을 녹이려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때, 오두막 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빗방울은 나뭇잎을 타고 모닥불에 떨어졌다.
그러자 불빛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서로 바라보는 지휘관과 21호의 눈동자 빛만 남게 됐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닥불은 빗물에 의해 꺼졌고, 세상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 눈동자 속 녹아내린 얼음과 눈꽃이 소녀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21호의 영지에 [player name]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부드러운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구멍을 통해 지휘관의 가슴 위에 올려졌다.
같은 영지에 있는 이들은 서로 체온을 나눠.
[player name]이(가) 없으면, 21호가 빌려줄게.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속에서 가슴의 따스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푹 잘 수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집행 부대의 에이스를 잃어버린 줄 알았잖아요.
태도가 바뀌었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도 당신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어쨌든 협력 파트너니까요. 어머. 샘플을 이렇게나 많이 채집했어요?!
다시 과학 연구 온실로 돌아온 건 다음 날 정오가 돼서였다. 샘플 더미를 본 담당자는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은 완전히 잊은 듯 들떠 있었다.
지휘관님과 21호가 산에 갇히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샘플만 생각하느라 다른 건 고려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렇게 하시죠. 따로 드릴 건 없고, 사과의 의미로 꽃을 선물로 드릴게요.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보세요.
그래요. 그럼, 21호는요?
좌우로 꽃을 둘러보던 21호의 시선이 하얀색 꽃봉오리에 꽂혔다.
꽃봉오리에 다가가 킁킁 냄새 맡은 21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21호는 이거 갖고 싶어.
어,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요? 이건 유동 나무에서 이식한 건데, 모체로부터 분리된 후에 정상적으로 자라날 수 있는지, 실험용으로 사용하던 꽃이에요.
그래서 꽃이 피지 않을 수도 있어요. 다른 꽃도 많은 데, 다른 걸 선택하는 건 어때요?
이 냄새, 21호한테 친근해.
그런가요. 그럼, 배양기에 넣어드릴게요. 언젠가 꽃이 피었으면 좋겠네요.
참, 오늘 저녁에 작은 환송회를 준비했는데, 혹시 두 분 참석 가능하세요?
강제 사항은 아니라서 오지 않으셔도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 오셨으면 좋겠네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그리고 마주치는 순간마다, 관계는 조금씩 바뀌기 마련이다.
21호도 갈게.
중요한 건 그 한 걸음을 내디디고, 손을 뻗어 후회 없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는 수송기 안에서 21호는 꽃봉오리를 심은 배양기를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21호는 뭔가를 비교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꽃이 피면 어떤 모습일지 21호는 몰라.
21호는 지금 냄새도 좋아해.
21호가 배양기를 들어 올렸다. 창으로 들어온 태양 빛이 배양기에 드리워지면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지휘관이 저도 모르게 하품했다. 연구원들의 열정적인 배웅에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지자, 약속이라도 한 듯 부드러운 지지대가 느껴졌다.
이번엔 어깨를 빌려줄게.
그림자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했지만...
서로 연결된 마음엔 거리라는 제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